2007년 11월 9일 금요일

'로스트 라이언즈', 말이 너무 많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면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로스트 라이언즈(Lions for Lambs)'를 본 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로스트 라이언즈'라는 제목도 순전히 거짓말이다.

사자 나온단 말이다!



아무튼, 영화로 돌아가자.

'로스트 라이언즈'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첫 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스테판 맬리(로버트 레드포드)의 이야기다.

둘 째는 공화당 상원의원 재스퍼 어빙(톰 크루즈)과 방송사 여기자 재닌 로스(메릴 스트립)의 이야기다.

세 째는 미 육군에 입대해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된 스테판 맬리 교수의 제자 2명의 이야기다.



이쯤 됐으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위의 세 가지 이야기가 만나게 될 것이란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딱 여기까지 볼만하다. 3개의 멀티 플롯라인을 하나로 모이게끔 셋업하는 데까지는 흥미진진한 편이다. 하지만, 수다 토너멘트를 하듯 대화만 열나게 하는 영화로 변신하면서 맥이 풀려버린다. 오죽하면 영화를 보다 말고 양말이라도 벗어 입을 콱 막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겠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정치얘기하는 영화니까 대화가 많은 건 이해해야 하지 않냐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는 대화가 많은 정도가 아니다. 재스퍼 어빙과 재닌 로스는 재스퍼의 D.C 사무실에서 시작부터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열나게 수다를 떨다가 끝나고, 캘리포니아의 대학교수 스테판 맬리도 농땡이 까는 대학생 토드(앤드류 가필드)를 붙잡고 열나게 수다를 떤다.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투입된 맬리교수의 두 제자도 크게 다를바 없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캘리포니아, D.C, 아프가니스탄에서 2명씩 짝을 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를 떨다가 끝나는 영화라고 보면 된다. 대화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화 빼면 남는 게 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아무리 대화가 많더라도 정치영화니까 그래도 흥미로운 게 많지 않냐고?

그렇기를 바랬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전개되면서 굵직굵직한 문제제기를 하는 식이었다면 별 문제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로스트 라이언즈'도 원래는 이런 식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개의 플롯이 하나로 합쳐진 다음부터는 대화가 전부다. 영화를 계속 끌어줄만한 흥미로운 줄거리도 사라지고 모든 게 대화에 묻혀버린다.

대학교수와 대학생, 정치인과 기자, 아프가니스탄의 군사작전 이야기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 것은 아무래도 아프간 군사작전이었다. 세 플롯이 여기로 모이기 때문에 영화의 메인 줄거리를 쫓아가다 보면 당연히 아프간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될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전투씬이 많은 액션영화가 될 것을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대학교수와 공화당 상원의원 모두 아프간에서 개시된 새로운 군사작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만큼 줄거리가 아프간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바짝 조여질 것으로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학생에게 설교를 하고 공화당 상원의원과 기자가 전쟁을 주제로 서로 잽을 주고받는 것까지는 당연히 나오겠지만 세 플롯이 모인 아프간 군사작전이 메인 이벤트인 것엔 변함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메인으로 생각했던 줄거리는 흐지부지 되고 대학교수와 학생간의 대화내용, 정치인과 기자간에 주고받는 인터뷰 내용이 메인으로 둔갑한다. 처음엔 이들의 대화내용이 흥민진진해 보이지만 대화가 상당히 길어지면서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까진 좋은데 메인은 이게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메인이었다.



지긋지긋할 정도의 대화를 통해 뭔가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까지는 맞다. 하지만, 기나 긴 대화가 유일한 전달방법이다보니 대화내용을 듣다가 지치게 만든다. 뭔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는 영화라는 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끝이 없어 보이는 대화를 유일한 전달방법으로 할 필요는 없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도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전달할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3개의 플롯라인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메인 줄거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곳곳에 '메세지'를 심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찾아내는 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로스트 라이언즈'를 보고나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주 앉아서 수다를 떠는 것 하나로 모든 걸 다 해결하려고 했느니 말이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영화를 보라고 만든 게 아니라 자기네들끼리 나누는 대화내용을 들으라고 만든 영화다. 하고싶은 말 다 하겠다는 것 딱 하나 빼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가 재미있든 없든 상관 안하겠다는 식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목적은 단 한가지: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놓는 것이다.

전달하고픈 메세지는 그대로 남겨놓더라도 이것보다는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를 보고 있으면 과연 이 사람들이 '영화의 재미' 따위에 신경을 쓰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재미가 전부라는 건 아니다. 오락영화는 재미가 전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는 오락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다.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묵직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로스트 라이언즈'의 최대무기이기도 하다. 포장 하나는 멋지게 했다. 톰 크루즈, 로버트 레드포트, 메릴 스트립 정도라면 1류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정치영화에 함께 나왔다니까 괜시리 묵직한 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체는 그게 아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쉬지 않고 움직이던 배우들의 입밖에 기억나는 게 없는 영화다.



정치인과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 관심이 많다면 TV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찾아 보면 된다.

대학교수와 학생간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게 흥미진진해 보이는 사람은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진지한 대화를 나눌 교수를 직접 찾아보면 된다.

육군에 자원입대한 2명의 대학생 이야기? 이보다 훨씬 진한 감동이 전해지는 전쟁영화가 많으니 잘 찾아보면 된다.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는 토론이 테마 아니냐고? 토론? 그 흔해빠진 토론? TV를 켜도 토론, 사람들끼리 만나도 토론, 인터넷에서도 토론, 여기도 토론, 저기도 토론판이다.

'로스트 라이언즈'를 극장까지 가서 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관련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사람/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만든 영화인 것 같은데 정작 정치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사람들이 볼 땐 새로울 게 하나도 없는 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그럴싸 하지만 실제로는 별 것 없는 영화로 보일 수도 있는 것.

공화당, 민주당, 반전영화다 닝기미다 하는 것은 다 둘 째 문제다.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세지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로스트 라이언즈'의 가장 큰 문제는 영화 자체에 있다. 영화 보다말고 양발 벗어들고 스크린 앞으로 돌진하는 사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인데, 정치에 별로 관심없는 사람들은 '로스트 라이언즈'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정치에 관심 있더라도 대화가 전부인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고해서 아주 남는 게 없는 영화는 아니다. 난 적어도 하나는 건졌다.

그게 뭐냐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의 리턴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UA 로고가 다시 돌아왔다.

제임스 본드 팬들에겐 매우 정겨운 로고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기대에 못미쳤지만 오랜만에 UA 로고를 본 걸로 만족하련다...

'로스트'의 다니엘 킴, 음주운전 덜미

미국 ABC의 TV 시리즈 '로스트(Lost)'에 출연중인 다니엘 대 킴(Daniel Dae Kim)이 지난 10월말 하와이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와이'와 '음주운전'이라는 키워드와 개인적으로 상당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잘 아는 술집에 가면 '지금 어디서 HPD(Honolulu Police Department)가 음주단속중이니 다른 데로 돌아서 가라'는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는데 참 안타깝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음주운전으로 잡히자마자 수갑 채우라고 양손 내밀었다지?

내 친구녀석들 중에도 음주운전 안 걸려 본 녀석이 없다.

나도 음주운전으로 여러 번 걸렸고 음주운전 사고도 낸 적 있다. 사고로 자동차가 바디샵에 들어가 있는 사이 바디샵에서 임시로 빌려준 차를 끌고 또 술 먹으러 나갔던 넘이다. 그런데, 음주운전으로 벌금을 물거나 교도소에 간 적은 없다. 경찰단속에 걸린 적은 있지만 다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매번 음주측정기가 없는 경찰한테 걸린 덕분에 '거꾸로 숫자 세기', '앞으로 10걸음-뒤로 돌아-다시 10걸음 걷기', '경찰 플래시 라이트 눈동자로 쫓기' 같은 테스트로 넘어갈 수 있었다.

HPD: 술 냄새가 무지하게 나는 걸?

나: 아냐. 딱 한잔 했다니까.

HPD: 한잔이 아니라 한병이겠지?

나: 한잔이라니까!

HPD: 술잔이 아니라 술병 냄새가 나는데?

나: 네 코가 잘못된 거라고!

HPD: 알았어. 그럼 앞으로 10걸음 갔다가 뒤돌아서 다시 10걸음 걸어서 제자리로 돌아와봐.

나: 오케이! 이거 꼭 모델 된 것 같넹. I'm too sexy for my body~♫ 찍고 돌고, I'm a model, you know what I mean~♫

이쯤 놀아줬더니 '멀쩡하네' 하더라.

캬아 캬캬캬캬!

아무튼, 이것 말고 더욱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로스트' 출연배우 중에서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게 다니엘 대 킴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다니엘 대 킴의 '음주운전 선배'들은 '로스트' 시즌 2에 리비(Libby)라는 캐릭터로 출연한 씬디아 와트로스(Cynthia Watros)와 애나 루씨아로 나온 미셸 로드리게즈(Michelle Rodriguez).

그런데, 두 여배우가 '로스트' 촬영중에 음주운전에 걸렸다는 것에서 끝난 게 아니다.

둘 다 '로스트'에서 쫓겨난 것.

미국에서 2006년 5월에 방영된 '로스트' 시즌 2 막판 에피소드들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리비(씬디아 와트로스)와 애나 루씨아(미셸 로드리게즈)는 동시에 죽는다. 두 여배우는 2005년 12월 같은날 음주운전에 걸리더니 같은 에피소드에서 사이좋게(?) 총에 맞아 죽은 것. 'Drunken Sistars'의 최후는 비참했다.

하와이서 촬영하다보니 'Girls of Summer'가 되고 싶었나본데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면 곤란하지 않겠어?



아무튼, 두 여배우는 이렇게 '로스트'를 떠났다.

음주운전 때문에 두 여배우가 쫓겨난 것인지는 모르겠고 우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음주운전 사건에 연루된 여배우 둘이 나란히 '로스트'를 떠나게 된 것까지는 사실이다.

때문에, 다니엘 대 킴도 여차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 '사고'를 친 배우는 시리즈에서 쫓아낸다는 식이 맞다면 다니엘 대 킴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로스트' 시즌 4가 시작하면 Sun(김윤진)이 과부가 되는지를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것 같다.

2007년 11월 7일 수요일

카지노 로얄 vs 여왕폐하의 007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데뷔작 '카지노 로얄'이 개봉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말도 참 많았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007 시리즈가 판타지 액션에서 벗어나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왔다고 '007 영화 답지 않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플레밍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게 영화화 했는데 '007 영화 답지 않다'고?

플레밍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게 영화화 했는데 '제임스 본드가 많이 달라졌다'고?

그렇다. '카지노 로얄'은 이런 잡음에 시달렸다. 본드팬들이 '카지노 로얄'에서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을 발견할 때 저런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제이슨 본 시리즈를 발견했다. '카지노 로얄' 이전에 나온 007 영화가 20편이나 있으니 이들과 우선 비교하는 게 순서인 것 같지만 제이슨 본 시리즈와 연결시겼다. '카지노 로얄'과 '여왕폐하의 007' 사이에 비슷한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이것은 건너 뛰고 제이슨 본 시리즈를 비교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액션이 사실적이다, 제임스 본드가 피를 흘린다, 가젯이 안나온다, 분위기가 진지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카지노 로얄'이 이전 007 시리즈와 다르다는 것만을 강조하려는 게 목표였으니 제이슨 본 시리즈와 비교하는 게 왔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의 제대로 된 비교대상은 제이슨 본 시리즈가 아니라 '여왕폐하의 007'이다. '카지노 로얄 개봉 1주년 기념(?)'으로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에서 무엇을 봤는지 대충 훑어보기로 하자.

1. 아스톤 마틴 DBS

아스톤 마틴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자동차다. '골드핑거'에 나왔던 아스톤 마틴 DB5가 특수장치가 탑재된 첫 번째 '본드카'로 기록된 이후 아스톤 마틴 자동차는 '썬더볼', '여왕폐하의 007', '리빙데이라이트', '골든아이', '투모로 네버 다이스', 'The World is Not Enough', '다이 어나더 데이',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왕폐하의 007(1969)'에 나온 아스톤 마틴 DBS다.



아스톤 마틴 DBS는 '카지노 로얄(2006)'에도 나온다. 긴 세월차가 있는만큼 많이 달라졌지만 DBS라는 이름은 변함없다.



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글러브박스에 총이 들어있다는 것.

'여왕폐하의 007'의 아스톤 마틴 DBS 글러브박스엔 라이플이 들어있다.



'카지노 로얄'의 아스톤 마틴 DBS 글러브박스엔 권총이 들어있다.

'여왕폐하의 007'과 '카지노 로얄'에 나온 아스톤 마틴은 둘 다 DBS인데다 글러브박스에 총이 들어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아래 사진은 CORGI의 다이캐스트 모델 아스톤 마틴 DBS.



2. 사표

'여왕폐하의 007'엔 이전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이 나온다.

제임스 본드가 사표를 쓰는 것!

제임스 본드가 사표를 쓰면 어쩌겠다는 거냐고?

007 시리즈는 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본드가 사표를 쓰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지 시리즈가 이어지는 것 아니겠수?



그런데, 본드가 '카지노 로얄'에서 또 사표를 쓴다!

'여왕폐하의 007'에선 영화가 1969년작이보니 미스 머니페니에게 사직서를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2006년작 '카지노 로얄'에선 이메일로 사표를 쓴다. 좋게 얘기하면 세월차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소니 바이오 노트북 광고였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007 영화 시리즈를 통해 '수퍼 액션 히어로'처럼 변질된 건 다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왕폐하의 007'과 '카지노 로얄'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열받으면 사표쓰고 나가겠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3. M의 집

'여왕폐하의 007'에서 재미있는 장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본드가 M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007 시리즈에 M의 집이 나온 건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M이 나비 채집에 열심인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007 시리즈에 '노출'된 것도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영화에서 M의 집이 나오는 건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카지노 로얄'에서 M의 집이 또 나온 것!



제임스 본드가 열받으면 사표쓰고 007 짓거리 집어치우겠다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M도 밤낮 사무실에서 본드에게 '이거 해와라, 저거 해와라' 하던 데서 벗어나 가정살림을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주디 덴치는 파격적인 '베드씬'(?)까지 선보였다.



'여왕폐하의 007'와 '카지노 로얄'에선 제임스 본드와 M의 관계가 다른 영화에서와 다르다. 사무실에서 무뚝뚝하게 브리핑만 받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4. 본드걸 수난시대

'여왕폐하의 007'은 제임스 본드가 장가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본드와 결혼한 트레이시가 신혼여행길에 블로펠드에 의해 살해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서 메인 본드걸이 죽는 영화는 '여왕폐하의 007'이 처음이다.



그런데, 억센 팔자의 본드걸이 돌아왔다.

트레이시에 이어 저세상으로 간 메인 본드걸 넘버2는 '카지노 로얄'의 베스퍼.

베스퍼는 본드의 아내까지는 아니지만 본드가 특별한 생각을 했던 여자다.



결론은 이렇다:

스쳐지나가는 본드걸들은 장수하지만 본드가 특별한 마음을 가지면 다들 죽는다.

5.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

'여왕폐하의 007'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 드라코가 본드에게 도움을 줬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카지노 로얄'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나온다.

바로 매티스.

'여왕폐하의 007'에서 드라코로 나온 Gabriele Ferzetti와 '카지노 로얄'에서 매티스로 나온 Giancarlo Giannini 모두 이탈리안 배우라는 공통점도 있다.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에서 Giancarlo Giannini를 봤을 때 많은 캐릭터들이 오버랩 됐을 것이다. Giannini가 연기한 매티스가 왠지 모르게 상당히 낯익어 보이고, 왜 Giannini를 선택했는지도 짐작이 갔을 것이다.

왜일까?

본드를 돕는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여왕폐하의 007'의 드라코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드를 도와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는 1963년작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도 나온다.

터키에서 본드를 맞이하는 케림 베이(Pedro Armendariz)다.



'카리스마'와 '콧수염'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배우가 있다.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서 본드를 돕는 콜롬보로 나온 토폴(Topol)이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콧수염의 사나이들이 나온 007 영화 모두 이언 플레밍 원작에 충실한 영화라는 것.

007 제작팀은 원작에 충실한 007 영화의 패턴을 거진 그대로 '카지노 로얄'로 옮겨왔다. 다시 말하면, 007 제작팀이 '카지노 로얄'로 파격적인 변신을 꾀했거나 엄청난 모험을 한 게 아니란 것이다. 007 제작팀은 45년동안 007 시리즈에 써왔던 수법을 다시 사용한 게 전부일 뿐이다.

우주선이 또다른 우주선을 납치한다는 황당한 줄거리의 '두번 산다(1967)' 바로 다음에 '여왕폐하의 007(1969)'이 나왔고, 스페이스셔틀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광선총 배틀을 한 '문레이커(1979)' 다음 영화가 '유어 아이스 온리(1981)'였으며, 투명 자동차가 나왔던 '다이 어나더 데이(2002)' 바로 다음 영화가 '카지노 로얄(2006)'이었다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영화배우가 피어스 브로스난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바뀐 것도 놀랄 게 없다. 007 제작팀은 이미 80년대에 티모시 달튼을 캐스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에서 티모시 달튼으로 교체된 것이나 피어스 브로스난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교체된 것이나 똑같은 얘기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티모시 달튼이 제대도 끝맺지 못한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이어받은 게 전부다.



대부분의 본드팬들은 제작팀이 '카지노 로얄'을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어떠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려고 했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했을 것이다. '카지노 로얄'이 전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007 영화를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두번 산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문레이커', '다이 어나더 데이' 같은 007 영화 뿐만 아니라 '위기일발', '여왕폐하의 007', '유어 아이스 온리', '라이센스 투 킬'과 같은 원작쪽에 가까운 영화도 봤다면 '카지노 로얄'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카지노 로얄'은 1969년 '여왕폐하의 007'처럼 플레밍 원작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만든 게 전부다. 내용은 '카지노 로얄'이지만 영화는 '여왕폐하의 007'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든 것이다.

'여왕폐하의 007'를 떠올리도록 유도한 이유는 간단하다:

투명 자동차를 타던 제임스 본드는 가고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카지노 로얄'은 이전 007 시리즈와 크게 다른, 유별나게 생뚱맞은 영화가 맞는 걸까?

2007년 11월 2일 금요일

오리지날 '아메리칸 갱스터'

길거리서 거래되는 헤로인도 브랜드가 있다.

때문에, 다른 회사(?)의 헤로인 브랜드 이름을 무단도용하면 '저작권 침해'라며 기분 나쁘다는 소리 듣는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웰컴 투 할렘!

6~70년대 할렘을 쥐고 흔들었던 프랭크 루카스(Frank Lucas-사진)라는 마약딜러가 있었다. 노스 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 출신인 루카스는 6세 때 사촌형이 '백인 여자를 쳐다봤다'는 이유로 KKK에게 살해당하는 걸 지켜본 뒤 범죄자의 길로 빠진 사나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베트남에서 생산된 헤로인을 전사한 미군 병사의 관에 숨겨 미국으로 들여와 '블루매직'이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할렘에서 판매했다. '블루매직'은 저렴하고 품질좋은 헤로인으로 할렘에서 인기(?)를 누렸고, 그 덕분에 프랭크 루카스는 하루에 1백만불씩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하루에 1백만불을 벌었단다!

비록 마약거래로 벌어들인 돈이지만 하루에 1백만불씩 벌어들일 정도였다면 '성공한 비지니스맨 갱스터'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는 하루에 1백만불씩 벌었다는 뉴욕 마약딜러 프랭크 루카스에 대한 영화다.영화 제목이 '아메리칸 갱스터'인 이유는 이탈리안 마피아도 아니고 멕시칸 갱스터도 아닌 '아프리칸 아메리칸' 갱스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갱스터까지 'Made in U.S.A'가 최고란 얘기는 아니겠지만 프랭크 루카스의 조직이 이탈리안 마피아와 멕시칸 조직에게 마약을 공급할 정도였다니 대단했던 모양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모든 것을 갖춘 영화다.

프랭크 루카스역으로 댄젤 워싱턴, 루카스를 추적하는 뉴저지 형사 리치 로버츠역으로 러셀 크로우가 나온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2명이 나란히 나온다면 출연배우들이 빵빵하다는 데 이의 없겠지?

출연배우 뿐만이 아니다. '이스턴 프로미스', '위 오운 더 나잇' 등 어설픈 갱스터 영화들과 달리 '아메리칸 갱스터'는 섹스와 폭력, 그리고 유머 세 가지 모두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유치할 정도로 우질나게 폼만 잡다가 끝나는 엉성한 갱스터 영화가 아닌 것. '아메리칸 갱스터'는 웃길 때는 확실하게 웃기고, 섹시할 때는 화끈하게 벗고, 갱스터들의 터프한 라이프스타일도 제대로 보여준다.

갱스터 영화라고 하면 이탈리안 마피아, 러시안 마피아 등 미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갱스터들이 먼저 떠오른다. 외국 조직들이 갱스터 영화를 접수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미국인 갱스터'가 나온다. 배경만 미국일 뿐 갱스터는 외국인인 게 아니라 배경도 미국이고 갱스터도 미국인인 것.



줄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랭크 루카스가 실존인물인만큼 영화 줄거리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마약장사로 재미를 보려는 부패한 미군들과 프랭크 루카스가 연결되어 베트남에서 생산된 헤로인을 전사한 미군의 관에 숨겨 운송한 것도 사실이고, 마약딜러에게서 압수한 마약을 부패한 뉴욕 경찰들이 마약딜러에게 되팔기도 하고 갱스터에게 '세금'을 요구한 것도 사실이란 얘기다.

그렇다. '아메리칸 갱스터'에선 부패한 경찰들도 갱스터 중 하나로 나온다. 겉으로만 경찰일 뿐 돈 되는 것이라면 물불 안가리는 갱스터와 다름없는 인간들로 나온다. 범죄자를 구속하는 게 아니라 경찰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범죄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먹을 정도로 부패한 친구들이다. 프랭크 루카스가 경찰들의 부정이 마약딜러들보다 더 심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 경찰들이 얼마나 부패했었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하지만, 모든 경찰이 다 부패한 건 아니다.

뉴저지주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우)는 부패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형사다. 여자는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일처리는 항상 원칙대로다.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게 경찰의 일'이라면서 돈에도 관심없고 매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친구다.

부정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부패한 경찰과 대조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흔해빠진 'Good Cop-Bad Cop'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제목이 '아메리칸 캅'이 아니라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 영화는 갱스터 영화지 경찰 수사영화가 아니라는 것. 얼핏 보기엔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라는 두 캐릭터에 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랭크 루카스, 다시 말하면 댄젤 워싱턴의 영화일 뿐이다. 리치 로버츠가 프랭크 루카스를 추적하는 것보다 프랭크 루카스의 마약밀매가 훨씬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러셀 크로우의 출연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금새 댄젤 워싱턴쪽으로 기울어지고 경찰의 수사과정 이야기 쪽엔 집중할만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Good Cop-Bad Cop' 이야기처럼 보이는 문제 정도는 별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한가지 아쉬운 부분을 꼽으라고 하면 '갱스터 영화'와 '경찰 수사영화' 2개를 한데 합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의 범죄 이야기가 전부인 게 아니라 프랭크 루카스를 추적하는 경찰 수사 이야기까지 섞으려고 한 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물론, 이 덕분에 인기절정의 흑인(댄젤 워싱턴)과 백인배우(러셀 크로우)를 함께 출연시킬 수 있었겠지만 리치 로버츠와 뉴저지 형사들의 수사 이야기는 세련돼 보이지 않는다. 70년대 배경의 영화가 아니라 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이는 것.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리치 로버츠는 프랭크 루카스에게 영화의 주도권을 내주고 '넘버2 캐릭터'가 됐는데 수사과정도 수많은 형사영화에서 보아왔던 그렇고 그런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 리치 로버츠는 '넘버2 캐릭터'다. 사실, 영화에 나오지 않아도 별 상관없을만한 캐릭터다. 경찰이 전부 부패한 건 아니니까 제대로 된 경찰이 수사를 한다는 건 뻔한 얘기기 때문이다. 리치 로버츠의 수사과정 이야기를 자세하게 보여줄 필요없이 프랭크 루카스의 마약밀매 이야기를 하면서 '경찰이 감을 잡았다'고 설명만 하고 넘어갔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구태여 리치 로버츠라는 형사 캐릭터를 내세워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은 수사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쿠바 구딩 주니어도 나온다. 쿠바 구딩 주니어는 프랭크 루카스의 라이벌 마약딜러, 니키 반스(Nicky Barnes)로 나온다. 또다른 거물급 뉴욕 갱스터가 나왔지만 그의 출연시간은 터무니없이 짧다. 갱스터 영화라면 갱스터들끼리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인 것 같은데 프랭크 루카스와 같은 시대에 같은 장소에서 마약사업을 했던 거물급 갱스터, 니키 반스를 푸대접(?) 했다. 리치 로버츠의 경찰수사 이야기를 줄이고 니키 반스의 비중을 높였다면 더 흥미진진했을 것 같지만 갱스터와 형사 이야기를 절반씩 섞어야만 했으니 불가능할 수밖에...

물론, 러셀 크로우와 댄젤 워싱턴이 함께 출연한 데서 얻은 시너지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약밀매와 경찰 수사과정을 오락가락하지 않고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어떻게 보면 흑인버전 '대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안 마피아 뒤를 이어 아이리쉬 갱, 러시안 마피아, 멕시칸 갱 등 다국적 갱영화가 나오더니 이번엔 흑인버전 '대부'가 나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주인공만 흑인일 뿐 영화 자체는 '대부'와 같은 갱스터 영화를 베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다 맞는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는 실화다. 프랭크 루카스도 아직 살아있다. 70대 노인이지만 아직 살아있다.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도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등장 캐릭터 대부분도 실존인물이다.주인공도 이탈리아, 러시아 태생 외국인도 아니고 이민 2세도 아닌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리지날 아메리칸 갱스터' 영화가 맞지 않을까?



'아메리칸 갱스터'는 요근래 나온 갱스터 영화 중 최고다.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도 저리가라다. 금년에 개봉한 '이스턴 프로미스', '위 오운 더 나잇'과 같은 영화들은 아예 상대도 되지 않는다. 이탈리안 마피아, 러시안 마피아가 나오는 영화에 식상한 갱스터 영화팬들은 실존했던 흑인 갱스터,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힙합 뮤지션 Jay-Z도 실망하지 않은 것 같다.

Jay-Z는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아메리칸 갱스터' 오리지날 사운드트랙은 아니지만 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앨범이다. Jay-Z의 새 앨범에는 프랭크 루카스의 헤로인 브랜드 이름과 같은 '블루매직'이라는 곡도 수록됐다.

사실, 프랭크 루카스는 랩을 노래로 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힙합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다르지만 지금 5~60대 이상인 흑인들은 힙합을 '젊은이들용 노래'라고 하던데 프랭크 루카스도 예외는 아닌 듯.

프랭크 루카스가 알고있는 유일한 래퍼는 'Puff Daddy'로 유명한 Sean Combs라고 한다. Puff Daddy의 힙합곡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인 건 절대 아니다. 프랭크 루카스가 Puff Daddy의 아버지를 잘 알고있는 덕분일 뿐....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 영화와는 Jay-Z가 더 가깝다. Public Enemy의 'Can't Truss It'이 영화에 나온 유일한 힙합곡일 뿐 Jay-Z의 곡은 나오지 않지만 'Heart of the City (Ain't No Love)'가 트레일러에 사용됐고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새로운 앨범까지 냈다.

말 나온 김에 Jay-Z의 신곡 '블루매직'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끝내자...

2007년 11월 1일 목요일

마약중독자와 미망인이 만났을 때

베니치오 델 토로와 할리 베리의 공통점 중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있다.

아카데미상 수상자라는 것?

아니다.

둘 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출연했다는 것이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se To Kill)'에서 킬러, 다리오역으로 나왔다.



할리 베리는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서 본드걸, 징크스로 나왔다.



하나는 악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본드걸이었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인연있는 두 배우가 나란히 나오는 영화를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랴!

하지만, 'Things We Lost in the Fire'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영화다. 이 영화의 테마는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가 아니라 'Healing'이다. 간단히 말하면 미망인과 마약중독자의 고통극복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를 살짝 훑어보기로 하자.

브라이언(데이빗 듀코브니)과 오드리(할리 베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부부다. 마약중독자가 되어 폐인생활을 하는 제리(베니치오 델 토로)는 브라이언의 오랜 친구다.

마약중독자인 제리는 생활이 어지럽지만 안정된 생활을 하는 브라이언은 제리의 생일까지 챙겨준다. 오드리는 브라이언이 제리를 돌봐주는 걸 탐탁치 않아 하지만 브라이언은 제리를 '베스트 프렌드'라며 감싼다.



그러던 어느날, 브라이언이 길거리에서 남의 싸움을 말리다가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졸지에 미망인이 된 오드리는 브라이언의 장례식에 제리를 부르기로 한다. 브라이언이 제리를 감싸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죽은 남편과 절친했던 제리를 빼놓을 수 없었던 것.



문제는 오드리가 제리에게 자신의 집으로 이사 들어오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거주지가 불분명한 제리에게는 안정된 집이 생겼고 오드리와 두 자녀들에겐 브라이언의 빈공간을 메꿔줄 사람이 생긴 것.

나쁜 거래는 아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뛰어 본 게 중학교때인 제리와 함께 조깅을 하려는 이웃남자 덕분에 'Drug Overdose'가 아니라 'Running Overdose'로 사망할 뻔 하기도...ㅠ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졸지에 남편,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

오드리에겐 남편역할을 해줘야 하고 자녀들 앞에선 아버지 역할을 해야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얼떨결에 갑자기 벌어졌으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마약을 끊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 어느 게 제일 힘들 것 같냐고?

아무래도 남편역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옆에 앉아서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오드리가 잠들 때까지 남편이 생전에 해줬던 것처럼 해달라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이들은 제리를 거진 '새아빠'로 받아들이더니 나중엔 대놓고 재혼하라는 얘기까지 한다.

제리와 오드리 역시 살짝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죽은 브라이언을 둘 다 잘 알고있는데 둘이서 가까워지는 게 쉬울 리 없다.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지낸다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지만 말 그대로 함께 지내는 게 전부일 뿐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는 건 힘들지 않겠냐는 것.



다 좋다.

하지만, 아무리 외롭더라도 남편의 친구와 함께 산다는 게 현실적이냐는 문제를 넘어야 한다.

브라이언이 죽기 전까지 많은 도움을 줬던 베스트 프렌드가 제리니까 오드리가 남편 뒤를 이어 제리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음과 동시에 그녀 역시 죽은 브라이언의 빈자리를 메꿔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크게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흔치 않은 경우인 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해서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설정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제리와 오드리 모두 죽은 브라이언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일도 없을테니 이런 상황에 제리가 오드리의 집에서 생활한다는 게 현실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문제는 순수한 동거관계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냐는 것. 처음 얼마간은 브라이언을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선을 넘지 않겠지만 이런 식의 동거가 상당기간 이어지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고, 결국 이것이 새로운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다고, 오드리는 죽을 때까지 브라이언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브라이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새출발 하는 것까지는 오케이다. 그런데, 새출발 파트너가 브라이언의 베스트 프렌드라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쪽으로 흘러간다. 미망인이 남편의 베스트 프렌드와 함께 생활한다는 흔치 않아보이는 내용을 소재로 했지만 이것 하나 빼고는 새로울 게 없다. 줄거리 전개도 예상했던 그대로 진행될 뿐 예상치 못했던 반전 같은 것도 없다. 멜로영화라면 뭉클하거나 찡한 데가 있어야겠지만 이것도 아니다.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그런 효과를 내려고 할지 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Things We Lost in the Fire'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영화가 R등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 R등급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마약을 사용하는 장면, 담배를 피우는 장면, 그리고 거친 욕설 등이 나온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왜 그런 장면이 나와야만 했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Things We Lost in the Fire'는 몇가지만 제외한다면 PG나 PG-13에 어울리는 패밀리용 멜로영화인만큼 누드, 섹스씬이나 폭력씬 같은 건 일체 나오지 않는 '깨끗한 영화'다. 욕설 몇마디만 지우면 곧바로 TV에서 방영해도 될 정도다. 'Things We Lost in the Fire'는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오드리와 그녀의 자녀들이 마약중독자인 제리와 함께 서로 도와가면서 새출발을 하기위해 노력한다는 패밀리용 멜로영화일 뿐이지 특별하게 성인들을 타겟으로 한 영화가 아니다.

이처럼 영화 자체가 성인용보다 패밀리용에 가깝게 보이는데 왜 R등급을 받도록 내버려 뒀을까?

아니면, 실제로는 패밀리용 영화인 것을 성인테마의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작(?)을 부린 것인가?

영화만을 놓고 따지면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도 영화 내내 지루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베니치오 델 토로의 좋은 연기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마약중독자로 정신없는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는 제리를 멋지게 연기했다. 할리 베리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이 영화는 베니치오 델 토로의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제리가 오드리보다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Things We Lost in the Fire'는 배우들의 연기를 빼고나면 남는 게 많지않은 영화다. 제리는 가장을 잃은 오드리 식구를 도와주고 오드리는 제리가 마약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서로의 관계가 아리송해진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딘가 허전한 데가 있는 영화다. 'Things We Lost in the Fire'도 결론이 뻔히 보이는 그렇고 그런 수준일 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친구의 여자와 얽힐 뻔 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도...

2007년 10월 31일 수요일

LSU 쿼터백은 제이슨 본?

Matt 'not Damon' Flynn.

LSU(Louisiana State University) 쿼터백, 맷 플린(Flynn)이 소개될 때 맷 데이먼 얘기가 안 나오는 적이 없다. 맷 데이먼과 닮은 풋볼선수로 유명해진 덕분이다.

LSU 풋볼경기 중계방송을 보면서 맷 플린의 얼굴을 봤을 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 대학 풋볼팀 소속인데도 LSU 풋볼경기마다 '맷 데이먼과 닮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으니 만약 이 친구가 내년에 NFL로 옮겨오면 '제이슨 본이 쿼터백으로 변신했다'는 얘기가 나올지도...

맷 플린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가 맷 데이먼과 닮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가 속한 LSU 풋볼팀이 상당한 팀인 덕분이 크다. 비록, 켄터키 대학(University of Kentucky)에게 지는 바람에 오하이오 주립대(OSU)나 보스턴 칼리지(BC)처럼 무패행진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칼리지 풋볼 최강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켄터키에게 아깝게 패한 루이지애나 주립대(LSU)가 시즌 첫 패배의 충격을 극복하는데 걸린 시간은 딱 1주일이었다.

켄터키 다음 상대는 만만치 않은 어번(Auburn).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게 마치 켄터키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스포츠 매치가 그렇듯 풋볼경기도 마지막까지 봐야하는 법.

마지막 4쿼터. 스코어는 어번 24, 루이지애나 주립대 23.

1점차로 뒤지고 있으니 3점짜리 필드골만 차도 루이지내아 주립대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LSU가 역전 필드골을 찰 수 있을만한 지점까지 전진했다. 문제는 언제 타임아웃을 하고 필드골팀을 내보낼 것이냐지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계방송 진행자들은 LSU가 필드골을 찰 것으로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LSU가 필드골을 찰 것으로 생각했을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타임아웃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 게임종료까지 몇 초 남지 않았는데 타임아웃을 하지 않은 것.

그러더니 느닷없이 쿼터백 맷 플린이 엔드존으로 긴 패스를 던졌다. 필드골이 아니라 터치다운으로 이기겠다는 것!

터치다운이 선언됐을 때 남은 시간은 1초!



만약 이 패스가 실패했다면 LSU는 필드골을 차 볼 기회도 없이 졌을 수도 있다.

ESPN 아나운서 마이크 패트릭(Mike Patrick)의 말처럼 마지막 패스 시도는 'Call of the Yea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전하게 타임아웃을 해서 시계를 멈춘 뒤 역전 필드골을 찼다면 안전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 시계를 멈추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패스를 할 생각을 했다는 '배짱'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필드골을 차서 이기든 터치다운을 해서 아슬아슬하게 이기든 승리한 건 똑같다. 하지만,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는 후자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교과서에 나온대로 안전하게 이기는 방법을 택했다면 바로 이전 주 켄터키에서 패한 아쉬움까지 깔끔하게 날려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패스를 던져 터치다운으로 화끈하게 마무리를 장식하면서 켄터키전의 패배를 확실하게 극복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음 상대가 알라바마(University of Alabama)인 것.

알라바마에는 2004년 시즌까지 LSU 헤드코치였던 닉 세이반(Saban)이 버티고 있다. 닉 세이반은 2004년 시즌을 끝으로 LSU를 떠나 NFL 팀, 마이애미 돌핀스 헤드코치로 옮겼다가 2007년 알라바마 대학팀 헤드코치직을 맡으면서 2시즌만에 다시 칼리지 풋볼리그로 돌아왔다.

요점만 간단하게 말하면, 닉 세이반이 LSU를 떠났다가 칼리지 풋볼리그로 다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그의 옛 팀 LSU를 상대한다는 것.

과연 LSU가 전 헤드코치 닉 세이반의 알라바마 대학팀을 상대로 알라바마 홈에서 어떤 경기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 칼리지 풋볼 최고 빅매치는 이 경기가 아닐까...

2007년 10월 29일 월요일

조지아 대학, 기싸움도 경기도 이겼다

패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려는 헤드코치가 있을까?

흔히 보기 힘들다.

하지만, 조지아 대학(University of Georgia) 풋볼팀 헤드코치 Mark Richt(사진)가 10월27일 토요일 조지아 대학과 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Florida)와의 경기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조지아 대학이 경기 첫 번째 터치다운을 하자 벤치에 있던 선수 전원이 엔드존으로 몰려가 함께 쎌레브레이션을 한 것.

단체로 쎌레브레이션을 하는 것 자체가 파울인데 벤치에 있던 선수들 전원이 몰려나갔으니 의도적인 게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수들이 헤드코치의 허락 없이 벤치에서 우르르 몰려나간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만한 결정적인 터치다운 이후라면 혹시 모르지만 첫 번째 터치다운을 한 게 전부인데 벤치에서 쏟아져나왔다면 정상일 수 없다. '첫 번째 터치다운 하고나면 전부 나가서 함께 쎌레브레이션을 하라'고 헤드코치가 시키지 않은 이상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SEC(South Eastern Conference) 라이벌 플로리다 대학팀 홈경기에서 말이다.

이 바람에 조지아 대학팀은 단체 쎌레브레이션 파울(15야드 패널티)과 백넘버 75번 선수의 파울(15야드 패널티)까지 합해 모두 30야드 패널티를 당했다. 단체 쎌레브레이션은 헤드코치가 계획한 것이므로 첫 번째 15야드 패널티는 각오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75번 선수의 두 번째 패널티는 계획에 없던 것.

30야드 패널티 덕분에 조지아 대학이 30야드 후진해서 킥오프를 하게 됐으므로 플로리다 대학은 좋은 필드 포지션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다 선수들까지 흥분하는 바람에 퍼스널 파울로 15야드 후진하면서 좋은 기회를 날렸다.

하지만, 곧바로 터치다운을 하며 7대7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

그러나, 플로리다 터치다운 후 공격권이 조지아로 넘어가자마자 또 조지아 터치다운. 스코어는 14대7.

그리곤, 또 15야드 패널티.

패널티 행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킥리턴하는 플로리다 선수를 태클하면서 조지아가 2개의 퍼스널 파울을 추가한 것. 또다시 30야드 패널티를 당한 것이다.

1쿼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이처럼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래 동영상은 여기까지의 하이라이트:



조지아, 플로리다 대학 모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학교들이다. 그러니, 한마디로 '이기는 편 우리 편'인 경기였다. 그런데, 조지아 대학 헤드코치가 첫 번째 터치다운 후 벤치에 있던 선수 전원을 필드로 내보내며 함께 쎌레브레이션을 하도록 하는 걸 본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조지아를 응원하게 됐다. 패널티를 감수하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준 게 상당히 쿨해 보였던 것.

비록, 헤드코치 Mark Richt가 '단체 쎌레브레이션 사건'에 대해 사과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아주 멋있었다. 적지에서 라이벌팀과 경기를 하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가라고 지시했다는 게 참 쿨해 보인다. 엄밀하게 따지면 헤드코치가 해선 안될 행동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래도 멋지다.

바로 이 덕분일까? 조지아가 플로리다를 42대30으로 꺾고 승리했다. 경기초반 기싸움으로 한방 먹이면서 시작하더니 결국 경기에서도 승리한 것.

중계방송 해설자가 '이래서 칼리지 풋볼이 재미있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여전히 보기 드문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칼리지 풋볼이니까 가능했지 프로 풋볼(NFL)에선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조지아 vs 플로리다니까 어느 정도 화끈할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시작부터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2007년 10월 26일 금요일

웰컴 투 룸 '1408'

이세상에 귀신 같은 건 없다고?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공포소설 작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마이크 엔슬린(존 큐색)은 공포소설 작가이면서도 귀신 같은 건 없다고 믿고 있다. 자신이 쓴 소설에 유령이 나오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일 뿐이며,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에도 직접 가봤지만 전부 가짜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뉴욕에 있는 돌핀호텔의 1408호실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

1408이면 14층 8호실? 하지만, '13'이란 숫자를 건너뛰기 위해 실제론 13층이지만 14층으로 둔갑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1408호는 얼핏 보기엔 14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3층인 것. 게다가 방번호 1408을 모두 합하면 13(1+4+0+8=13)이 된다.

호기심이 발동한 엔슬린은 뉴욕의 돌핀호텔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1408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것. 귀신 같은 건 없으며, 저주받은 집이란 게 전부 판타지일 뿐이니 돌핀호텔의 1408호실 이야기도 거짓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



아무래도 '이상한 호텔'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 노래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돌핀호텔이 캘리포니아가 아닌 뉴욕에 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You can check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Oh $hit!



돌핀호텔에는 '익스프레스 첵아웃(Express Checkout)'이란 것도 있다.

물론, 돌핀호텔에서도 'You can 'EXPRESS' checkout any time you like'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첵아웃' 하기 싫으면 돌핀호텔의 1408호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돌핀호텔 전체가 이상한 것도 아니다. 1408호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누가 억지로 1408호에 밀어넣는 것도 아니다.

정 반대로, 돌핀호텔 매니져 제랄드 올린(사무엘 L. 잭슨)이 필사적으로 만류한다. 1408호에 들어가면 난리(?)가 나니까 들어가지 말라는 것. 하지만, 저주받은 곳들을 여러 군데 답사하면서 유령같은 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엔슬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돌핀호텔의 1408호 이야기도 판타지인 걸로 생각한 엔슬린은 호텔 매니져의 만류를 뿌리치고 1408호에 들어가게 된다.

짜짠!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다른 방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모든 게 깔끔하게 정돈돼 있고 룸서비스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1408호를 꺼리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막상 방 안에 들어가보니 다른 방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호텔방인 것으로 보였다.

그 빌어먹을 알람시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1408호가 본색을 드러내는 건 카운트다운이 시작하면서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하기 바로 전에도 약간 이상한 징조가 있었고, 이 때만 해도 엔슬린이 원했다면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엔슬린은 이 '경고'를 무시하면서 1408호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카운트다운이 시작한 다음부터는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죽든 살든 따지지 않고 빠져나가겠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겠다면 또다른 얘기다.



스테판 킹 원작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들을 보면 섬짓한 공포보다는 요상하게 꼬이는 스토리에 빠져드는 재미가 더 크다.

'1408'도 마찬가지다.

저주받은 호텔방 1408호에서 엔슬린이 겪는 '사건들'은 섬짓하기보다 코메디에 가깝게 보이기까지 한다. 벽에서 피가 흐르고 느닷없이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등등의 이벤트들이 섬짓하기보다 코믹하게 느껴진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건이 발생할 것을 알고있기 때문인지 공포영화처럼 보이지 않고 엔슬린이라는 친구가 계속해서 엉뚱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코믹한 영화처럼 보이는 것.



알람시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섬짓한 느낌이 들지만 거기까지가 전부다. 그 이후부터는 무섭다기보다는 엔슬린이 1408호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궁금할 뿐이다. '만약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봐도 '이 호텔방에서 아무개가 죽은 다음부터 어쩌구...' 하는 전설(?)이 있는 방에 들어가면 섬짓한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 이상으론 느껴지는 게 없다.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꼼짝없이 14층에 갖힌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는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공포영화 치고는 약간 맹탕이란 생각이 든다. '저주받은 호텔방에 갖혔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결국은 '유령의 집' 수준이 전부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만약 내가 저 호텔방에 있다면?'이란 생각을 하면 오싹한 기분이 들지만 이벤트가 이어지면서 그런 기분이 금새 사라져버린다. 이렇다보니 엔슬린이 직면한 공포는 전달되지 않고 그가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전부다. 느껴지는 공포는 사라지고 눈으로 즐기는 재미만 남는 것.

진짜로 오싹한 기분이 드는 공포영화에 제대로 빠져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지지만 '1408'에선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 덕분에 엔슬린이 얼마나 고생을 할지 궁금해진다. 긴장시킬만큼의 공포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신들린 호텔방에 갖혀 황당한 사건들을 겪는다'는 유머러스한 판타지 어드벤쳐처럼 느껴질 뿐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공포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공포영화치고는 약간 맹탕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볼만한 영화다. 일단, 전기톱, 도끼질과 같은 '그래픽 테러'가 없는 고급스러운(?) 공포영화라고 할 수 있다. 도끼질 하고, 피 튀기고, '꺄악!' 하고 앉아있는 싸구려 티 나는 공포영화는 아니라는 것. 공포의 강도가 약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도중에 지루해지는 영화는 아니다. 분위기는 좋지 않은데 별로 무섭지는 않고, 전기톱과 도끼가 날아다니는 무식한 장면도 없는데 지루한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패밀리용(?) 미스테리/공포영화를 찾는다면 '1408'이 왔다다.



그래도 쟝르로는 '호러'인데 섬짓한 부분이 한군데도 없을 리 있냐고?

물론 있다. 일부러 찾는데도 섬짓한 장면이 없으면 그게 공포영화겠수?

그 장면이 뭐냐고?

장면이 아니라 노래다.

알람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카펜터의 클래식 'We've Only Just Begun'이 이렇게 섬짓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