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스카이폴' - 제임스 본드 재창조를 모방으로 할 수 있나?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제임스 본드를 맡은 2006년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부터 "007 시리즈가 달라졌다"고 한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제임스 본드를 새로운 얼굴로 교체하면서 신선감을 살리기 위해 여러 변화를 주는 것은 007 제작진이 과거부터 사용해오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크레이그가 벌써 여섯 번째 제임스 본드이므로 007 제작진은 영화배우가 교체될 때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름 노우하우가 축적된 상태다.

그렇다면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엔 어떠한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을까?

007 제작진은 라이센스 문제로 오피셜 007 시리즈로 영화화 하지 못하고 남겨뒀던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1953)'을 드디어 영화로 옮김과 동시에 과거의 007 시리즈를 새로 리부팅하는 듯한 느낌을 주려 했다.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얼굴로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를 영화로 옮기게 된 만큼 전통적인 007 시리즈와 살짝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007 영화 시리즈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제대로 옮기지 않아왔던 관계로 플레밍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은 '소설 본드팬'들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원작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꼭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소설 시리즈와 영화 시리즈 팬을 모두 거느린 프랜챠이스에선 소설 팬과 영화 팬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작의 스타일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007 영화 시리즈에 불만이 있었던 '소설 본드팬'들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비교적 충실하게 영화로 옮긴 '카지노 로얄'에 후한 점수를 줬다. 007 시리즈가 분위기 전환을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느끼던 '영화 본드팬'들도 '카지노 로얄'에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스탭, 캐스트를 포함한 '카지노 로얄' 팀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이언 플레밍이 어쩌구, 원작소설이 저쩌구" 하는 데 바빴다. "원작의 본드 캐릭터는 영화의 본드와 다르다", "원작의 본드 캐릭터는 어둡고 진지하고 거칠다", "과거의 007 시리즈에선 원작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등은 이 때 벌써 다 나왔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카지노 로얄'은 덮어놓고 무작정 007 시리즈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라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충실한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다는 전제로 한 변화였다.

007 제작진이 후속편을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연결되도록 한 이유도 '원작 스타일'을 계속 이어나가려던 의도였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로 제작할 플레밍의 원작소설이 이젠 더이상 남아있지 않으므로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의 세계를 계속 울궈먹으려 했던 것이다. '카지노 로얄' 후속편의 제목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를 플레밍의 원작소설에서 - 정확하겐 숏 스토리 - 따온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콴텀 오브 솔래스'는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카지노 로얄'의 줄거리를 억지로 연장시키며 붙들고 늘어졌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여기에 스크린라이터 파업까지 겹치면서 더욱 아리송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원작의 세계를 억지로 이어가면서 '원작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유머와 낭만을 걷어내고 어둡고 건조하게 바꾼 것이 전부였을 뿐 원작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콴텀 오브 솔래스'가 개봉한 2008년은 이언 플레밍이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나 '카지노 로얄'에 억지로 이어붙인 어색한 줄거리만 있었을 뿐 플레밍의 원작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의 톤만 '카지노 로얄'과 같았을 뿐 나머지는 90년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an) 제임스 본드 영화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했다. 원작이 빠지자 어둡고 진지한 영화의 분위기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같았던 것이다. 007 제작진은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액션 감독 댄 브래들리(Dan Bradley)를 데려와 '최신 유행' 스타일의 액션 씬을 선보였지만 모방했다는 것 이외론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카지노 로얄'의 세계를 계속 확장시키며 '원작 스타일'을 유지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007 제작진은 그 다음 영화에선 완전히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이번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를 모방하기로 한 것이다.

이 영화가 바로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이다.

'스카이폴'은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도 거리가 멀었고 전통적인 007 영화 시리즈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봐도 제임스 본드 영화로 보기 힘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어둡고 거칠어진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영화의 톤은 변함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것만으론 '제임스 본드 영화'로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거칠고 어두운 스타일의 액션 스릴러는 흔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은 이후 뚜렷하게 눈에 띄는 그 만의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완성되었나?

물론 "진지하다", "거칠다", "인간적이다"는 등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클리셰'다.

까놓고 말하자면, 과거에도 충분히 표현 가능했거나 이미 시도했던 것들이 전부다. 새로운 것이 아니며, 크레이그의 본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숀 코네리(Sean Connery),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 로저 무어(Roger Moore),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모두 어둡고, 거칠고, 진지하고, 인간적인 내면 등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므로 크레이그가 처음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크레이그만의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

없다.

지난 2000년대 중반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 '카지노 로얄'을 손에 쥐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시대가 기우뚱거리면서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크레이그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말로는 "리부트다", "달라졌다"고 하지만 과거엔 불가능했던 것을 새롭게 시도한 것은 없었다. 과거에 다 할 수 있었던, 또는 이미 했던 것을 다시 재포장한 것이 전부다. 크레이그의 영화도 얼핏 보기엔 달라보일지 몰라도, 찬찬히 훑어보면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스카이폴'을 예로 들어 보자. '스카이폴'은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이라서 클래식 007 시리즈 하미지(Homage)로 도배한 영화였으므로 대단히 친숙한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될 뻔 했다. 하미지 도배 수준만 놓고 비교하면 지난 007 시리즈 40주년 기념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 밀리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차이가 나는 건, '다이 어나더 데이'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전통 스타일을 고수한 반면 '스카이폴'은 반복되는 '클리셰'만 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나치게 코믹북 수퍼히어로 쪽으로 영화를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다이 어나더 데이'는 매우 한심스러운 007 영화가 되었고, '스카이폴'은 나름 볼 만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패로디 영화가 됐다. '다이 어나더 데이'는 한심스럽긴 해도 여전히 007 영화로 보였지만 '스카이폴'은 아무리 볼 만했다고 해도 007 영화로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접어들면서 007 시리즈가 변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이런 주장도 '클리셰'다.

007 제작진이 변화를 원한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문제는 007 시리즈가 어떻게 바뀌었냐는 것이다. 변화를 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 변화를 줬냐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넘어오면서 007 시리즈가 리부팅했다고도 하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리부팅했냐는 것이다. 리부팅을 하면서 과거의 클래식 007 시리즈와 거리를 두려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면을 보여줘야 한다. 클래식 007 시리즈 클리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환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임스 본드 영화답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007 제작진은 여기에서 실수를 하고 있다.

아무리 변화를 주며 리부팅을 한다고 해도 결과는 여전히 제임스 본드 영화로 나와야지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닌 'SOMETHING ELSE'가 튀어나오면 문제가 생긴다. 지금 현재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과거의 007 클리셰를 걷어내고 새롭게 출발한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아예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다. '콴텀 오브 솔래스'에선 제이슨 본 시리즈를 어설프게 흉내내더니 '스카이폴'에선 배트맨 시리즈를 비롯한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007 시리즈가 새출발했다고 하지만 어설프게 다른 영화를 모방한 것만 눈에 띌 뿐 "이것이 달라진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다"라는 뚜렷한 특징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카지노 로얄'은 '원작 스타일'이 받쳐준 관계로 이해가 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와 '스카이폴'은 정체불명이다. 사소한 차이점들로 장난을 치거나 007 시리즈가 아닌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뒤엎은 것을 제외하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이렇다"고 확실하게 재창조한 게 없다.

이젠 원작소설도 없고, 그렇다고 과거처럼 '골드핑거(Goldfinger)'를 모델로 한 비슷비슷한 영화를 매번 반복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만큼 색다른 변화를 주고자 하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과거의 흔적을 전부 다 걷어내더라도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제임스 본드로 보여야지, 한 때는 제이슨 본, 한 때는 배트맨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되면 미래가 없다. 물론 박스오피스에서 대성공을 거뒀다고 항변할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 재창조에 실패했다는 사실까지 덮히는 건 아니다. 007 제작진은 '콴텀 오브 솔래스'와 '스카이폴'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유별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만 몰두했을 뿐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확실하게 재창조하지 못했으며, 다른 헐리우드 영화를 모방하는 데만 급급했다. 지금 당장은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불안하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작도 떨어졌고 반복도 더이상 못하겠는데 정체성마저 불확실해지면 무엇으로 어떻게 시리즈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지 모르겠어서다.

댓글 2개 :

  1. 결국 스크립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리처드 메이바움같은 스크린 라이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글쎄 올시다 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살인면허는 알고보면 단편을 짜집기한 영화인데도 그 스토리가 놀랄만큼 탄탄하고, 오히려 다니엘 크레이그 시절보다 더 어둡고, 진지하고, 냉혹한 본드를 보여줬지요.
    크레이그는 이제 정말 끝인 것 같고, 참신한 본드가 등장하고, 능력있는 스크린 라이터가 등장하고, 윌슨, 브로콜리 남매의 대각성이 있어야 시리즈가 본 궤도를 찾을텐데... 뭐 이건 박스오피스에 훨훨 날고 있으니, 계속 이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결론은 이제 007은 끝이라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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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티모시 달튼이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그런 본드 역에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섹시보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인지 터프가이 연기가 좀 어색해 보입니다.
    카우보이 앤 에일리언에서의 그 어색함이란...^^
    크레이그는 본드보다 차라리 드래곤 타투 같은 쪽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크레이그를 첨엔 대단히 좋게 봤는데 이상하게 거꾸로 가면 갈수록 안 어울려 보입니다.
    영화가 터프해 보이지 않는 크레이그의 터프가이 본드만 부각시키려 하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전 아직도 크레이그 스타일의 본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강하고(코네리), 세련되고(무어), 진지한(달튼) 선배들에 비해 개성이 없는 듯 합니다.
    문제는 제작진이 뚜렷한 비전없이 변화를 주는 데만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 색다르게 만들어보겠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으로 보이지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작이란 게 단지 스토리 소스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의 방향도 잡아주는데,
    이게 없으니까 계속 007 시리즈 반복하기 아니면 남의 영화 모방하기밖에 남은 옵션이 없는 듯 합니다.
    007 시리즈는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뚜렷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전엔 글쎄 별로...^^
    하지만 전 그 사람들이 존 로갠과 샘 멘데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제작진은 자신들이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는 걸 잊는 것 같습니다.
    바꿀 건 바꾸고 갈아치울 건 갈아치우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는 자체를 잊어선 안되는데 말이죠.
    무작정 다르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은 좀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본드24는 글쎄 과히 기대가 별로 아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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