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9일 토요일

'트리거 모티스', 클리셰와 오마쥬 투성이의 신선도 제로 제임스 본드

미국 작가 레이몬드 벤슨(Raymond Benson)이 2000년대 초에 007 시리즈를 떠난 이후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을 맡은 작가가 매번 바뀌고 있다. 벤슨은 무비 타이-인(Tie-In) 소설까지 합해 모두 12편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썼으나 그 이후부턴 세바스찬 폭스(Sebastian Faulks),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 윌리엄 보이드(William Boyd) 순으로 매번 작가가 교체되고 있다.

윌리엄 보이드에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을 맡은 작가는 앤토니 호로위츠(Anthony Horowitz). 호로위츠는 틴-스파이 '알렉스 라이더(Alex Rider)'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다.

앤토니 호로위츠의 제임스 본드 소설 제목은 '트리거 모티스(Trigger Mortis)'.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 '트리거 모티스'는 북미지역에서 2015년 9월8일 하드커버와 전자책 버전 등으로 출간되었다.




'트리거 모티스'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설 전체를 호로위츠가 쓴 것이 아니라 제임스 본드를 창조한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미공개 숏스토리를 참고했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트리거 모티스'는 플레밍이 TV 시리즈 제작을 위해 준비했다 빛을 보지 못한 미공개 숏스토리 '머더 온 휠스(Murder on Wheels)'를 기반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줄거리를 이어붙여 완성한 소설이다. 호로위츠는 플레밍의 미공개 숏스토리 '머더 온 휠스'를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신 챕터 7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플레밍의 숏스토리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스토리를 이어붙이는 방식은 007 영화 시리즈 제작진이 자주 사용했다. 1983년 제임스 본드 영화 '옥토퍼시(Octopussy)'와 1987년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ths)'가 플레밍의 숏스토리를 부분적으로 참고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이어붙여 스크립트를 완성한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소설 시리즈에서 이런 시도를 한 건 이번 '트리거 모티스'가 처음이다.

'트리거 모티스'의 또 한가지 독특한 특징은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골드핑거(Goldfinger)'에 등장했던 본드걸, 푸씨 갈로어가 재등장한다는 점이다. 전작에 등장했던 본드걸이 새로운 소설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몇 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작았다. 그러나 '트리거 모티스'에선 푸씨 갈로어가 서포팅 본드걸 수준의 제법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했다.

느닷없이 푸씨 갈로어가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에 재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로위츠의 '트리거 모티스'가 '골드핑거' 속편 격의 성격을 띤 소설이기 때문이다. '트리거 모티스'는 소설 '골드핑거'의 사건이 마무리된 지 2주 뒤를 배경으로 삼았다.

'트리거 모티스'는 소련의 스머시(SMERSH)가 독일 뉘르부르크링(Nürburgring)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영국인 챔피언 레이서를 사고로 위장해 살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본드가 돈많은 플레이보이 레이서로 위장해 경주대회에 참가하면서 시작한다. 뉘른베르크링에서 소련의 스머시 장군과 함께 있는 제이슨 신(한국이름 신재성)이라는 재미 한국인 백만장자를 만난 본드는 스머시와 제이슨 신이 함께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트리거 모티스'는 본드가 제파디 레인이라는 미국 여성과 함께 제이슨 신이 꾸미는 음모를 저지한다는 줄거리다.

앤토니 호로위츠의 '트리거 모티스'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액션 어드벤쳐 소설이었다. 그러나 평균 수준에 그쳤을 뿐 특별히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전 제임스 본드 소설에 비해 전개가 빠르고 익사이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이 아니라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절 제임스 본드 영화의 스크립트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보다 영화 시리즈 쪽에 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과 마찬가지로 '트리거 모티스'도 5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지만 설정 상에서만 50년대였을 뿐 매우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호로위츠는 이언 플레밍이 쓴 50년대 제임스 본드 소설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트리거 모티스'는 그와 반대로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 제임스 본드 영화 쪽에 가까웠다.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이 아니라 9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 스크린플레이를 기초로 한 무비 타이-인 소설 같았다.

물론 호로위츠가 이언 플레밍의 미공개 숏스토리를 참고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유명한 본드걸로 꼽히는 푸씨 갈로어까지 재등장시키고 소설의 시대 배경까지 50년대로 설정하는 등 이언 플레밍이 쓴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의 톤과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플레밍이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한 것처럼 보였을 뿐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호로위츠도 다른 제임스 본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본드가 보드카 마티니를 마시고 플레밍의 소설에 등장했던 여러 유명 캐릭터 이름을 열거하는 등의 '007 클리셰'를 반복하면서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소설과의 연결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뻔하디 뻔한 제임스 본드 클리셰를 늘어놨다는 건 그렇게 하지 않고는 플레밍이 창조한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의 세계를 실감나게 구현할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플레밍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의 세계를 제대로 꿰고 있는 작가라면 온갖 클리셰를 늘어놓으면서 읽는 이가 플레밍의 오리지날 소설을 연상케 만들기 위해 억지로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로위츠의 '트리거 모티스'도 플레밍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일부러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소설이었다.

호로위츠 버전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정체가 애매했다. 호로위츠는 얼마 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나약해진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비판한 바 있는데, 호로위츠 버전 제임스 본드도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몇몇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눈에 띄긴 했지만 플레밍 스타일을 따라하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것 같았을 뿐 보다 강하고 거칠어진 본드 캐릭터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다.

또다른 문제는 신선도였다. '트리거 모티스'는 신선도가 매우 떨어지는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디선가 이미 읽거나 본 듯한 007 시리즈 오마쥬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트리거 모티스'를 읽으면서 여려 권의 제임스 본드 소설과 여러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스쳐지나갔다. 스포츠 경기에서 부정을 저지르려는 악당은 골프 경기에서 사기를 치려던 골드핑거가 떠올랐고, 미국의 로켓을 교란시키려는 음모는 플레밍의 소설 '닥터 노(Dr. No)', '문레이커(Moonraker)' 등과 겹쳐졌다. 소설 '문레이커'에도 카드 게임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악당(드랙스)이 등장했으며, 본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했다가 또다른 음모를 눈치챈다는 플롯도 '문레이커'와 겹쳤다. 나치 출신 독일인 로켓 기술자가 등장한다는 점 또한 소설 '문레이커'와의 공통점 중 하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게 온가족을 잃은 제이슨 신이 본드와 식사를 하면서 그의 어두웠던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부분은 영락없이 '닥터 노'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소설 '닥터 노'에도 닥터 노가 어쩌다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됐으며 그가 꾸미는 음모가 무엇인지 본드와 식사를 하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제이슨 신이 화투를 이용해 상대를 처형할 방법을 정하는 부분은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의 타로카드 파트를 연상시켰으며, 본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동차를 몰고 불쑥 나타나 도움을 주는 제파디 레인은 영화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의 본드걸, 아키(아키코 와카바야시)를 연상케 했다. 제파디 레인은 아키 뿐만 아니라 영화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와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도 연상시켰다. 제파디 레인이 미국 에이전트라는 점은 '다이 어나더 데이'의 징크스(할리 베리)와 겹쳤고, 본드가 몰래 잡입한 곳에서 제파디와 마주치는 부분은 '투모로 네버 다이스'의 와이 린(양자경)이 떠올랐다. 또한, 사고로 위장한 테러공격으로 미국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플롯은 영화 '옥토퍼시(Octopussy)'를 연상시켰다. 영화 '옥토퍼시'엔 서독 주둔 미군 기지에서 사고로 위장한 핵폭발을 일으켜 미국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소련의 음모가 등장했는데, '트리거 모티스'에서 제이슨 신과 스머시가 꾸미는 음모와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처럼 '트리거 모티스'는 하나 하나 따져보면 클래식 제임스 본드 소설과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오마쥬 투성이의 소설이었다. 영화와 비교하자면 클래식 007 시리즈로 가득했던 '다이 어나더 데이'와 '스카이폴(Skfyall)' 수준이었다. 클래식 오마쥬 의존도는 '트리거 모티스'가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래도 심심풀이용으로 읽기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특징없는 액션 어드벤쳐 소설이었으나 300 페이지 정도의 비교적 짧은 소설이라서 마지막까지 견디는 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제임스 본드 소설은 아니었다. 50년대로 되돌아가 플레밍의 향수 되살리기를 시도했지만 어린애 장난치는 것 같았을 뿐 별 효과가 없었다. 레이몬드 벤슨 이후 나온 4권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소설 중 3권이 5060년대로 되돌아가 플레밍 시대와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모두 결과가 시원찮았다. 그 중에서 베스트를 꼽자면 아무래도 '트리거 모티스'라고 해야 할 것 같지만, '트리거 모티스'도 간지러운 수준에 그쳤다. 세바스챤 폭스, 윌리엄 보이드의 5060년대 배경 제임스 본드 소설보다는 좀 더 007 시리즈 소설에 가까워 보였으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호로위츠에 제임스 본드 소설을 한 번쯤 더 맡겨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왜냐면, 적어도 방향은 제대로 잡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알렉스 라이더' 시리즈로 비슷한 쟝르의 소설을 써본 작가라서 조금만 나사를 조이면 제법 괜찮은 제임스 본드 소설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호로위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다음 번엔 쓸데없는 클래식 오마쥬를 전부 걷어내고 21세기를 배경으로 한 제임스 본드 소설을 맡겨보는 게 어떨까 싶다. 만약 호로위츠가 21세기 배경 제임스 본드 소설을 몇 해 전 제프리 디버가 선보였던 '아이폰 본드'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면 그 때 가서 작별 인사를 해도 늦지 않을 듯 하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