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3일 목요일

'007 스펙터': 제임스 본드 패로디 스타일 유머 제대로 통할까?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대표적인 취약점으로 꼽히는 부분은 유머다. 유머를 걷어내고 진지한 톤의 영화로 변화를 주려 한 것까진 문제될 것이 없는데, 지나치게 건조하고 딱딱해졌다는 지적을 계속 면하지 못하고 있다. 007 시리즈가 원래 진지한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진지해져도 바로 어색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선 지나치게 심각한 톤의 영화로 변하자 여기저기서 "부족한 유머"를 꼬집고 있다. 작년 여름에 '스펙터'의 스크립트를 다시 쓴 이유도 유머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전해진 바 있다.

그렇다면 유머가 얼마나 늘었을까?

'스펙터'의 스크립트를 훑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유머다운 유머가 보이지 않아서다.

클래식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코믹한 씬 등 다니엘 크레이그의 지난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씬을 집어넣은 것은 알겠는데, 지난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절에 실컷 볼 수 있었던 '클래식 007 시리즈 이미테이션' 수준의 유머에 불과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젓게 만드는 유머도 눈에 띄었다.

007 시리즈를 패로디한 코미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씬 중 하나는 여러 특수장치들로 가득한 장비를 사용할 줄 몰라 쩔쩔매는 씬이다. 제임스 본드는 언제 어디서 어떤 가젯을 사용해야 하는지 귀신같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게 하는 반면 007 시리즈를 패로디한 영화에선 주인공이 가젯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애를 먹는 씬이 자주 나온다.

워너 브러더스의 1991년 액션 코미디 'If Looks Could Kill'에도 그런 씬이 나온다. 얼떨결에 수퍼 스파이로 오인받아 온갖 특수장치로 가득한 로터스 에스프리(Lotus Esprit)를 몰게 된 고등학생 마이클 코벤(리처드 그리코)이 창문을 열지 못해 쩔쩔매며 이것저것 누르다 로켓까지 발사하는 씬이다.


에디 머피(Eddie Murphy) 주연의 액션 코미디 영화 '베벌리 힐즈 캅 3(Beverly Hills Cop 3)'에도 비슷한 씬이 나온다. 액슬 폴리(에디 머피)가 해괴하게 생긴 무기 사용법을 몰라 이것저것 눌러보다 노래를 틀어놓는 씬이다.


그런데 '스펙터'에도 이와 비슷한 씬이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크립트 초안에 의하면, 본드가 아스톤 마틴 DB10의 여러 비밀장치 작동법을 몰라 이것저것 눌러보는 씬이 나온다. 아스톤 마틴 DB10은 본드가 아닌 009를 위해 마련된 자동차였기 때문에 비밀장치 작동법을 잘 모르는 본드는 이것저것을 눌러보다 노래를 틀어놓게 된다. 추격하는 미스터 힝스(데이브 바티스타)를 따돌리기 위한 방법을 찾던 본드가 'Atmosphere'를 선택하자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것.

이 때 영국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가 부른 '스푸키(Spooky)'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곡은 맘에 든다. 하지만 이런 유머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리는지 궁금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유머를 보태기 위해 제작진이 노력한 것은 알겠는데, 이런 유치한 유머는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007 시리즈를 패로디한 코미디 영화에나 나옴 직한 유머를 007 시리즈가 따라한다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어두워진 이유를 설명할 때마다 '어스틴 파워스(Austin Powers)'를 예로 들곤 헀다. 클래식 007 시리즈를 패로디한 마이크 마이어스(Mike Myers) 주연의 코메디 영화 시리즈와 차별화 시키기 위해 어둡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와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는 게 보다 더 솔직한 답변일 듯 하지만, '어스틴 파워스'와 거리를 두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는 것도 나름 일리는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펙터'에서 짜낸 유머 아이디어가 '어스틴 파워스' 수준의 유치한 유머라니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어스틴 파워스'와 확실하게 차별화 되려면 보다 수준 높은 유머를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카 체이스 씬 도중에 나오는 본드와 머니페니의 대화 씬에도 유치한 유머가 포함됐다.

미스터 힝스에 쫓기면서 아스톤 마틴 DB10에서 머니페니와 통화를 하던 본드가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냐고 묻는 씬이다. 늦은 밤에 머니페니가 남자와 함께 있으니까 본드가 함께 있는 남자가 누구냐고 따지고 든다. 영화 초반에 본드의 집을 찾아온 머니페니가 본드의 침실에 여자가 있는 걸 알아차리는 씬이 있는데, 본드와 머니페니의 통화 씬에선 거꾸로 머니페니의 애인이 본드에게 발각되는 것이다.

본드와 머니페니의 통화 씬에서 본드가 "Who was that?"이라고 묻자 머니페니는 "No one"이라고 답한다. 본드가 "No it's not!"이라고 하자 머니페니는 난감한 듯 "Just a friend"라고 말한다.

"Just a friend" eh?

그렇다면 본드가 탄 아스톤 마틴 DB10에선 'Spooky'가 아니라 이 노래가 흘러나와야 하지 않을까?


머니페니가 본드의 '걸프렌드'를 발견하는 씬은, 여전히 불필요해 보이긴 해도,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로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씬들이 클래식 007 시리즈에 나온 바 있어서다. 하지만 본드와 머니페니의 통화 씬은 007 시리즈가 아닌 TV 시트콤에나 어울림 직한 유머다. 카 체이스 도중에 느닷없이 머니페니의 '보이프렌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코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유머는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 들어 007 제작진이 미국산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를 열심히 베끼더니 이번엔 '아이언 맨(Iron Man)' 시리즈의 토니 스타크 스타일 유머를 모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둡고 무거운 톤은 워너 브러더스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를 베끼고 가볍고 유머러스한 파트는 마블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딱 알맞게 됐다.

이런 씬들이 완성 버전에 포함되었는가는 영화가 개봉해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되도록이면 빼버렸으면 좋겠다.

이렇다 보니 007 제작진이 유머를 보강하려다 억지로 집어넣은 티가 나는 코믹한 씬들로 되레 역효과를 내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현재로써는 007 제작진이 이번에도 영국적이고 007 시리즈에도 잘 어울리는 유머를 찾는 데 실패한 듯 하다. 007 시리즈의 유머는 일부러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려 할 게 아니라 평범한 대화 씬에서 다소 빈정대는 듯한 재치있는 대화를 주고 받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스크린라이터가 말빨/글빨이 좋고 유머 감각 또한 풍부하다면 시트콤마냥 코믹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넣지 않고도 유머를 효과적으로 보탤 수 있다.

그러나 왠지 이번 '스펙터'에서도 어설프게 웃기려는 선에서 또 그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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