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7일 토요일

'007 스펙터' - 007 시리즈 본궤도 재진입 시도했으나 맥박을 잃었다

"Welcome back, Mr. Bond. We've been expecting you..."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네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펙터(SPECTRE)'가 개봉했다. 007 시리즈 24탄 '스펙터'는 지난 10월 말 본드의 고향, 영국에서 먼저 개봉해 영국 흥행기록을 세우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스펙터'의 출연진은 화려한 편이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2회 수상한 독일 배우 크리스토프 발츠(Christoph Waltz), 프랑스 여배우 레아 세두( Rea Seydoux),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 마블의 수퍼히어로 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에 출연했던 미국 배우 데이브 바티스타(Dave Bautista), 멕시코 여배우 스테파니 시그맨(Stephanie Sigman), 영국 배우 앤드류 스캇(Andrew Scott) 등이 출연했다. 크리스토프 발츠는 악당 보스, 프란츠 오버하우저 역을 맡았고, 데이브 바티스타는 오버하우저의 헨치맨, 미스터 힝스 역으로 출연했다. 프랑스 여배우 레아 세두는 리딩 본드걸, 매들린 스완 역을 맡았으며,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는 서포팅 본드걸로 출연했다. 멕시코 여배우 스테파니 시그맨은 멕시코 시티 씬에 등장하는 본드걸, 에스트렐라 역으로 출연했고, 영국 배우 앤드류 스캇은 영국 정보부의 새로운 보스, 덴비 역을 맡았다. 또한, M 역의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 Q 역의 벤 위샤(Ben Whishaw), 미스 머니페니 역의 나오미 해리스(Naomie Harris) 등 전작 '스카이폴(Skyfall)'에서 완성된 MI6 오피스 멤버들도 모두 '스펙터'로 돌아왔다.

연출은 전작 '스카이폴'의 샘 멘데스(Sam Mendes)가 맡았다. 한 영화감독이 007 시리즈를 2회 연속 연출한 건 지난 80년대 이후 멘데스가 처음이다. 60년대엔 테렌스 영(Terence Young), 70년대엔 가이 해밀튼(Guy Hamilton)과 루이스 길버트(Luis Gilbert), 80년대엔 존 글렌(John Glen)이 2회 이상 연속으로 007 시리즈 연출을 맡았으나, 90년대 이후부턴 매번 영화감독이 교체되었다. 마틴 캠벨(Martin Campbell)이 1995년작 '골든아이(GoldenEye)'와 2006년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등 두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연출했으나 '연속'은 아니었다. 샘 멘데스는 지난 80년대에 5회 연속으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연출을 맡았던 존 글렌 이후 처음으로 2회 연속 연출을 맡은 제임스 본드 영화감독이 됐다.

멘데스와 함께 '스카이폴'의 스크린라이터 존 로갠(John Logan)과 작곡가 토마스 뉴맨(Thomas Newman)도 '스펙터'로 돌아왔다. 2012년 영화 '스카이폴'을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던 베테랑 007 시리즈 스크린라이터 듀오, 닐 퍼비스(Neal Purvis)와 로버트 웨이드(Robert Wade)도 중간에 007 팀에 합류했다.

007 제작진이 지난 2012년 영화 '스카이폴'에서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를 모방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이번 영화 '스펙터'에선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를 비롯한 여러 편의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편집을 맡았던 에디터 리 스미스(Lee Smith)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2014년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촬영감독 호이터 반 호이테마(Hoyte van Toytema)가 007 팀에 합류했다.

'스펙터'의 줄거리는 이번에도 전작 '스카이폴'과 마찬가지로 '과거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 '스카이폴'에선 M(주디 덴치)의 과거가 MI6를 덥쳤다면 이번 '스펙터'에선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과거의 차례다. '스카이폴'의 악당 실바(하비에르 바뎀)가 M의 과거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스펙터'의 악당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발츠)는 본드의 과거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스카이폴'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인 '스펙터'는 본드가 현직 M(랄프 파인즈) 몰래 미스터리한 범죄조직을 홀로 추적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두목의 정체를 밝혀낸다는 줄거리다.


샘 멘데스 감독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였던 지난 '스카이폴'에 대단히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마크 포스터(Marc Forster) 감독이 2008년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를 지나치게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스파이 스릴러 영화로 만들었다면, 샘 멘데스 감독은 2012년 영화 '스카이폴'을 지나칠 정도로 미국산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특히 '다크 나이트' 시리즈처럼 만들었다. 둘 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잘못 만든 케이스로 꼽아야겠지만, 마크 포스터보다 문제가 더욱 심각했던 건 샘 멘데스였다. 포스터 감독의 '콴텀 오브 솔래스'는 퀄리티가 떨어지긴 했어도 방향은 비교적 올바른 편이었으나 멘데스 감독의 '스카이폴'은 방향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도 수퍼히어로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건 사실이라고 해도 제임스 본드의 개성과 특징을 제쳐두고 요새 유행하는 미국산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를 모방하는 데 급급했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007 시리즈가 5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가진 시리즈라서 제임스 본드의 개성과 특징은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므로 무언가 색다른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는 '진지한 007'과 '가벼운 007' 등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이 전부다. 로저 무어(Roger Moore)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이 '가벼운' 스타일이라면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과 다니엘 크레이그는 '진지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007 시리즈엔 이 두 가지 '아이덴티티'면 충분하다. 여기에 좋은 줄거리를 붙여 영화를 잘 만들면 된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선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007 제작진은 영화를 보다 신선하고 색다르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손을 댔다. 이 바람에 제임스 본드는 '제 3의 아이덴티티'를 갖게 됐고, 영화 역시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콴텀 오브 솔래스'는 '진지한 007'을 너무 지나치게 묘사한 경우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샘 멘데스 감독의 '스카이폴'은 불필요한 '제 3의 아이덴티티'를 만들면서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더욱 흐려놓은 것으로 보였다.

이렇다 보니 '스카이폴' 주요 제작진이 대부분 돌아온 '스펙터'에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스펙터'가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이라는 점, 지난 '스카이폴'에 이어 이번에도 계속해서 본드의 과거사에 매달린다는 점 등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두 가지 문제점 모두가 '스펙터'로 돌아왔다는 점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도 30년 넘게 알고 지낸 '베스트 프렌드'가 돌아오는데 썰렁한 분위기로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007 is Back"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선 007 시리즈 주제곡과 사운드트랙을 며칠간 반복적으로 듣는  "007 Pep Rally"가 필요했다. '스카이폴'이 개봉했던 지난 2012년은 007 시리즈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해였고, 영화 개봉에 앞서 열렸던 런던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에서도 제임스 본드가 여왕과 함께 낙하산 투하를 하는 등 계속해서 분위기를 잔뜩 띄워줬기 때문에 별도의 "Pep Rally"가 필요없었지만 이번엔 약간 사정이 달랐다. 2015년엔 워밍업이 좀 필요했다.

영화가 좀 맹탕이더라도 혹시나 대형 화면과 웅장한 사운드 효과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맥스로 보기로 했다. 멀티플렉스에 있는 아이맥스 스크린이 실제 아이맥스 스크린보다 훨씬 작은 만큼 가능한한 앞줄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야 대형 스크린 '효과'를 좀 더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펙터'는 이 정도의 노력만으로는 재밌게 보기 어려운 영화였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 들어서 처음으로 건배럴 씬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익사이팅했다. 2014년 영화 '버드맨(Birdman)'의 롱 테이크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멕시코 시티에서 벌어지는 프리-타이틀 씬도 나쁘지 않았다. 007 제작진이 유행에 워낙 민감해서 그런지 '버드맨'의 롱 테이크 스타일도 바로 참고한 듯 했다.

프리-타이틀 씬까지만 봐도 007 제작진이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벌어진 간격을 좁히려 노력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007 시리즈가 전통적인 007 시리즈 스타일에서 지나칠 정도로 멀어졌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는 점을 제작진이 의식한 듯 했다. '스펙터'에선 이전 영화보다 유머에도 좀 더 신경쓴 듯 했고, 굳은 표정으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도 자주 미소를 짓는 등 이전보다 부드럽고 여유가 생긴 모습을 보였다. 항상 긴장된 표정으로 뛰어다니던 데서 약간 벗어나 이번엔 "I-KNOW-WHAT-I'M-DOING"이란 듯한 여유가 엿보이는 베테랑 본드의 모습을 보여줬다. 유머 파트에서 다소 오버하는 듯 보였지만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도 지난 '스카이폴'처럼 무뚝뚝한 터프가이 수퍼히어로 흉내를 내는 제임스 본드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스펙터'에서 보여준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이런 베테랑 본드의 모습을 지난 2008년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부터 보여줬더라면 지금쯤 다니엘 크레이그의 특징을 잘 살린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와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오락가락하며 모방하면서 시간 낭비를 한 바람에 기대했던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스펙터'가 크레이그의 네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두 번째였다면 멋졌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크레이그의 두 번째 영화에 기대했던 걸 네 번째 영화에 와서야 보여준 007 제작진에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다.


여기까진 다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스펙터'의 가장 큰 문제는 스토리에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웠다. 범죄조직 스펙터와 두목 블로펠드가 공식적으로 44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 줄거리를 이렇게밖에 만들지 못했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영화의 기초로 삼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모두 바닥난 이후인 지난 90년대부터 007 제작진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매번 새로운 적을 만드는 일이었다. 냉전은 끝났고 스펙터는 법적인 문제로 영화에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007 제작진은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50년대 후반에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제작진이 냉전이 조기에 종식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것이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이었는데, 정작 007 제작진은 냉전이 끝났는데도 법적인 문제로 스펙터를 영화에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007 제작진은 스펙터, 블로펠드 관련 007 시리즈 라이센스를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 측으로부터 모두 넘겨받았다. 이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적으로 삼은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펙터'는 익사이팅한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다. 정 반대로 지금까지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완결시키는 대단원 격의 성격을 띤 영화였다.

007 제작진을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고질적인 악당 문제가 한방에 해결되었는데 완결편? 1971년 영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 이후 처음으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오피셜 007 시리즈에 공식적으로 다시 등장한 영화가 '스펙터'인데, 고작 짜낸 아이디어가 '카지노 로얄', '콴텀 오브 솔래스', '스카이폴'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배후에 스펙터가 버티고 있었다는 게 전부란 말인가?

더군다나 007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줄거리가 연결되는 '속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가 아니다. 007 제작진은 지난 2008년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전편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바로 이어지는 속편을 시도했으나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았다. 줄거리가 연결되는 시리즈를 시도한다는 건 신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쓸데없는 아이디어였고, 결과 또한 좋지 않게 나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니까 전편 영화의 줄거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질질 끌려고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선 줄거리를 계속 연결시키지 않고 과거에 하던 것처럼 전편과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플롯의 영화로 되돌아갔다. '스카이폴'에서 맘에 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었어도 연속극 고리를 끊은 것만은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007 제작진이 연속극의 미련을 완전히 떨쳐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펙터'에서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속편을 또 시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엔 단지 '스카이폴' 뿐만 아니라 '카지노 로얄'과 '콴텀 오브 솔래스'와도 연결시키면서 4부작을 완성시켰다.


결과는 이번에도 좋게 나오지 않았다. '스펙터'는 그다지 흥미가 끌리지 않는 밋밋한 스토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열심히 전개만 시키다 끝났다. '카지노 로얄', '콴텀 오브 솔래스', '스카이폴'과 줄거리를 연결시키고 원작소설에 등장했던 캐릭터, 오버하우서까지 등장시키는 등 나름 아이디어를 짜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오버하우서를 끌어들인 건 기발한 아이디어였지만 본드와 블로펠드의 역사를 지나치게 새로 쓰려 한 게 신경에 거슬렸다. 본드의 어렸을 적 과거 이야기를 블로펠드와 연결시킨 아이디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이런 스토리는 007 시리즈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난 '스카이폴'에 이어 이번에도 본드의 어렸을 적 과거 이야기로 되돌아갔다는 점도 맘에 들지 않았다. 007 시리즈는 본드가 어렸을 적의 사적인 이야기를 더듬는 영화 시리즈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서 본드의 어렸을 적 과거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007 제작진이 그 부분에 관심을 가진 듯 하지만, 이런 플롯은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까진 넘어간다고 치자. 본드의 지극히도 개인적인 삶과 연관된 플롯도 좋다고 하자. 여기까지 넘어가니까 또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마른 감정'이었다. 영화의 플롯은 본드의 과거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매우 개인적인 내용인데 이상하게도 제임스 본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번 영화는 플롯부터가 굉장히 개인적이므로 이번엔 본드가 내면과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낼 것을 기대했으나 이상하게도 본드는 이 모든 이야기에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본드 뿐만 아니라 오버하우서와 본드걸 매들린 스완 등 메인 캐릭터 모두가 사건에 흥미가 없고 지루해 보였다. 스토리는 마치 비디오게임에서 스테이지 1을 클리어하고 스테이지 2로 이동하듯 기계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드라마틱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미지근하게 전개되다 밋밋하게 끝났다. 런타임이 2시간 반 씩이나 되는 007 시리즈 역대 가장 긴 영화였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얼렁뚱땅, 대충대충이었다. 지금의 007 제작진이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살리는 것엔 소질이 없어도 드라마 파트 만큼은 흡잡을 데 없이 만들 것으로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아니었다. 본드와 오버하우서는 서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에선 서로 별 관심이 없어 보였으며, 본드와 매들린의 로맨스는 애틋하고 자시고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휘릭 지나가 버렸다. 매들린은 본드가 또다시 사랑을 느끼는 제 2의 베스퍼 린드 격인 캐릭터로 알려졌으나 영화에선 둘의 관계가 무르익을 겨를이 없었다. 느닷없이 서로 사납게 달려들며 어색한 키스를 한바탕 한 게 전부였을 뿐 서로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러브씬이 부족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007 시리즈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던 무의미한 러브씬/베드씬의 비중을 크게 줄인 게 아주 맘에 들었다. 이것이야 말로 매번 반복되는 틀에 박힌 007 시리즈 포뮬라였는데, 이번 '스펙터'에선 이 부분을 시원스럽게 걷어냈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본드와 매들린이 특별한 사이로 발전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만한 씬이 없었다. 굳이 러브씬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본드와 매들린의 관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영화 주제곡부터 샘 스미스(Sam Smith)가 부른 애절한 러브송인데, 로맨스 파트를 건성으로 넘어갔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런타임이 2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인데도 나와야 할 씬이 나오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는 런타임은 2시간 반이었지만 내용은 30분짜리였다.

다시 말하지만, 정통 007 시리즈의 멋과 스타일을 살리는 데서 망친 게 아니라 흡잡을 데 없이 잘 만들 줄 알았던 드라마 파트에서 죽을 쒔다는 게 가장 뜻밖이었다.

스펙터가 꾸미는 영국 정보부 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재미가 없었다. 현재진행형 이슈를 슬쩍 다루는 시늉을 내면서 구색을 갖추려는 용도가 전부였지 진지하게 짚어볼 만한 가치가 없었다. 스파이 스릴러에 어울리지 않는 메인 플롯의 문제점을 덮어보려는 의도도 깔려있는 듯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스펙터'도 지난 '스카이폴'과 마찬가지로 메인 악당이 꾸미는 음모는 별 볼 일 없고 등장 캐릭터들간의 개인적인 원한 관련 이야기가 메인 플롯을 차지한 또 하나의 제임스 본드 영화였다.


스토리가 시원찮았기 때문인지 캐릭터들도 별 볼 일이 없었다.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기한 악당, 프란츠 오버하우서부터 실망스러웠다. 오버하우서는 교활하지도 않고 대단히 위협적이지도 않은 미지근한 캐릭터였다. 프란츠 오버하우서는 원한과 집착에 사로잡힌 어둡고 뒤틀린 캐릭터였으나 발츠는 이런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기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나면 볼 게 없었다.

007 제작진은 크리스토프 발츠가 맡은 역할의 정체를 놓고 비밀 놀이를 하면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려 했다. 그러나 발츠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가는 누구나 다 아는 비밀도 아닌 비밀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프란츠 오버하우서에 관한 미스터리는 사실 미스터리도 아니었다.  007 제작진과 크리스토프 발츠는 한참 전부터 나돌던 '루머'를 극구 부인했지만, 코흘리개 아이들 상대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발츠의 실제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로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그들은 아니라면서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스카이폴'에서 이미 한 차례 사용했던 수법을 '스펙터'에서 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 데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본드팬과 영화팬을 유치원생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다 보니 크리스토프 발츠의 캐릭터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에 흥미가 끌릴 수 없었다.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가지고 유치한 미스터리 놀이를 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본드걸은 지난 '스카이폴'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지난 '스카이폴'과 달리 이번엔 본드걸다운 본드걸이 등장하고, 리딩 본드걸다운 리딩 본드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리딩 본드걸이 누군지, 리딩 본드걸 자체가 존재하는지 불확실했던 지난 '스카이폴'보다 많이 나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만족스럽진 않았다.

레아 세두가 맡은 리딩 본드걸은 나름 흥미로운 캐릭터였으나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제 2의 베스퍼 린드, 제 2의 트레이시 본드가 될 만한 포텐셜을 갖춘 캐릭터였으나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했다. 레아 세두는 매들린 스완 역에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차차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본드와 매들린의 관계가 무르익을 기회 자체를 제대로 갖지 못하면서 기대 이하에 머물렀다. 레아 세두와 매들린 스완이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한 건 '스펙터'의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서포팅 본드걸 역을 맡은 모니카 벨루치 역시 실망스러웠다. 첫 번째 문제는 20년 늦게 본드걸이 됐다는 점이었다. "너무 늙은 본드걸"이라고 하면 "에이지즘(Ageism)", "섹시즘(Sexism)" 등 "-이즘"을 들이미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찌됐든 간에 50대 본드걸은 불필요했다. 또한, 모니카 벨루치처럼 본드걸 역에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여배우를 캐스팅한 것도 그리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지극히 전형적인 클리셰 투성이의 본드걸을 연기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본드와 루씨아(모니카 벨루치)가 대화를 나누는 씬은 '스펙터'의 가장 유치한 씬 중 하나였다.

헨치맨, 미스터 힝스 역을 맡은 데이브 바티스타도 마찬가지로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미스터 힝스는 '골드핑거(Goldfinger)'의 오드잡,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문레이커(Moonraker)'의 죠스 등을 연상시키는 말수가 굉장히 적은 거구의 헨치맨이었으나 비슷비슷한 또 하나의 007 시리즈 헨치맨이었을 뿐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바티스타는 007 시리즈 헨치맨 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였으나 '스펙터'의 미스터 힝스는 개성이 매우 부족한 캐릭터였다. 007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에도 대사가 없는 헨치맨, 패트리스(올라 라파스)를 등장시킨 바 있기 때문에 말수가 적은 과묵한 헨치맨 캐릭터를 '스펙터'에서도 계속 울궈먹은 것처럼 보였다.


액션 씬도 과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요란스럽긴 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씬은 없었다. 스타일리쉬하면서도 박진감이 넘치는 액션 씬을 기대했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씬이 없었다. 액션 씬의 스케일이 큰 건 사실이었지만 거의 모든 액션 씬이 슬로우모션으로 보는 것 같았을 뿐 박진감이 크게 부족했다. 요란스러운 최신 컨셉카가 등장하는 것으로 화제를 모았던 자동차 추격 씬도 자동차 광고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싱거웠다. 익사이팅한 추격전보다 영화에 등장한 자동차들이 전부였다. 007 시리즈 자동차 추격전은 비디오게임 '니드 포 스피드(Need for Speed)' 스타일과 거리가 있지만 요새 '패스트 앤 퓨리어스(Fast & Furious)' 시리즈가 인기를 끄는 만큼 '아스톤 마틴 DB10 vs 재규어 C-X75'의 유치한 카 체이스 씬을 넣은 듯 하다. 가장 기대했던 오스트리아 체이스 씬도 기대 만큼 익사이팅하지 않았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들어서 처음으로 눈덮인 산을 찾았으나 실망스럽게도 별로 볼 게 없었다. 클래식 007 시리즈에 나왔던 여러 오마쥬 씬만 신나게 눈에 들어왔을 뿐 익사이팅한 액션 씬이 없었다. 열차에서 벌어지는 격투 씬은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열차 격투 씬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위기일발'의 격투 씬 만큼 격렬하고 무자비해 보이지 않았으며,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격투 씬처럼 재밌지도 않았다.

이렇다 보니 '스펙터'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액션 씬은 건배럴 씬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스펙터'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건 배경음악이었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미지근했는데 배경음악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가 약간 미지근해도 배경음악이 익사이팅하면 분위기가 살아날 수도 있었으나 '스펙터'는 아니었다. 지난 '스카이폴'에서도 토마스 뉴맨의 스코어가 맘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 '스펙터'에선 나아지긴 커녕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멕시코 시티에서 촬영한 프리-타이틀 씬까지만 해도 배경음악이 지난 '스카이폴'보다 나아진 듯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번에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엔 어찌 된 게 씬과 배경음악이 따로 노는 듯 했다. 어둡고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풍기는 배경음악을 준비한 듯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SF-판타지 영화음악처럼 들렸다. 007 시리즈 음악이 아니라 '해리 포터(Harry Potter)', '다크 나이트' 시리즈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배경음악이 흥을 곧우는 게 아니라 되레 분위기를 망쳤다.

그렇다고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벌어진 간격을 좁히기 위해 신경을 쓴 점은 맘에 들었다. 지난 '스카이폴'까지만 해도 007 시리즈가 갈수록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아진다고 생각했는데, 007 제작진은 이번 '스펙터'를 통해서 "007 시리즈라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007 시리즈의 정체성을 걱정하는 많은 본드팬들에게 뚜렷하게 보냈다. 그러면서도 007 제작진은 전편과 이어지는 줄거리, 본드의 과거사 들추기 등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새로 생긴 나쁜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 엉거주춤하게 양다리를 걸쳤다. 하지만 지난 '콴텀 오브 솔래스'와 '스카이폴' 때 처럼 007 시리즈라는 사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007 시리즈의 본궤도에서 계속 멀어지지 않고 본궤도로 재진입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하고 싶다. 영화 내내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지난 '콴텀 오브 솔래스', '스카이폴'보다 007 시리즈다워 보이는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스펙터'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지금까지 출연한 네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에서 가장 007 시리즈다워 보이는 영화였다. 가장 제임스 본드 영화다워 보이는 영화 순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카지 노로얄'과 1, 2위 다툼을 할 만하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 벌어진 간격을 좁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부는 "클래식 007 시리즈"라고 하면 "유치한 유머와 터무니 없는 가젯"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기초적인 몇 가지만 지켜주면 유치한 유머와 터무니 없는 가젯 없이도 클래식 007 시리즈를 충분히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건배럴 오프닝 2)M의 오피스에서 미션 브리핑 3)전편과 이어지지 않는 독립된 플롯 정도만 지켜줘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 가능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007 제작진이 지금까지 이를 꺼린 이유는 007 시리즈를 어떻게든 색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클래식 007 시리즈에서 계속해서 멀어지는 것이 되레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점을 007 제작진이 깨달은 듯 하다. 하지만 007 제작진은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벌어진 간격을 좁히는 방법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 기초적인 007 포뮬라를 따르는 쪽을 택해야 했으나 007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에서 했던 것처럼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씬을 늘어놓는 쪽을 택했다. 이 바람에 '스펙터'는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과거 영화에 사용했던 낯익은 씬들을 재활용한 낡은 영화처럼 보이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영화감독 샘 멘데스, 스크린라이터 존 로갠, 작곡가 토마스 뉴맨 등 '스펙터'의 주요 제작진이 007 시리즈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임스 본드 영화를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재주는 있어도 007 시리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재주가 부족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스펙터'에서 클래식 007 시리즈 쪽으로 보다 가깝게 다가간 영화를 만들려 했으니 싱겁고 맥빠진 영화가 나오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그러한 시도를 했다는 자체는 높게 평가한다. 007 시리즈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가장 크게 훼손한 테러리스트(?)로 불리던 샘 멘데스가 "그래도 여전히 클래식 007 시리즈를 무시할 수 없다"면서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벌어진 간격을 좁히려 했다는 점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정통 스타일 007 시리즈를 제대로 만들려면 007 시리즈를 훤히 꿰고 있는 '전문가', '적임자'에게 영화를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 '스펙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영화인에게 맡긴다고 해서 제대로 된 007 시리즈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007 시리즈를 훤히 꿰고 있는 '전문가', '적임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샘 멘데스는 007 시리즈 '전문가' 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

이처럼 '스펙터'는 만족스러운 영화가 아니었다. 서둘러 완성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무언가 부족한 감이 드는 영화였다. 이어지는 줄거리 등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많았어도 큰 하자가 없다면 007 시리즈 본궤도에서 계속 벗어나는 걸 멈추고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는 데 높은 점수를 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기 힘들었다. '스펙터' 스크립트를 읽으면서 아주 맘에 쏙 드는 영화는 아니어도 제법 괜찮은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의외로 실망스러웠다. 몇몇 유치한 유머 씬을 수정하는 등 보다 개선된 부분도 눈에 띄었지만 수정을 거듭하면서 스크립트가 누더기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았던 '스카이폴'보다 '스펙터'가 더 마음에 드는 게 사실이다. 007 시리즈 순위를 정할 때 007 시리즈로 보이지 않는 영화를 최악의 제임스 본드 영화로 꼽는 습관이 있어서 '스카이폴'보다는 '스펙터'가 더 맘에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펙터'가 더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댓글 10개 :

  1. 안녕하세요.
    오공본드님께서 악평을 하실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준수해서 놀랐습니다.^^;;
    오늘 한국에서 개봉인데, 큰 기대는 안하고 보려고합니다.^^
    영국 시사회 후기들을 보니 평이 좀 갈리던데(매우 좋다는 평 or QOS 속편이다)....
    국내 후기에도 '저 엄청난 조연 배우들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라는 평이 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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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지난 스카이폴 때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몇 가지가 이번에 좀 고쳐졌더라구요...^^
      이번 스펙터는 스카이폴 스타일과 클래식 007 시리즈 스타일에 양다리를 걸친 영화였습니다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영화가 나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난 QOS와 스카이폴의 경우엔 클래식은 외면하고 새로운 쪽으로만 일방적으로 기운 반면,
      스펙터에선 클래식 007 시리즈도 무시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비록 결과가 썩 만족스럽게 나오진 않았지만 그런 노력을 했다는 점은 평가해야죠...^^

      제 생각엔 QOS 속편이라기보다 QOS 리메이크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2008년에 QOS 대신 스펙터가 개봉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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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011 나폴레옹 솔로2015년 11월 11일 오전 7:47

    말씀하신 것처럼 스펙터의 수장 블로펠드가 제임스 본드와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맥빠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애정결핍으로 본드에게 반감을 품게됐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설정은 제작진이 "007이랑 블로펠드가 원래는 형제였던거야! 우와 멋지다!" 라고 생각했겠지만 완전 에러.
    완전히 미지의 적이며 그 정체와 기원이 수수께끼여야 할 블로펠드와 스펙터가 실상은 옛날 007과 뿌리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니 뭐랄까...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비밀조직이나 그 수장과의 대결이 가족 단위의 형제 다툼 정도로 스케일 축소된 느낌이더라구요. ㅠㅠ 이건 진짜 제작진이 잘못한거야!!

    기대했던 설원 액션은....ㅎㅎㅎ 진짜 충공깽이었습니다. 스키나 설상차는 당연히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등장 안시킨 제작진이 참 대단했고 또 놀랍도록 늘어지고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평이 좋지 않았던 인셉션의 설원씬이 더 인상깊고 007스러웠을 정도였어요. 그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007을 맡아야...

    아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편에서 전혀 언급이 없나시피한 007 외의 다른 00 에이전트에 대한 존재가 꽤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스카이폴만 보면 MI6 내 00 요원이 007 제임스 본드 혼자 밖에 없나 싶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클래식 007 시절처럼 009가 꾸준히 언급되더군요. 개그스럽게지만요.
    그렇지만 에러인게 후반부에 M과 Q, 머니페니, 그리고 00요원으로 추정되지만 코드명이 언급 안된 요원 한명을 빼고는 다른 00 에이전트가 일절 등장한 것이 뭔가 이상했어요 ;;; 아무리 M이 퇴출당하고 00 프로그램이 폐지됐다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M이 당연히 00 요원들에게 조력을 구할 것이고 또 당연히 그들 역시 M편에 붙어 도와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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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이유가 007 제작진이 본드의 과거와 내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본드의 과거와 연결시키면서 복잡한 본드의 내면까지 묘사한다는 목적은 달성했겠지만,
      이런 플롯은 TV 연속극에나 어울리지 007 시리즈엔 어울리지 않죠...^^
      말씀하신대로 스케일이 축소된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스카이폴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죠.
      스카이폴과 스펙터 둘 다 과거 원한에 얽힌 지극히도 개인적인 스케일이 작은 스토리였죠.
      007 제작진이 전형적인 플롯이 아닌 색다른 플롯을 만들려다 실패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과거 원한관계를 꺼낸다고 해서 본드가 보다 흥미로운 캐릭터가 되는 것도 아니죠.
      다른 건 모른다 해도 이 부분 만큼은 제작진이 대단히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설원 씬에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스키 스턴트 씬을 뺀 것도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007 제작진은 이것저것이 요란스럽게 파괴되는 액션 씬만 원했던 것 같습니다.
      프리-타이틀 씬에선 건물이 무너지고 설원 씬에선 비행기가 건물을 뚫고 날아가고...^^
      모로코 씬에선 기네스 신기록 폭발... 언제부턴가 이런 게 007 시리즈 액션 씬을 채우고 있죠.
      스키 스턴트가 나왔더라면 겨울철 익스트림 스포츠의 익사이팅함이 바로 느껴졌을텐데,
      제작진은 요란하게 때려부수는 액션 씬만 반복해서 보여주니까 재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셉션의 설원 씬이 이젠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블루레이로 갖고 있는데 뜯질 않아서...^^

      말씀하신 00 요원 파트는 007 제작진이 약간 고민하는 부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마블 코믹스의 shared universe가 인기 끌고있지만 007 제작진은 그쪽엔 관심없다고 했거든요.
      게다가 흑인 본드 논란까지 터지면서 흑인 007은 불가능해도 흑인 008은 가능하단 말도 나왔죠.
      따라서 쓸데없는 스핀오프 루머가 나오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 00 섹션을 비워놓은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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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어제 스펙터를 보고 왔는데요.
    유출된 이메일에서 소니 측에서 시나리오 작가들을 닥달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보통 제작사에서 실무진들 닥달하는게 말도 안되는 이유가 많은게 보편적인데, 스펙터를 보니 이건 뭐.. 시나리오가 얼마나 형편 없었으면....^^;;(고친게 저 정도라면 말이죠......) 오프닝 신에서 로마 까지는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는 많이 유들유들+능청스러워졌더군요. 소설 속 본드와 영화 속 본드 캐릭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숀 코너리의 본드나 로저 무어의 본드도 물론 멋졌는데 그런 대선배들의 모습을 본인 캐릭터 안에 잘 녹여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데요.(왠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 것이나, 또는 제작진과 캐릭터에서 갈등이 있었다는데 이런 부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더군요. 제작진은 '거칠고 흙먼지 뒤집어쓰는' 본드를 원하고,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런것 보다는 이전 영화들 속의 본드 캐릭터를 원하는게 아닌가 하는 등등....혼자만의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명감독+명조연배우들....을 다 포진시키고 영화를 못 살린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감독 문제였는지 아니면 제작진 문제였는지....ㅡㅡ;;
    왠지 다음편은 '괴작' 아니면 '명작'이 나올 듯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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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 시나리오가 형편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출된 스크립트도 퍼비스+웨이드가 손질한 거거든요.
      이메일 새나오기 전부터 스크립트 불만족, 닐 퍼비스와 로버트 웨이드 복귀 등 잡음이 좀 있었죠.
      그 다음에 이메일과 스크립트가 새나오면서 헛소문이 아니었다는 게 확인되었죠...^^
      차라리 유출된 스크립트대로 만들었더라면 더 나을 뻔 했단 생각도 듭니다.
      손질을 해서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냥 나뒀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단 부분도 좀 있었습니다.

      원래 007 프로듀서들이 변화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양반들인데 요샌 좀 다르게 행동하고있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007 시리즈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건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본드팬들로부터 너무 많은 변화를 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죠...^^
      따라서 제작진은 이런 불만을 표하는 본드팬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따라서 제 생각엔 멘데스와 크레이그 측이 더 큰 폭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색다른 본드 영화에 대한 욕구는 멘데스와 크레이그 쪽이 더 컸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들도 클래식 007 시리즈의 영향을 과소평가할 순 없었겠죠.
      이번 스펙터는 여기서 오락가락하다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카이폴과 스펙터의 공통된 문제는 적이 꾸미는 음모가 흐지부지했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펙터에서도 사적인 과거 원한관계 얘기를 또 메인으로 삼으려다 뒤죽박죽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007 제작팀에 스파이 소설가가 하나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첩보소설 작가가 처음부터 손을 댔다면 아무래도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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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한국에서는 007 스펙터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네요 한물간 클래식 007 재현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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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007 시리즈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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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본드의 어린시절을 스토리에 넣은 부분은 007영화의 성격에 안 맞는 거 같네요.
    로저무어시대까지만 해도 007영화는 그 해 관객수 탑에 속했는데..
    90년대 들어서 cg의 발달과 액션영화의 성격이 많이 바뀌면서 007캐릭터도 힘을 잃어버렸네요.
    25편에선 제작자들이 좋은 각본과 감독으로 다시 재미있는 시리즈로 컵백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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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007 시리즈가 제임스 본드 개인사, 과거사에 관한 영화가 되면 이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스쳐지나가는 정도면 몰라도 본드와 오버하우서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한 건 실수 같습니다.
      소잿감은 떨어졌는데 색다르게 만들어야겠다 보니 그런 쪽으로 기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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