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3일 목요일

나를 웃긴 헐리우드 리포터의 "흑인 제임스 본드 OK 흑인 배트맨 NO"

미국의 헐리우드 전문 미디어, 헐리우드 리포터가 드디어 나를 웃겼다. 나는 어지간 하면 다른 사람이 쓴 칼럼에 코멘트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헐리우드 리포터에 올라온 "Why James Bond Should Be Black But Batman Should Stay White"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워낙 어이가 없는 글이라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칼럼을 쓴 마크 버나딘(Marc Bernardin)은 제임스 본드는 흑인으로 바꿔도 되지만 배트맨은 백인으로 놔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흑인 제임스 본드는 되지만 흑인 배트맨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파트였다.


버나딘은 제임스 본드를 창조한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에 의하면, 제임스 본드는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돼있다고 했다.

여기까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버나딘은 이것만으로 항상 백인 배우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James Bond was, according to his British creator Ian Fleming, born to a Scottish father and a Swiss mother. He's an orphan, raised by his aunt. After short stints at boarding schools, he joins the Royal Naval Volunteer Reserve, then makes his way to the Ministry of Defence and lobbies for a slot in the Secret Service. Does any of that mandate he be played by a white actor? No. All that calls for a Caucasian is tradition — possibly the least interesting reason to refute innovation."

그렇다. 아직도 이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언 플레밍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제임스 본드의 정확한 생년월일이 원작소설에 나오지 않았지만, 본드가 1920년대에 출생한 것으로 보는 게 가장 유력하다. 그렇다면 1920년대에 스코틀랜드인과 스위스인이 결혼했을 때 흑인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우선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 1920년대보다 다민족, 다인종화된 현재 21세기에도 스코틀랜드인과 스위스인이 결혼했을 때 흑인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 이유는 - 당연하겠지만 - 스코틀랜드와 스위스 모두 백인 인구가 높은 유럽 국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흑인이 유럽에서 태어나면 "흑인 유러피언"이므로 유러피언 전체가 모두 백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1920년대 스코틀랜드인과 스위스인의 아들을 흑인으로 설정해도 무방한 것은 아니다. 그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유럽이 역사적으로 백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라는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스코틀랜드는 백인 인구가 96%이며, 흑인 인구는 흑인, 아프리칸, 캐리비언 모두 합해서 0.7%가 전부였다. CIA 팩트북에 따르면 스위스는 독일계 65%, 프랑스계 18%, 이탈리아계 10%, 로만쉬 1%이고 나머지가 6%였다. 나머지 6%에도 유럽계 백인이 포함됐을 수 있지만, 어찌됐든 최소한 94%는 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본드가 태어난 1920년대의 인종별 분포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타인종에 비해 백인이 요즘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에 스코틀랜드 아버지와 스위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백인일 가능성이 높을지 아니면 흑인일 가능성이 높을지는 상식 수준의 문제이다.

그러나 버나딘은 백인 배우가 항상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아야 한다는 이유로 제임스 본드의 부모가 각각 스코틀랜드인과 스위스인이라는 점을 꼽은 것을 "The least interesting reason to refute innovation"이라고 썼다.

그게 어떻게 "가장 흥미없는 이유"가 되나?

제임스 본드가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즉 유러피언 부모를 둔 것으로 원작소설에 설정된 것을 어떻게든 뒤집어 보려고 늘어놓은 억지 궤변일 뿐이다. 백인 인구가 90% 이상인 스코틀랜드와 스위스 출신 부모를 뒀다면 백인 캐릭터로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상식선에서 올바르지만, 이것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억지로라도 흑인으로 인종을 바꾸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버나딘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캐릭터를 흑인 배우가 맡아도 무방하다고 주장할 듯 하다.

이러니까 다문화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이 계속 백인이어야 한다는 이유 또한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버나딘은 브루스 웨인이 백인이어야 하는 이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 브루스 웨인처럼 부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Bruce Wayne has to be white because that kind of legacy and wealth don't exist in the African-American community. (Yet.) For that character to be true to who he is, he can't be anything else."

원작만화에서 브루스 웨인의 인종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지는 만화책을 읽지 않아서 모른다. 만화책에 그런 내용이 나왔더라도 버나딘은 "가장 흥미없는 이유"라며 무시해도 된다고 했겠지만 말이다. 이언 플레밍이 쓴 원작소설에 제임스 본드가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돼있는데도 불구하고 본드가 반드시 백인이라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억지" 앞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그런데 브루스 웨인이 백인이어야 하는 이유가 고작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 그 만한 부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데서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 본드는 부모가 모두 유럽계이므로 백인으로 설정하는 게 현실적으로 맞는데도 반드시 백인일 필요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펴면서도, 브루스 웨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서 브루스 웨인 만한 부자가 없어서 비현실적이므로 백인으로 놔둬야 한다...??

제임스 본드와 브루스 웨인 중에서 어느 쪽을 흑인으로 바꾸는 게 보다 쉬운가는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다들 쉽게 판단이 서는 이야기인데도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릴 필요가 있나 싶다.

이어 버나딘은 원작에 캐릭터의 인종이 분명하게 명시돼있지 않으면 인종을 바꿔도 상관없다는 주장을 폈다. 제임스 본드가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인종"이 분명하게 명시돼있지 않으면 백인이라는 근거 부족이라는 얘기다.

"흑인 제임스 본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레파토리 중 하나가 이것이다.

"Do the foundations of the character call for a specific race? If the answer is no, to me, it's an open playing field."

그렇다면 부모가 스코틀랜드와 스위스 출신이라는 점 이외로 제임스 본드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소설에 나올까?

사실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이언 플레밍의 숏 스토리 '힐데브랜드 레어리티(The Hildebrand Rarity)'다. 플레밍은 '힐데브랜드 레어리티'에서 제임스 본드를 "백인"이라고 분명하게 묘사했다.

"I knew you'd be fooling around somewhere down the coast, so I just drove alone until one of the fisherman told me there's a crazy white man trying to commit suicide alone at Belle Anse and I knew that would be you,." Bond laughed. - From 'The Hildebrand Rarity'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Crazy White Man"이라고 묘사된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도 제임스 본드가 백인이라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것인가?

1964년 출간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는 일본에 간 본드가 일본인으로 변장하기 위해 "VERY TENACIOUS DARK DYE"를 사용해 피부색을 옅은 갈색(Light Brown)으로 바꾸고, 헤어스타일도 일본식으로 바꾼다는 부분이 있다.

"She will then pour a very tenacious dark dye with which she has been suplied into that tiled bath in the floor and you will get in. You will relax and bathe your face and hair."


변장 작업을 거친 뒤 본드는 옅은 갈색 피부에 일본식 헤어스타일을 한 완전히 새로운 사람처럼 달라진다.

"Bond's face and hands were of a light brown tint, his black hair, brightly reached halfway down his forehead, and the outer corners of his eyebrows had been carefully shaved so that they now slanted upwards."


"DARK DYE"를 사용해 피부를 염색해서 "LIGHT BROWN" 피부색을 얻었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본드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53년 출간된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는 여자 캐릭터, 베스퍼 린드가 제임스 본드를 미국인 음악가 호기 카마이클(Hoagy Carmichael)와 닮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He is very good-looking. He reminds me rather of Hoagy Carmichael, but there is something cold and ruthless in his..."


제임스 본드와 호기 카마이클과의 비교는 1955년 출간된 제임스 본드 소설 '문레이커(Moonraker)'에도 재등장한다.

아래는 미국 뮤지션, 호기 카마이클(1899~1981)의 사진.


이처럼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어보면 본드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제임스 본드가 백인이라는 증거를 이렇게까지 찾아야 한다는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이런 소리를 하는 자체가 어처구니 없지만, 제임스 본드가 흑인일 가능성은 제로다. 1908년에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언 플레밍이 1953년에 창조한 영국인 캐릭터, 제임스 본드를 흑인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상식선에서 어느 정도나 된다고 보는가? 이것 또한 제로다. 이와 같이 굳이 구체적인 부연 설명 없이도 제임스 본드가 백인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본드는 명백한 백인이야, 백인!"이라는 대목이 반드시 소설에 나와야만 백인으로 인정하겠다는 생각 자체부터가 넌센스다. 이제부터는 소설을 쓸 때 "캐릭터 A는 백인, 캐릭터 B는 흑인"이라는 각주라도 필수로 달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충분한 증거와 개연성 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하겠다는 막무가내식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피곤할 듯 하다. 다만 "캐릭터 A는 백인이고 캐릭터 B는 흑인"이라고 인종을 분명하게 명시하면 "인종차별자"라고 뒤집어씌울지도 모를 일.

이 모든 이유는 흑인 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맡아도 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겉포장만 그럴듯 할 뿐 억지와 허점 투성이의 주장만 반복하는 것이다. 헐리우드 리포터에 올라온 버나딘의 글을 보면 아직도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간 백인 캐릭터로 자리를 잡은 제임스 본드를 이제 와서 억지로 인종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감성 호소" 아니면 "억지와 궤변"으로 미련을 부리는 방법밖에 찾지 못하는 듯 하다.

이런 식으로 자꾸 억지를 부리면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으려는 강도처럼 비쳐질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흑인들은 제임스 본드와 겨룰 만한 흑인판 수퍼 스파이 캐릭터를 새로 창조해서 박스오피스에서 제임스 본드를 격파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제임스 본드를 달라고 조르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의 도전 정신과 창조적인 마인드 없이 헐리우드에서 뭘 해먹겠다는 것인가?

몇 해 전에도 "흑인 제임스 본드" 관련 글을 썼기 때문에 더이상은 이 토픽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원하지 않는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흑인 제임스 본드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흑인 제임스 본드는 말도 되지 않으므로 거론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라는 점을 이미 여러 차례 분명하게 밝혔으므로 더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만약 제임스 본드가 흑인으로 바뀐다면 더이상 007 시리즈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도 밝혀둔다. 이는 단지 "흑인"이라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시안", "히스패닉" 모두 안 된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같은 캐릭터를 원하면 흑인판, 아시안판, 히스패닉판 수퍼 스파이 캐릭터를 각각 새로 만들면 되지, 수십년간 백인 캐릭터로 자리 잡은 제임스 본드의 인종을 이제 와서 굳이 억지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흑인 제임스 본드" 타령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쓸데없는 것으로 인종간의 텐션을 심화시키는 역효과만 내는 골칫거리가 아닌지 뒤집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댓글 2개 :

  1. 흑인 브루스 웨인. 흑인 클락 켄트. 흑인 피터 파커. 흑인 토니 스타크 다 갖다 붙여도 되겠네요.
    M은 정말 흑인이 맡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PC 주의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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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흑인 M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머니페니, 필릭스 라이터가 흑인인데도 저러니까요.
      본드를 남성으로 하면 성차별, 백인으로 하면 인종차별, 스트레이트로 하면 게이혐오...
      이런 걸 어느 정도는 받아줄 수 있으나 이제는 거의 "톨러런스 제로" 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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