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2일 화요일

피어스 브로스난 007 영화의 문제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는 제임스 본드도 꼼짝 못하는 상대가 있다.

바로, 스크린라이터다.

영화 스크립트를 쓰는 스크린라이터들이 수상한 스토리를 만들어 놓으면 제임스 본드도 별 수 없이 같이 망가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이 가장 좋은 예다. 발로 써 놓은 듯한 형편없는 스크립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바로 브로스난이다.

'투모로 네버 다이', 'The World is Not Enough', '다이 어나더 데이'는 007 시리즈 최악의 스크립트 탑10에 들만한 영화들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이 제임스 본드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형편없는 스크립트가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망쳐놨다는 데 대부분 동의할 정도다.

피어스 브로스난이 형편없는 스크립트의 영화에 당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이언 플레밍 원작이 바닥난 이후에 제임스 본드가 됐기 때문이다.

007 시리즈 1탄 '닥터노(1962)'부터 15탄 '리빙 데이라이트(1987)'까지는 플레밍의 원작에서 제목을 따왔다. 그러나, 16탄 '라이센스 투 킬(1989)'부터 플레밍 원작과 무관한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주인공만 제임스 본드'인 시리즈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플레밍의 흔적이 남아있긴 했지만 제목부터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시리즈에서 벗어나면서 여러모로 낯설게 보였다.

플레밍이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으니 그의 소설이 무한정으로 널려있는 건 아니다. 때문에 007 영화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선 싫든 좋든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문제는 '누가 만드냐'다.

'라이센스 투 킬'을 만들 때만 해도 007 시리즈 베테랑 스크린라이터 리처드 메이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마저 1991년 세상을 떠났다.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이 메이밤의 마지막 007 영화가 됐다.

플레밍의 원작도 동났는데 베테랑 스크린라이터까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런 시기에 피어스 브로스난이 살인면허를 발부받았다. 그의 007 영화들이 처참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브로스난은 말로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007'일 뿐 실제론 플레밍과 거의 상관없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게 됐고, 007 제작팀은 제목이나 줄거리에서 이언 플레밍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본드걸, 본드카, 가젯 등 '007 영화다운 것들'로 덮으려 했다. 브로스난 시절 본드걸로 출연했던 여배우들 중에 유명한 배우들이 많았다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브로스난의 첫 번째 영화 '골든아이'까지는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태산이다. '투모로 네버 다이'는 어설픈 중국 무술영화 흉내내기에 그쳤고 'The World is Not Enough'는 당시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여배우 드니스 리차드(Denise Richards)를 캐스팅해 미국 청소년층을 공략하려던 게 전부였다. '다이 어나더 데이'는 4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와 최초로 흑인 여배우가 리딩(Leading) 본드걸로 출연한다는 것을 이용해 흑인층을 노린 게 전부였다.

플레밍의 원작은 다 떨어졌고 영화 프로듀서는 가젯, 본드걸, 본드카와 같은 뻔한 볼거리로 울궈먹는 쪽을 택한 데다 스크린라이터들까지 한심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성적이 나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최근들어 볼거리 위주의 속 빈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 덕분일까?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

아무래도 '제임스 본드 캐릭터 파워 아니겠느냐'고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래가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제임스 본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인 만큼 한순간에 사라지거나 잊혀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발로 쓴 듯한 스크립트와 뻔할 뻔자 수준의 본드카, 본드걸, 가젯 레파토리만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007 시리즈가 플레밍의 원작소설 '카지노 로얄'로 되돌아갔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007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이 뚜렷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2008)' 이후엔 또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

댓글 4개 :

  1. 세계정복을 꿈꾸는 "방송국 사장"
    나사 빠진 피해망상 싸이코 女
    북한군 내부의 반란세력 (이뭐병…)

    이딴 놈(뇬?)들이나 잡으러 다니는 영화를 갖고 그 정도 흥행하게 만든 것을 보면 브로스넌의 007다운 느낌 자체는 훌륭하다고 봅니다.

    브로스넌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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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브로스난의 007 영화들이 워낙 실망스러웠기 때문에...ㅡㅡ;

    막 만든 007영화에 출연하고 떠난 배우로 보고있습니다. 조건이 아주 안 좋았을 때 본드가 되어 아무래도 좀...

    그렇다고 브로스난이란 배우에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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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압권 중 하나는 TWINE이었죠.
    009가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은 르나드를
    007이 임무를 맡자 M의 부하들 개죽음 당하고, M은 갇히고 난리 부르스를 춘 것을 보면
    스크립트 라이터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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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소피 마르소가 그런 영화에서 그런 본드걸로 나왔다는 게 참... 세상에 이런 낭비도 가능하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본드걸을 위해 태어난 듯한 여배우였는데...ㅋㅋ

    브로스난 시절 007 시리즈 스크린라이터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TWINE' 식의 간지러운 수준으론 말씀하셨던 복수도 소용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작가가 걸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실적이냐, 판타지냐, 복수극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삽을 들면 그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죽을 쑤게 될 테니까요...ㅡㅡ; 이 또한 브로스난 007 영화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카지노 로얄'과 'QOS' 스크립트를 맡은 폴 해기스는 괜찮아 보이는데요,일단 'QOS'까지 본 이후 결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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