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이 북미지역에서 가장 흥행 성공한 스파이 쟝르의 영화가 됐다. 북미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던 미국산 스파이 프랜챠이스들을 제치고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오랜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깔끔한 '승리'는 아니다. 왜냐, '스카이폴'은 007 시리즈로 보이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스오피스 성공을 위해 007 시리즈 50주년에 맞춰 제이슨 본(Jason Bourne), 배트맨 시리즈 등을 모방해 얻은 결과일 뿐이다. 전통적인 007 시리즈 스타일로 얻은 결과가 아니라 남의 것을 모방해 얻은 결과라 빛이 바랬다는 것이다.
That's right kids. There is always a "BUT"...
하지만 흥행성공이 007 제작진의 궁극적인 목표였을 것이므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간에 목적 달성엔 성공했다고 본다. 보다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영화를 원하는 본드팬들과는 달리 제작진의 입장에선 흥행수익이 가장 중요할 테니 말이다.
내가 '스카이폴'에 왜 큰 실망을 했는지는 지난 11월에 여러 파트로 나눠서 포스팅을 했으므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본다.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시대에 맞춰 변화를 시도하는 건 좋은데 다른 영화를 모방한 것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 무조건 다르게 만들려는 데만 집착한다. 왜냐,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가장 쉽게 007 시리즈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변화를 주기 위해 엉뚱한 것까지 시도하면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 만약 내가 '스카이폴' 스토리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수많은 본드팬들이 '팬픽션'을 쓰고 있다. 이는 단지 본드팬 뿐만 아니라 다른 인기 프랜챠이스 팬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여기서 제임스 본드 팬픽션을 쓸 생각은 없지만, '스카이폴'의 줄거리를 토대로 살짝 '리믹스'를 해보자. 스토리를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변화를 줘보자는 것이다.
프리-타이틀 씬
만약 내가 스크린플레이를 썼다면 이브(나오미 해리스)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007 제작진은 곧 머니페니가 될 이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준비하려 한 듯 하지만, 이런 식의 뒷 이야기는 유치할 뿐 007 시리즈에 반드시 필요한 서브플롯이 아니다. 이런 식의 불필요한 '프리퀄 만들기'는 빼버리는 게 더 낫다. "Take the bloody shot!" 순간의 그 유치함과 비현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브는 "아웃"이다.
그 대신 나는 본드의 연인으로 잠깐 등장했던 그리스 여배우 토니아 소티로풀루(Tonia Sotiropoulou)를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시키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스카이폴'의 프리 타이틀 씬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 'You Only Live Twice'의 엔딩 부분을 많이 참고했다. 본드가 총에 맞아 물로 떨어지는 씬은 소설 'You Only Twice'를 참고한 것이다. 그 이후 본드가 연인(토니아 소티로풀루)과 함께 있는 씬이 나온다. 이것 역시 소설 'You Only Live Twice'를 참고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설에선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본드와 함께 하던 본드걸은 키씨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란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카이폴'에 본드의 연인으로 등장한 이름없는 본드걸은 사실상 'You Only Live Twice' 소설에 등장한 키씨인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토니아 소티로풀루를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시켜, 총에 맞아 물에 빠지는 본드를 그녀가 지켜보도록 설정하겠다. 소설 'You Only Live Twice'에서 키씨가 본드를 구조했듯이 '스카이폴'에선 토니아의 캐릭터가 본드를 구조하도록 설정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총에 맞은 본드가 물에 가라앉으면서 메인 타이틀로 넘어가는 게 대단한 클리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드라마틱해 보이는 건 사실이므로 구조 씬을 넣을 수는 없겠지만, 토니아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해 사건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암시를 줄 수 있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만에 주인공이 총에 맞아 물에 빠져 죽은 걸로 생각하는 찐빵관객은 없을 것이므로 토니아 캐릭터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는 것이 스토리 전개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지 않으면 누가 본드에게 총을 쏘냐고?
패트리스(올라 라파스)의 동료가 쏜 것으로 바꾸면 된다.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 아예 등장하지 않는 만큼 본드는 패트리스를 처음부터 혼자서 추격하는 것으로 바꾸면 되며, 패트리스와 본드가 열차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 보며 스나이퍼 라이플을 쏜 것 역시 이브가 아닌 패트리스의 동료로 바꾸면 된다.
물론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서 빠지면 그 이후에 본드와 이브가 나누는 대화 내용도 바꿔야 하겠지만, 이는 그다지 힘든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바와 시버린
'스카이폴'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캐릭터는 실바(하비에르 바뎀)와 시버린(베레니스 말로히)이다. 실바는 007 시리즈의 메인 악당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으며, 본드걸 시버린은 이렇다할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부분도 바꿔보자.
'스카이폴'이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데 실바의 공이 대단히 컸으므로 나라면 이 친구를 그대로 메인 악당으로 두지 않겠다. 그 대신 실바를 본드를 돕는 동료로 역할을 바꾸겠다. 본드는 전직 MI6 에이전트 출신인 실바가 M에 대한 복수심에 MI6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시버린을 통해 실바를 만나지만, 그를 찾아온 본드를 만난 실바는 "네가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해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MI6를 떠난 건 사실이지만 M에게 나쁜 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M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본드에 말한다. 실바는 "나는 그저 컴퓨터 해커일 뿐이지 영국을 해치려는 싸이버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실바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지 실제로 그가 M을 해치려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본드는 실바의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가 사실을 말한다는 점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은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 오마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누가 메인 악당?
나라면 시버린에게 그 역할을 맡기겠다. 시버린은 실바에 접근해 연인 사이로 지내면서 실바의 해커 그룹에 그녀의 조직원을 심어넣어 실바 몰래 MI6를 해킹한 것으로 설정하면 된다. 시버린이 M과 MI6,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겐 영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유는 과거에 M이 시버린이 활동하던 첩보-테러 조직 섬멸을 명령해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전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골든아이(GoldenEye)',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 오마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쓴 '스카이폴'에선 메인 악당이 실바가 아닌 시버린이다.
본드와 실바는 곧 시버린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테러 플롯
실바는 시버린이 영국에 저택 또는 공장과 같은 은신처를 가지고 있다고 본드에게 말한다. 그러자 본드는 M에게 시버린이 영국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것 같다고 보고한 뒤 명예 회복을 원하는 실바와 함께 영국으로 이동한다. 영국에 도착한 본드와 실바는 각자 개별적으로 정보 수집을 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본드와 실바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시버린이 모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시버린은 영국에서 하는 모든 사업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범행을 입증할 확실한 물증이 없다. 정보 수집을 위해 아스톤 마틴 DB5를 몰고 시버린의 은신처를 찾아 간 본드는 곧 시버린이 런던 지하철을 이용한 생화학무기 테러를 계획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시버린의 은신처에서 간신히 탈출한 본드는 시버린의 테러 계획을 막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시버린과 그녀의 부하들은 조용히 영국을 빠져나가지 않고 M을 죽이기 위해 M의 저택을 공격한다. 시버린의 부하들 중 실바 쪽 사람이 있는 덕분에 시버린이 M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실바는 본드에게 연락을 하고, 본드와 실바는 M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저택으로 달려간다. 여기서 본드와 실바는 힘을 합해 시버린과 그녀의 부하들을 모두 해치운다. 그러나 그 와중에 M이 큰 부상을 입는다. M은 실바와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하면서 오해를 깔끔하게 털어내고 본드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
물론 대충 쓴 것이라서 다듬어야 할 부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포인트는, 어느 쪽이 더 전통적인 007 시리즈에 가까워 보이냐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진지하고 터프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유지하면서도 007 시리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액션과 배신, 그리고 테러 플롯 등을 모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전통적인 클래식 007 시리즈라고 하면 일부는 '클리셰'를 제일 먼저 꺼내드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클리셰를 전부 걷어내더라도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스토리만 마련되면 여전히 클래식 007 시리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007 제작진은 왜 이러한 방법을 찾지 않느냐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 무조건 다르게 만들려는 생각만 하고, 제이슨 본 시리즈와 배트맨 시리즈의 흥행 성공을 보면서 그들을 따라할 생각만 하는 제작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건 이렇게 만들고, 저건 저렇게 바꿔보자"는 가볍고 유치한 아이디어에 계속 휘둘리기만 할 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스오피스 흥행성공만을 전적으로 노린 티가 물씬 나는 '스카이폴'과 같은 영화를 내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이들은 흥행을 위해 007 시리즈를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산 수퍼히어로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을 부러워하는 일부 영국인들은 제임스 본드가 미국산 코믹북 수퍼히어로와 견줄 만한 영국산 수퍼히어로 캐릭터가 되길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덮어놓고 따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시리즈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만들 수 없다'는 게 문제다. 007 시리즈와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모두 애들 보라고 만든 영화라는 점엔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좁히려 노력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일반 영화관객들은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하든, 배트맨을 따라하든 영화가 재미있기만 하면 다들 좋다고 하겠지만 - 그래서 '스카이폴'이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 - 007 시리즈를 중요하게 여기는 본드팬들까지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과연 007 제작진이 다음 작품에선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본드24'가 어느 쪽을 택하든, 누가 만들든 상관없이 '스카이폴'을 능가하는 박스오피스 히트작이 되긴 어렵다는 점이다. 007 시리즈 50주년 서포트를 더이상 누릴 수 없을 것이며, 오만잡것을 다 끌어와 베끼는 007 시리즈의 싸구려 스타일에 식상한 영화관객들도 늘어날 것이다. '스카이폴'은 여러모로 운이 따라줬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계속될 진 알 수 없다.
다음 번엔 007 제작진이 또 얼마나 해괴한 시도를 할지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게 사실이다. 007 시리즈 베테랑인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은 이미 나이 일흔이 되어 얼마나 더 007 시리즈 제작에 참여할 지 알 수 없는 상태라는 점도 걱정을 키운다. 최근 들어 윌슨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엔 변함이 없어도, 만약 그가 007 시리즈를 떠나게 된다면 그 이후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윌슨이 그의 어린 아들을 제작진에 합류시키면서 그에게 시리즈를 물려줄 생각인 듯 하지만, 마이클 G. 윌슨마저 빠지면 007 시리즈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직 젊은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가 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바바라'일 뿐 그녀의 아버지인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가 아니라는 게 걸리는 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007 시리즈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That's right kids. There is always a "BUT"...
하지만 흥행성공이 007 제작진의 궁극적인 목표였을 것이므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간에 목적 달성엔 성공했다고 본다. 보다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영화를 원하는 본드팬들과는 달리 제작진의 입장에선 흥행수익이 가장 중요할 테니 말이다.
내가 '스카이폴'에 왜 큰 실망을 했는지는 지난 11월에 여러 파트로 나눠서 포스팅을 했으므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본다. 간단하게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시대에 맞춰 변화를 시도하는 건 좋은데 다른 영화를 모방한 것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 무조건 다르게 만들려는 데만 집착한다. 왜냐,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가장 쉽게 007 시리즈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변화를 주기 위해 엉뚱한 것까지 시도하면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 만약 내가 '스카이폴' 스토리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수많은 본드팬들이 '팬픽션'을 쓰고 있다. 이는 단지 본드팬 뿐만 아니라 다른 인기 프랜챠이스 팬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여기서 제임스 본드 팬픽션을 쓸 생각은 없지만, '스카이폴'의 줄거리를 토대로 살짝 '리믹스'를 해보자. 스토리를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변화를 줘보자는 것이다.
프리-타이틀 씬
만약 내가 스크린플레이를 썼다면 이브(나오미 해리스)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007 제작진은 곧 머니페니가 될 이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준비하려 한 듯 하지만, 이런 식의 뒷 이야기는 유치할 뿐 007 시리즈에 반드시 필요한 서브플롯이 아니다. 이런 식의 불필요한 '프리퀄 만들기'는 빼버리는 게 더 낫다. "Take the bloody shot!" 순간의 그 유치함과 비현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브는 "아웃"이다.
그 대신 나는 본드의 연인으로 잠깐 등장했던 그리스 여배우 토니아 소티로풀루(Tonia Sotiropoulou)를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시키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스카이폴'의 프리 타이틀 씬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 'You Only Live Twice'의 엔딩 부분을 많이 참고했다. 본드가 총에 맞아 물로 떨어지는 씬은 소설 'You Only Twice'를 참고한 것이다. 그 이후 본드가 연인(토니아 소티로풀루)과 함께 있는 씬이 나온다. 이것 역시 소설 'You Only Live Twice'를 참고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설에선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본드와 함께 하던 본드걸은 키씨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란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카이폴'에 본드의 연인으로 등장한 이름없는 본드걸은 사실상 'You Only Live Twice' 소설에 등장한 키씨인 셈이다. 그러므로 나는 토니아 소티로풀루를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시켜, 총에 맞아 물에 빠지는 본드를 그녀가 지켜보도록 설정하겠다. 소설 'You Only Live Twice'에서 키씨가 본드를 구조했듯이 '스카이폴'에선 토니아의 캐릭터가 본드를 구조하도록 설정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총에 맞은 본드가 물에 가라앉으면서 메인 타이틀로 넘어가는 게 대단한 클리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드라마틱해 보이는 건 사실이므로 구조 씬을 넣을 수는 없겠지만, 토니아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해 사건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암시를 줄 수 있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만에 주인공이 총에 맞아 물에 빠져 죽은 걸로 생각하는 찐빵관객은 없을 것이므로 토니아 캐릭터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는 것이 스토리 전개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 등장하지 않으면 누가 본드에게 총을 쏘냐고?
패트리스(올라 라파스)의 동료가 쏜 것으로 바꾸면 된다.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 아예 등장하지 않는 만큼 본드는 패트리스를 처음부터 혼자서 추격하는 것으로 바꾸면 되며, 패트리스와 본드가 열차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 보며 스나이퍼 라이플을 쏜 것 역시 이브가 아닌 패트리스의 동료로 바꾸면 된다.
물론 이브가 프리 타이틀 씬에서 빠지면 그 이후에 본드와 이브가 나누는 대화 내용도 바꿔야 하겠지만, 이는 그다지 힘든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바와 시버린
'스카이폴'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캐릭터는 실바(하비에르 바뎀)와 시버린(베레니스 말로히)이다. 실바는 007 시리즈의 메인 악당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으며, 본드걸 시버린은 이렇다할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부분도 바꿔보자.
'스카이폴'이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데 실바의 공이 대단히 컸으므로 나라면 이 친구를 그대로 메인 악당으로 두지 않겠다. 그 대신 실바를 본드를 돕는 동료로 역할을 바꾸겠다. 본드는 전직 MI6 에이전트 출신인 실바가 M에 대한 복수심에 MI6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시버린을 통해 실바를 만나지만, 그를 찾아온 본드를 만난 실바는 "네가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해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MI6를 떠난 건 사실이지만 M에게 나쁜 감정이 없으며, 오히려 M의 안부가 궁금하다"고 본드에 말한다. 실바는 "나는 그저 컴퓨터 해커일 뿐이지 영국을 해치려는 싸이버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실바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지 실제로 그가 M을 해치려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본드는 실바의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가 사실을 말한다는 점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은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 오마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누가 메인 악당?
나라면 시버린에게 그 역할을 맡기겠다. 시버린은 실바에 접근해 연인 사이로 지내면서 실바의 해커 그룹에 그녀의 조직원을 심어넣어 실바 몰래 MI6를 해킹한 것으로 설정하면 된다. 시버린이 M과 MI6,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겐 영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유는 과거에 M이 시버린이 활동하던 첩보-테러 조직 섬멸을 명령해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전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골든아이(GoldenEye)',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 오마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쓴 '스카이폴'에선 메인 악당이 실바가 아닌 시버린이다.
본드와 실바는 곧 시버린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테러 플롯
실바는 시버린이 영국에 저택 또는 공장과 같은 은신처를 가지고 있다고 본드에게 말한다. 그러자 본드는 M에게 시버린이 영국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것 같다고 보고한 뒤 명예 회복을 원하는 실바와 함께 영국으로 이동한다. 영국에 도착한 본드와 실바는 각자 개별적으로 정보 수집을 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본드와 실바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시버린이 모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시버린은 영국에서 하는 모든 사업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범행을 입증할 확실한 물증이 없다. 정보 수집을 위해 아스톤 마틴 DB5를 몰고 시버린의 은신처를 찾아 간 본드는 곧 시버린이 런던 지하철을 이용한 생화학무기 테러를 계획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시버린의 은신처에서 간신히 탈출한 본드는 시버린의 테러 계획을 막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시버린과 그녀의 부하들은 조용히 영국을 빠져나가지 않고 M을 죽이기 위해 M의 저택을 공격한다. 시버린의 부하들 중 실바 쪽 사람이 있는 덕분에 시버린이 M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실바는 본드에게 연락을 하고, 본드와 실바는 M을 구하기 위해 그녀의 저택으로 달려간다. 여기서 본드와 실바는 힘을 합해 시버린과 그녀의 부하들을 모두 해치운다. 그러나 그 와중에 M이 큰 부상을 입는다. M은 실바와 오랜만에 반갑게 재회하면서 오해를 깔끔하게 털어내고 본드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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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충 쓴 것이라서 다듬어야 할 부분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포인트는, 어느 쪽이 더 전통적인 007 시리즈에 가까워 보이냐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진지하고 터프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유지하면서도 007 시리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액션과 배신, 그리고 테러 플롯 등을 모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전통적인 클래식 007 시리즈라고 하면 일부는 '클리셰'를 제일 먼저 꺼내드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클리셰를 전부 걷어내더라도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스토리만 마련되면 여전히 클래식 007 시리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007 제작진은 왜 이러한 방법을 찾지 않느냐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 무조건 다르게 만들려는 생각만 하고, 제이슨 본 시리즈와 배트맨 시리즈의 흥행 성공을 보면서 그들을 따라할 생각만 하는 제작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건 이렇게 만들고, 저건 저렇게 바꿔보자"는 가볍고 유치한 아이디어에 계속 휘둘리기만 할 뿐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스오피스 흥행성공만을 전적으로 노린 티가 물씬 나는 '스카이폴'과 같은 영화를 내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이들은 흥행을 위해 007 시리즈를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산 수퍼히어로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을 부러워하는 일부 영국인들은 제임스 본드가 미국산 코믹북 수퍼히어로와 견줄 만한 영국산 수퍼히어로 캐릭터가 되길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덮어놓고 따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시리즈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만들 수 없다'는 게 문제다. 007 시리즈와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모두 애들 보라고 만든 영화라는 점엔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007 제작진은 '스카이폴'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좁히려 노력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일반 영화관객들은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하든, 배트맨을 따라하든 영화가 재미있기만 하면 다들 좋다고 하겠지만 - 그래서 '스카이폴'이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 - 007 시리즈를 중요하게 여기는 본드팬들까지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과연 007 제작진이 다음 작품에선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본드24'가 어느 쪽을 택하든, 누가 만들든 상관없이 '스카이폴'을 능가하는 박스오피스 히트작이 되긴 어렵다는 점이다. 007 시리즈 50주년 서포트를 더이상 누릴 수 없을 것이며, 오만잡것을 다 끌어와 베끼는 007 시리즈의 싸구려 스타일에 식상한 영화관객들도 늘어날 것이다. '스카이폴'은 여러모로 운이 따라줬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계속될 진 알 수 없다.
다음 번엔 007 제작진이 또 얼마나 해괴한 시도를 할지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게 사실이다. 007 시리즈 베테랑인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은 이미 나이 일흔이 되어 얼마나 더 007 시리즈 제작에 참여할 지 알 수 없는 상태라는 점도 걱정을 키운다. 최근 들어 윌슨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엔 변함이 없어도, 만약 그가 007 시리즈를 떠나게 된다면 그 이후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윌슨이 그의 어린 아들을 제작진에 합류시키면서 그에게 시리즈를 물려줄 생각인 듯 하지만, 마이클 G. 윌슨마저 빠지면 007 시리즈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직 젊은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가 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바바라'일 뿐 그녀의 아버지인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가 아니라는 게 걸리는 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007 시리즈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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