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 24탄 '007 스펙터(SPECTRE)'가 공식 발표되면서 본드팬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건 뭐니뭐니해도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가 아주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스펙터는 60년대 007 영화 시리즈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던 범죄조직이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숀 코네리(Sean Connery)와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가 출연했던 7편의 007 시리즈 중 6편의 영화에 스펙터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펙터는 법적인 문제로 인해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를 끝으로 007 시리즈에서 사라진 비운의 범죄집단이 되었다.
스펙터가 다시 007 시리즈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2013년 007 제작진이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 전체를 넘겨받은 덕분이다. 그 이전까지는 50년대 중반부터 007 영화 시리즈 탄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의 소유였으나, 2013년 맥클로리 측이 007 제작진에 제임스 본드 관련 라이센스 일체를 넘겨주면서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법정분쟁이 막을 내렸다.
스펙터 라이센스를 넘겨받은 007 제작진은 시간을 길게 끌지 않았다. 007 제작진은 2014년 12월 '본드24'의 공식 제목이 다름아닌 '스펙터'라고 발표하면서, 한동안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스펙터가 바로 다음 번 제임스 본드 영화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007 시리즈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이 스펙터이고, 스펙터의 우두머리인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Ernst Stavro Blofeld)가 007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악당인 만큼 전세계의 본드팬들은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귀환에 기대감을 보였다. 영화 제작에 기초로 삼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모두 바닥난 이후부터 매 영화마다 새로운 악당을 소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온 007 제작진 또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매번 새로운 악당과 범죄조직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항상 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영화 제목까지 '스펙터'로 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007 제작진이 스펙터의 리턴에 포커스를 맞추려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렇게 해서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오피셜 007 시리즈에서 자취를 감췄던 스펙터가 44년만에 다시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
물론,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 블로펠드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가 등장했고,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에도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모두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유어 아이스 온리'의 휠체어를 탄 사나이는 블로펠드를 연상시키는 게 전부일 뿐 공식적으로는 블로펠드가 아니었으며,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은 EON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오피셜 007 시리즈에 속하지 않은 제임스 본드 영화였다. 따라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오피셜' 007 시리즈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2015년 개봉한 '007 스펙터'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처음이다.
그렇다면 44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온 스펙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 제목부터 '스펙터'인 걸 보니 '스펙터 비긴스' 성격의 영화였을까?
007 시리즈로 오랜만에 돌아온 스펙터를 21세기 버전으로 새로 재탄생시키려 했으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스펙터를 21세기에 맞게 재탄생시키려 한 것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싶었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을 다시 영화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이 정도에 그쳤다는 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드와 블로펠드가 형제?
'007 스펙터' 악당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블로펠드를 본드의 과거사와 연결시킨 점이다.
본드와 블로펠드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알고지내던 '의붓형제' 사이로 설정하면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 한 것까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형제'는 너무 지나쳤다. 21세기 버전 블로펠드를 새로 소개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건으로 본드와 블로펠드가 서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정도면 충분했지,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뜯어고칠 필요는 없었다. 불과 10년 전에 개봉한 제임스 본드 영화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꼬맹이들이 많은데, 이제와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뜯어고쳐 둘의 사이를 형제 관계로 바꿔놓으면서 혼란만 더욱 가중시킨 꼴이 됐다. 007 시리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드와 블로펠드가 원작소설에서부터 원래 형제 사이였던 것으로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블로펠드가 아닌 또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본드의 형제이자 적으로 설정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다름아닌 블로펠드를 본드의 형제로 설정한 건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본드를 입양한 오버하우서 패밀리가 등장하는 것까진 괜찮았어도 본드와 함께 성장한 오버하우서의 아들이 블로펠드가 되는 것으로 설정한 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건 애니메 또는 코믹북에나 나옴 직한 내용이지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본드와 블로펠드를 형제 사이로 바꿔놓으면서 두 캐릭터의 관계를 불필요하게 혼란스럽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이야기가 '007 스펙터' 줄거리의 메인을 차지하면서 스펙터가 꾸미는 범죄음모는 뒤로 밀려났다. 지난 '스카이폴(Skyfall)'에서도 등장 캐릭터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맨 앞으로 나오고 악당이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려났었는데, '007 스펙터'도 마찬가지였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아주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그들이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리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형제 이야기'가 메인을 차지한 플롯을 내놓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러니까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가지고도 이런 스토리밖에 만들 수 없었나"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이런 스토리밖에 나올 수 없었다면 007 제작진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 웬 에드워드 스노든?
'007 스펙터' 악당의 또다른 큰 문제점은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사건을 자꾸 건드렸다는 점이다.
007 제작진이 소니 픽쳐스와 함께 에드워드 스노든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점은 이미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노든 이야기를 007 시리즈에 끼워넣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007 시리즈는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와 어울리지 않으며, 스펙터와 블로펠드도 그런 쪽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요새 벌어지는 스파이 스토리를 영화에 접목시키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007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현재 벌어지는 첩보전을 실감나게 담은 스파이 스릴러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007 스펙터'에서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를 건드린 것이 되레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007 시리즈는 휴먼 인텔리전스, 시그널 인텔리전스 등을 진지하게 논하기에 알맞은 영화 시리즈가 아니다. 007 시리즈를 보다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스파이 스릴러로 변화시키기 위해 007 제작진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는 방향이 크게 잘못됐다고 본다.
더군다나 아주 오랜만에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에 등장한 'Five Eyes'를 연상케 하는 'Nine Eyes' 타령을 하는 데 그친 것도 크게 실망스러웠다. 보다 시대에 맞고 실감나는 스파이 스토리를 선보이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Nine Eyes' 음모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스펙터를 현대적인 21세기 범죄집단으로 업데이트 하기 위해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를 빌려온 듯 했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음모치곤 매우 싱거웠다. 보다 현실감이 느껴지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e)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영화였다면 'Nine Eyes'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름 흥미롭게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007 시리즈에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시그널 인텔리전스 타령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항상 핵무기와 우주선 등을 훔치거나 생물학 테러를 계획하는 코믹북 수퍼빌런(Supervillain)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스펙터를 보다 리얼하고 사실적인 음모를 계획하는 범죄집단으로 묘사하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과거의 6070년대 007 제작진이 스펙터를 지나칠 정도로 코믹북 수퍼빌런 스타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 사실이므로 21세기 버전 스펙터를 보다 사실적인 범죄집단으로 묘사하는 게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스펙터를 시그널 인텔리전스와 연결시킨 건 절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스펙터를 보다 현대적이고 사실적인 범죄집단으로 묘사한 것까진 좋은데, 그 방향이 크게 잘못됐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만약 21세기 첩보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007 시리즈 제작진에 있었더라면?
스펙터를 시그널 인텔리전스와 연결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007 스펙터' 제작진에 더욱 실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악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스토리를 짜려면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에게 스토리를 맡기는 게 상책이다. 그쪽 바닥 이야기를 많이 읽고 듣고 써본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에게 맡겨야 시대에 맞고 사실적으로 들리는 보다 그럴싸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스파이 스릴러 전문이 아닌 작가에게 스크립트를 맡겼고, 그 결과가 '스카이폴'과 '스펙터'에 고스란히 담겼다. 007 시리즈가 본드의 과거사나 들추는 여성용 TV 드라마처럼 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007 제작진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부터 007 시리즈를 보다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 영화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했으나,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 영화에 어울릴 만한 스토리를 쓸 작가를 데려오지 않았다. 이 바람에 스파이 스릴러적인 요소가 줄어들고 본드의 개인사, 과거사를 놓고 쫑알대는 드라마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007 제작진이 존 르 카레 영화나 제이슨 본(Jason Bourne) 영화를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니까 겉으로야 그럴듯 하게 만들 수 있어도 텅 빈 알맹이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많은 돈을 쏟아부어 성형수술을 했어도 머리가 비었다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007 스펙터'에선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과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번엔 완전히 새로운 악당과 범죄집단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다시 007 시리즈에 사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다시 돌아온 만큼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가 아니더라도 거기에 알맞은 스토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따위 플롯을 짜는 데 그쳤다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007 시리즈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악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새로 소개하는 방법과 방향이 모두 틀렸다. 007 제작진이 쓸데없이 본드와 블로펠드를 형제 사이로 설정한 바람에 여기서 벗어나 새로 다시 리부트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21세기 버전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밀 그럴싸한 음모를 선보일 만한 소질이 없다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와서 나아진 건 없고 되레 골칫거리만 늘어난 셈이 됐다.
결론적으로, 007 시리즈 악당 문제는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귀환만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시리즈를 훤히 꿰뚫는 007 시리즈 전문가, 007 시리즈 제작에 여러 차례 참여한 007 시리즈 베테랑, 그럴듯 한 21세기 스파이 스릴러 스토리를 쓸 만한 소질을 갖춘 작가 등을 모두 갖추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가 다시 007 시리즈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2013년 007 제작진이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 전체를 넘겨받은 덕분이다. 그 이전까지는 50년대 중반부터 007 영화 시리즈 탄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의 소유였으나, 2013년 맥클로리 측이 007 제작진에 제임스 본드 관련 라이센스 일체를 넘겨주면서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법정분쟁이 막을 내렸다.
스펙터 라이센스를 넘겨받은 007 제작진은 시간을 길게 끌지 않았다. 007 제작진은 2014년 12월 '본드24'의 공식 제목이 다름아닌 '스펙터'라고 발표하면서, 한동안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스펙터가 바로 다음 번 제임스 본드 영화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007 시리즈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이 스펙터이고, 스펙터의 우두머리인 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Ernst Stavro Blofeld)가 007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악당인 만큼 전세계의 본드팬들은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귀환에 기대감을 보였다. 영화 제작에 기초로 삼을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모두 바닥난 이후부터 매 영화마다 새로운 악당을 소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온 007 제작진 또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매번 새로운 악당과 범죄조직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항상 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영화 제목까지 '스펙터'로 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007 제작진이 스펙터의 리턴에 포커스를 맞추려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렇게 해서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오피셜 007 시리즈에서 자취를 감췄던 스펙터가 44년만에 다시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
물론,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 블로펠드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가 등장했고,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Never Say Never Again)'에도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모두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유어 아이스 온리'의 휠체어를 탄 사나이는 블로펠드를 연상시키는 게 전부일 뿐 공식적으로는 블로펠드가 아니었으며,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은 EON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오피셜 007 시리즈에 속하지 않은 제임스 본드 영화였다. 따라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오피셜' 007 시리즈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2015년 개봉한 '007 스펙터'가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처음이다.
그렇다면 44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온 스펙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 제목부터 '스펙터'인 걸 보니 '스펙터 비긴스' 성격의 영화였을까?
007 시리즈로 오랜만에 돌아온 스펙터를 21세기 버전으로 새로 재탄생시키려 했으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스펙터를 21세기에 맞게 재탄생시키려 한 것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싶었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을 다시 영화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이 정도에 그쳤다는 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드와 블로펠드가 형제?
'007 스펙터' 악당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블로펠드를 본드의 과거사와 연결시킨 점이다.
본드와 블로펠드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부터 서로 알고지내던 '의붓형제' 사이로 설정하면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 한 것까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형제'는 너무 지나쳤다. 21세기 버전 블로펠드를 새로 소개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건으로 본드와 블로펠드가 서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정도면 충분했지,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뜯어고칠 필요는 없었다. 불과 10년 전에 개봉한 제임스 본드 영화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꼬맹이들이 많은데, 이제와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뜯어고쳐 둘의 사이를 형제 관계로 바꿔놓으면서 혼란만 더욱 가중시킨 꼴이 됐다. 007 시리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드와 블로펠드가 원작소설에서부터 원래 형제 사이였던 것으로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블로펠드가 아닌 또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본드의 형제이자 적으로 설정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다름아닌 블로펠드를 본드의 형제로 설정한 건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본드를 입양한 오버하우서 패밀리가 등장하는 것까진 괜찮았어도 본드와 함께 성장한 오버하우서의 아들이 블로펠드가 되는 것으로 설정한 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건 애니메 또는 코믹북에나 나옴 직한 내용이지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본드와 블로펠드를 형제 사이로 바꿔놓으면서 두 캐릭터의 관계를 불필요하게 혼란스럽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이야기가 '007 스펙터' 줄거리의 메인을 차지하면서 스펙터가 꾸미는 범죄음모는 뒤로 밀려났다. 지난 '스카이폴(Skyfall)'에서도 등장 캐릭터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맨 앞으로 나오고 악당이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려났었는데, '007 스펙터'도 마찬가지였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아주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그들이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리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형제 이야기'가 메인을 차지한 플롯을 내놓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러니까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가지고도 이런 스토리밖에 만들 수 없었나"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이런 스토리밖에 나올 수 없었다면 007 제작진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007 시리즈에 웬 에드워드 스노든?
'007 스펙터' 악당의 또다른 큰 문제점은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사건을 자꾸 건드렸다는 점이다.
007 제작진이 소니 픽쳐스와 함께 에드워드 스노든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점은 이미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노든 이야기를 007 시리즈에 끼워넣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007 시리즈는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와 어울리지 않으며, 스펙터와 블로펠드도 그런 쪽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요새 벌어지는 스파이 스토리를 영화에 접목시키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007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현재 벌어지는 첩보전을 실감나게 담은 스파이 스릴러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007 스펙터'에서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를 건드린 것이 되레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007 시리즈는 휴먼 인텔리전스, 시그널 인텔리전스 등을 진지하게 논하기에 알맞은 영화 시리즈가 아니다. 007 시리즈를 보다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스파이 스릴러로 변화시키기 위해 007 제작진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는 방향이 크게 잘못됐다고 본다.
더군다나 아주 오랜만에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에 등장한 'Five Eyes'를 연상케 하는 'Nine Eyes' 타령을 하는 데 그친 것도 크게 실망스러웠다. 보다 시대에 맞고 실감나는 스파이 스토리를 선보이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Nine Eyes' 음모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스펙터를 현대적인 21세기 범죄집단으로 업데이트 하기 위해 에드워드 스노든 스토리를 빌려온 듯 했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음모치곤 매우 싱거웠다. 보다 현실감이 느껴지는 존 르 카레(John Le Carre)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영화였다면 'Nine Eyes'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름 흥미롭게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007 시리즈에서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시그널 인텔리전스 타령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항상 핵무기와 우주선 등을 훔치거나 생물학 테러를 계획하는 코믹북 수퍼빌런(Supervillain)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스펙터를 보다 리얼하고 사실적인 음모를 계획하는 범죄집단으로 묘사하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과거의 6070년대 007 제작진이 스펙터를 지나칠 정도로 코믹북 수퍼빌런 스타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 사실이므로 21세기 버전 스펙터를 보다 사실적인 범죄집단으로 묘사하는 게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스펙터를 시그널 인텔리전스와 연결시킨 건 절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스펙터를 보다 현대적이고 사실적인 범죄집단으로 묘사한 것까진 좋은데, 그 방향이 크게 잘못됐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만약 21세기 첩보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007 시리즈 제작진에 있었더라면?
스펙터를 시그널 인텔리전스와 연결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007 스펙터' 제작진에 더욱 실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악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스토리를 짜려면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에게 스토리를 맡기는 게 상책이다. 그쪽 바닥 이야기를 많이 읽고 듣고 써본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에게 맡겨야 시대에 맞고 사실적으로 들리는 보다 그럴싸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스파이 스릴러 전문이 아닌 작가에게 스크립트를 맡겼고, 그 결과가 '스카이폴'과 '스펙터'에 고스란히 담겼다. 007 시리즈가 본드의 과거사나 들추는 여성용 TV 드라마처럼 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007 제작진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부터 007 시리즈를 보다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 영화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했으나,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 영화에 어울릴 만한 스토리를 쓸 작가를 데려오지 않았다. 이 바람에 스파이 스릴러적인 요소가 줄어들고 본드의 개인사, 과거사를 놓고 쫑알대는 드라마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007 제작진이 존 르 카레 영화나 제이슨 본(Jason Bourne) 영화를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니까 겉으로야 그럴듯 하게 만들 수 있어도 텅 빈 알맹이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많은 돈을 쏟아부어 성형수술을 했어도 머리가 비었다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007 스펙터'에선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과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번엔 완전히 새로운 악당과 범죄집단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다시 007 시리즈에 사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다시 돌아온 만큼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가 아니더라도 거기에 알맞은 스토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따위 플롯을 짜는 데 그쳤다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007 시리즈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악당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새로 소개하는 방법과 방향이 모두 틀렸다. 007 제작진이 쓸데없이 본드와 블로펠드를 형제 사이로 설정한 바람에 여기서 벗어나 새로 다시 리부트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21세기 버전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밀 그럴싸한 음모를 선보일 만한 소질이 없다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와서 나아진 건 없고 되레 골칫거리만 늘어난 셈이 됐다.
결론적으로, 007 시리즈 악당 문제는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귀환만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시리즈를 훤히 꿰뚫는 007 시리즈 전문가, 007 시리즈 제작에 여러 차례 참여한 007 시리즈 베테랑, 그럴듯 한 21세기 스파이 스릴러 스토리를 쓸 만한 소질을 갖춘 작가 등을 모두 갖추지 않는 한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