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를 보면서 '영화는 다 좋은데 본드걸 때문에 잡쳤다', '여배우는 괜찮은 데 캐릭터가 꽝이다', 또는 '캐릭터는 괜찮은데 미스캐스팅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그렇다. 하이라이트가 있으면 로우라이트도 있듯, 베스트 본드걸이 있으면 워스트 본드걸도 있다.
베스트 리딩 본드걸은 이전 포스팅에서 알아봤으니 이번엔 워스트 리딩 본드걸 11명을 한번 뽑아보기로 하자.
워스트 #11 - Tiffany (Diamonds Are Forever)
1971년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의 리딩 본드걸, 티파니 케이스는 어렸을 적부터 열렬한 본드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베스트로 꼽았던 본드걸이다. 스필버그는 미국 여배우, 질 세인트 존(Jill St. John)이 연기한 티파니 케이스가 이전 본드걸과는 달리 유머가 풍부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질 세인트 존의 본드걸 연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유머도 좋았다. 또한, 나름 독특한 본드걸인 것도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푼수형 수다장이 본드걸은 007 시리즈에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워스트 #10 - Octopussy (Octopussy)
영화에서는 '옥토퍼시'가 리딩 본드걸의 이름으로 나오지만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동명 숏스토리엔 옥토퍼시라는 여자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다. 영화 제작진은 '골드핑거(Goldfinger)'의 푸씨 갈로어(Pussy Galore)를 연상케 하는, 즉 이름에 'PUSSY'가 들어간 본드걸을 원했던 모양이다.
이름은 그런대로 재미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름을 'Octopussy'에서 'Oldpussy'로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드걸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는 것!
리딩 본드걸, 옥토퍼시를 연기한 스웨덴 여배우, 마우드 아담스(Maud Adams)는 로저 무어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인 1974년작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에도 서포팅 본드걸로 출연했던 배우다. 이미 1974년 영화에 본드걸로 출연했던 여배우가 1983년 영화에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또다시 출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스는 '옥토퍼시'의 리딩 본드걸을 맡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선 로저 무어(Roger Moore)가 당시 제임스 본드였으니 아줌마가 본드걸로 캐스팅된 것만 탓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워스트 #9 - Solitaire (Live and Let Die)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의 리딩 본드걸, 솔리테어는 캐릭터와 캐스팅 모두 실패작이다. 솔리테어 역을 맡은 영국 여배우, 제인 시모어(Jane Seymour)는 멋진 본드걸이 될 만한 조건을 갖췄지만 캐릭터, 솔리테어는 아니었다.
원작의 솔리테어는 순진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넘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영화의 솔리테어는 청순한 것까지는 좋은데 지나치게 미스테리한 캐릭터로 변질되었다.
원작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다.
'순결을 잃으면 카드로 미래를 보는 능력까지 잃는다'고?
워스트 #8 - Elektra (The World is not Enough)
본드걸로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던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러나 캐릭터와 스토리가 받쳐주지 못했다. 1981년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의 캐롤 부케(Carole Bouquet)를 연상시키는 청순하고 섹시한 본드걸을 마르소에 기대했지만, 그녀가 연기한 1999년작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의 리딩 본드걸 엘렉트라 킹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소피 마르소의 엘렉트라 킹은 본드걸로 완벽한 멋진 여배우를 (뒤늦게) 캐스팅해 놓고 제대로 말아먹은 케이스다.
워스트 #7 - Camille (Quantum of Solace)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리딩 본드걸, 카밀 역으로 우크라이나 여배우, 올가 쿠릴렌코(Olga Kurylenko)를 캐스팅한 것은 실수였다. 쿠릴렌코가 본드걸로 잘 어울릴 것 같은 여배우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쪽 쟝르의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리는 스타일의 배우는 피하는 게 나았다. 그녀가 본드걸을 맡으면 어떤 캐릭터가 나올 지 안봐도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무언가 색다르고 기억에 남을 만한 본드걸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워스트 #6 - Pam (Licence to Kill)
미국 여배우 캐리 로웰(Carey Lowell)이 맡은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의 리딩 본드걸, 팸 부비에이는 별다른 매력이 없는 컨트리 출신의 평범한 미국여성일 뿐이었다. '본드걸'이 아니라 '카우걸'에 더욱 잘 어울려 보였고, 숏컷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꾼 뒤에는 영락없는 톰보이처럼 보였다.
워스트 #5 - Mary (The Man with the Golden Gun)
'비키니 차림의 블론드 본드걸'이 007 시리즈로 돌아왔다. 1974년작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의 리딩 본드걸, 매리 굳나잇이 그 주인공이다. 문제는, '블론드'와 '비키니'를 제외하곤 남는 게 없는 본드걸이라는 것. 스웨덴 여배우 브릿 에클란드(Britt Ekland)가 연기한 매리 굳나잇은 본드걸이 아니라 로맨틱 코메디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맹한 얼굴의 블론드 여자 캐릭터처럼 보였다.
워스트 #4 - Stacy (A View to a Kill)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엔 '닥터노(Dr. No)'의 '야생녀' 허니 라이더를 연상케 하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본드걸이 등장했다. 바로 미국 여배우 타냐 로버츠(Tanya Roberts)다. 로버츠가 '닥터노'의 허니 라이더처럼 비키니 차림으로 카리브 해변을 뛰어다니는 본드걸을 맡았다면 제법 괜찮았을 듯 하다. 그러나 정장 차림으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뛰어다니는 '뷰투어킬'의 리딩 본드걸, 스테이시 서튼은 영 아니었다. 한마디로 볼 게 없었다. 포르노 배우를 연상시키는 로버츠의 섹시한 표정과 목소리로 텅 빈 듯 캐릭터를 커버하려 했지만 실패적이었다.
워스트 #3 - Holly (Moonraker)
1979년작 '문레이커(Moonraker)'는 "007 영화는 원래 이래야 한다"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로 양분된 평을 받는 영화다. 그러나 미국 여배우, 로이스 차일즈(Lois Chiles)가 연기한 리딩 본드걸, 홀리 굳헤드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엔 이견이 많지 않다.
워스트 #2 - Jinks (Die Another Day)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는 007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배우가 리딩 본드걸을 맡았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NSA 에이전트, 징크스 역을 맡았던 할리 베리(Halle Berry)다. 아시안 여배우가 두 차례나 리딩 본드걸을 맡는 동안 흑인 리딩 본드걸은 하나도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007 시리즈 40주년이 되어서야 기회가 왔다.
할리 베리는 매우 훌륭한 본드걸이 충분히 될 수 있을 만한 배우였다. 그러나 영화를 잘못 골랐다. 캐릭터도 잘못 골랐다. 왜 할리 베리와 같은 멋진 여배우에게 이토록 후질구레한 본드걸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할리 베리는 또 무엇에 홀려 이런 영화에 출연한 것일까? 물론 본드걸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크립트를 좀 찬찬히 읽어보고, '아 내가 이 역할을 맡으면 상당히 골때리겠구나' 하는 걸 머릿속에서 미리 그려보고 난 뒤에 결정을 했어야지, 이 양반아!
워스트 #1 - Wai Lin (Tomorrow Never Dies)
1997년작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는 1967년작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이후 30년만에 아시안 여배우가 리빙 본드걸로 출연한 영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양자경(Michelle Yeoh)를 택했을까?
그렇다고 배우 양자경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주먹질, 발길질이었다. 양자경이 맡은 '투모로 네버 다이스' 리딩 본드걸, 와이 린은 중국 무술영화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였다.
물론 매우 독특한 본드걸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렇게 발길질 잘 하는 본드걸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양자경이 연기한 와이 린은 가장 본드걸답지 않은 본드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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