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일 금요일

2010년 월드컵 최고(최악?)의 엔딩 "가나, 이렇게 지는 수도 있구나!"

"That's one of the cruelest exits I've ever seen to any country in World Cup history." - Ian Darke (ESPN)

우루과이와 가나의 2010년 월드컵 8강전 중계방송을 맡았던 ESPN 아나운서 이안 다크가 경기가 끝난 뒤 한 말이다.

경기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안 다크의 말에 한군데도 틀린 데가 없다는 걸 알 것이다. 경기 종료를 코앞에 두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쇼킹한 엔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반을 1대1 동점으로 마친 우루과이와 가나는 연장 전-후반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듯 했다. 연장 후반이 다 끝나갈 때 가나에 마지막 기회가 돌아갔다. 프리킥을 얻은 것이다. 만약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살 떨리는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려야 하는 만큼 가나는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든 골로 연결하고자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루과이 골키퍼는 마지막 기회를 살리려는 가나 선수들의 슛을 막느라 정신없었다.

바로 이 때 어이없는 사건이 터졌다. 골키퍼 위치에서 골문을 지키던 우루과이 공격수, 수아레즈가 가나의 슛을 손으로 쳐낸 것이다. 골키퍼도 아닌 선수가 골문을 지키면서 마치 골키퍼처럼 공을 쳐낸 것이다.



수아레즈가 공을 손으로 쳐내자 경기는 바로 중단되었고, 주심은 레드카드를 꺼내들더니 파울을 한 수아레즈를 퇴장시키고 가나의 패널티킥을 선언했다. 연장 후반전 종료를 코앞에 두고 거의 줏은 것이나 다름없는 득점기회가 가나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킥커로 나선 가나 선수가 골포스트를 맞힐 줄은 몰랐지?



어처구니 없을 때 나온 패널티킥 실축으로 가나는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릴 수밖에 없게 됐다. 연장 후반 종료 몇 초를 남기고 얻은 패널티킥을 실축한 가나가 바로 뒤돌아서서 패널티킥과 다를 바 없는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리게 된 것이다. 참 멍멍이같은(?) 시츄에이션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연장 후반에 패널티킥을 실축했던 바로 그 선수가 승부차기에서 가나의 첫 번째 킥커였다.

아무래도 또 실축했을 것 같다고?

아니다. 그 선수는 승부차기에선 실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축 몬스터'가 가나를 끝까지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번엔 다른 2명의 가나 선수들이 실수를 했으니까.

파이널 스코어는 우루과이 4, 가나 2.

이렇게 해서 우루과이는 브라질을 꺾은 네덜란드와 4강에서 맞붙게 됐고, 가나는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치고 보따리를 싸게 됐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그 상황에 수아레스가 골문 앞에서 핸드볼 파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왜?

수아레스가 퇴장을 당했지만 이래저래 경기가 다 끝난 상황이었으니 우루과이는 크게 손해볼 것이 없었고, 패널티킥을 내주긴 했어도 킥커의 실축 또는 골키퍼 선방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울까지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게 보기에 좋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점위기를 면하기 위해 파울을 범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미식축구에서 수비수가 엔드존에서 자신이 커버해야 할 리씨버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터치다운을 내줄 위기에 놓이면 파울인 줄 알면서도 파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파울을 당한 공격팀도 그 수비수가 실점을 막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엔드존에서 파울이 발생하면 1야드라인까지 전진해 네 차례의 공격기회가 주어지므로 '이번에 실패했으면 다음에 성공하면 된다'로 넘겨버린다. 미식축구의 엔드존/터치다운이 축구의 골대/패널티 박스와 마찬가지이므로, '엔드존 파울시 1야드부터 공격시작'을 '패널티 박스내 파울시 패널티킥'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미식축구에선 이렇게 실점위기를 막기위해 파울을 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축구에선 그렇지 않은 이유는 '레드카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득점기회를 파울로 막은 경우엔 퇴장을 당하기 때문이다. 미식축구에도 퇴장이 있지만 이런 것으로 퇴장당하는 일은 절대 없다. 심판에 대들거나 망나니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미식축구에선 경기중에 발생한 파울 때문에 퇴장당하지 않는다. 설령 퇴장당했다 해도 미식축구에선 팀 인원이 10명으로 줄어들지도 않는다. 축구에선 한 선수가 퇴장당하면 10명으로 싸워야 하지만, 미식축구는 퇴장당한 선수를 대신할 선수를 교체투입해 다시 11명을 채울 수 있게 되어있다. 축구에선 레드카드를 받은 팀은 바로 수적열세에 놓이지만 미식축구에선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아레스는 핸드볼 반칙을 범했다. 패널티킥과 레드카드를 받을 게 분명했지만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 상황에선 잃을 게 없었으므로 그렇게라도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8강전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수아레스는 네덜란드와의 4강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 때 그 상황에 다음 경기까지 걱정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가나에 패하면 이래저래 다음 경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장전도 후반까지 다 끝난 상태였으므로 그가 퇴장당하더라도 전력손실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극적인 파울을 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입장을 한 번 바꿔보자. 만약 그 때 그 순간 가나가 우루과이의 처지에 놓여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들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룹 라운드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8강전이 벌어지고 있다. 한 번 지면 바로 집에 가야 한다. 16강부턴 매경기가 결승이나 다름없는데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연장전 후반 마지막 위기상황에 레드카드를 받더라도 실점을 막고, 수비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벌려고 한 것에 크게 잘못된 게 있는 지 모르겠다.

만약 주심이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주심은 파울을 불고 수아레스를 퇴장시켰으며, 가나에 패널티킥도 줬다. 수아레스와 우루과이는 파울을 한 댓가를 치뤘고, 가나는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천금같은 기회를 골포스트에 맞히며 날려버린 건 가나 선수이지 수아레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나는 '배구선수' 수아레스의 핸드볼 파울에 불평할 게 없다. 수아레스가 손으로 쳐낸 골을 쉽게 만회할 기회가 다시 왔었는데도 이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아레스의 핸드볼 파울은 '스마트 플레이'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비록 수아레스가 퇴장당하고 패널티킥을 내줬지만, 가나 선수가 실축하는 바람에 승부차기까지 가서 우루과이가 이겼으니 계획했던 대로 모두 맞아떨어진 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운도 따라줬다. 가나 선수가 패널티킥을 성공시키느냐, 아니면 실축하느냐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50대50 갬블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반면 가나는 정 반대였다. 가나가 패널티킥을 실축하는 순간 승부차기에서도 이기기 힘들겠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패널티킥 실축으로 다 이겼던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왔는데 설마 여기까지와서 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패널티킥이 골포스트에 맞는 걸 보니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결국 가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해서 2010년 월드컵 '최고(최악?)의 엔딩'이 나왔다. 우루과이-가나전은 그리 재미있는 경기는 아니었으므로 '최고의 경기'는 아니었지만 엔딩 하나 만큼은 오래 기억될만 했다. ESPN 아나운서의 평대로 패널티킥 실축으로 연장전을 마치고 승부차기에서 패하는 가혹하면서도 드라마틱한 피니시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익사이팅했다. '저러다가 결국엔 승부차기 가겠지' 했는데 연장전 후반 종료를 몇 초 남겨두고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멍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가나 국민과 가나 팀을 응원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패배의 충격이 가시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맛에 스포츠를 보는 것 아니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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