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9일 토요일

'정사탈출'의 추억

나는 어렸을 적부터 제임스 본드 영화를 좋아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곤 묻지 마라. 나도 잘 모르니까.

그런데,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영화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쓴 소설이 있으며, 영화가 소설을 기초로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 소설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 손에 들어 온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은 '닥터노(Dr. No)'였다.

그런데, 평범한 소설책이 아니었다. 그림까지 곁들여진 어린이용 책이었다! 일부러 어린이용 책을 찾은 게 아닌데 이상하게도 처음 걸린 제임스 본드 책은 어린이용이었다.

그 당시엔 나도 어렸으니 제임스 본드 소설이 어린이용으로도 모두 나온 줄 알았다.

그러나, 어린이용 제임스 본드 소설은 '닥터노'까지가 전부였다. 그 이후에 구한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문레이커(Moonraker)'는 누렇게 색이 바랜 헌 책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양호한 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번 책이다.

교X문고에서 추리소설 섹션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언 플레밍의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런데, 제목이 영 낯설었다.

'정사탈출'?

그렇다. 우리 모두 다 좋아하는 바로 그 '정사(事)'가 제목에 들어가 있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 제목 중에 '정사'가 들어가는 게 있었는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가 아무래도 '정사'와 거리가 가장 가까워 보였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처음엔 제임스 본드 소설이 아닌 줄 알았다. 이언 플레밍이 썼다고 죄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훑어보니 '제임스 본드'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 소설이 맞는데...?

곧 낯익은 이름이 하나 더 눈에 띄었다: 타티아나.

타티아나라는 이름의 본드걸이 나오는 007 영화를 본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제목이 뭐였더라...?


▲'정사탈출(?)' 영화 포스터

그렇다.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이었다.

'위기일발' 소설판을 찾은 것이다!

아니 그런데 왜 제목이 '정사탈출'?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다면 걱정할 게 없지만 계산대를 통과해야 하는 서점에서 쬐그만 넘이 '정사탈출'이란 책을 들고 돌진해야만 하는 난감한 시츄에이션에 봉착!

기왕이면 점원이 '형님'이었으면 했는데 죄다 '누님'들이더라.

그렇다고 들고 튈 수도 없고...ㅠㅠ

성인인 지금도 서점에서 성인잡지 들고 계산대 앞에 서면 자꾸 머리가 근지러워지는 데 저 당시엔 미성년이었으니 오죽했겠수?

하지만, 용기를 냈다. 계산대만 통과하면 그만이다. '저기 정사탈출 녀석 지나간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계산만 하고 나면 점원들을 또 만날 일도 없으니 한번 팔리고 마는 거다.

시치미 뻑 따고 계산대에 '정사탈출'을 떡하니 올려놨다.

"어머머머머머~"

일이 안 풀리려니 점원 누님까지 협조를 안 하시더라.

"쬐그만 게 '정사탈출'이 뭐니? 너 '정사'가 뭔지나 알아?"

'왜, 한번 하실라우?' 라는 소리가 요오오오오오기까지 올라온 걸 삼키고 그저 씨익~


▲'정사탈출(?)' 영문 소설 커버

꽤 오래 전에 산 책이라서 지금은 문제의 '정사탈출'을 갖고있지 않다. 하지만, 어찌 내가 그 책을 잊을 수 있으리오~!

제임스 본드 소설에 요상한 제목을 달았던 출판사가 어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빌어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

"반성하십쇼!"

댓글 3개 :

  1. 저랑 같은 버전의 Dr. No를 읽으신 것 같네요.
    마지막 장면에서 허니 차일 라이더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속으로 '비뚤어진 코를 수술해주겠다'고 결심하면서 끝나죠.

    아마 같이 뭔가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봤습니다. ^^;;;

    전 다른 플레밍의 소설은 구할 수도 없더군요. 최근에 다시 나온 '카지노 로얄'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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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글로 된 플레밍 소설이 없어서...
    영문판을 샀다지요(카지노 로얄, 골드핑거, 닥터 노)....

    영어의 압박 땜시....

    요즘 골드핑거를 한 30페이지 읽고 그 다음부터는....

    책이 저를 피하는 건지..제가 책을 피하는 건지..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는 절대 안보네요.

    심지어 사무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3개월 동안 '대외 과시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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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 어린이용 '닥터노'를 읽은 분이 또 계셨군요!

    한국에선 생각보다 제임스 본드 관련제품을 찾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점에 가도 제임스 본드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꽤 크다는 서점들을 싹 쓸었지만 '정사탈출' 딱 하나가 전부...ㅡㅡ;

    '카지노 로얄', '문레이커'는 헌 책방을 쓸다가 찾았습니다. '제임스 본드 소설' 하면 '헌 책방'이 생각날 정도입니다...ㅋ

    근데 미국에 와서보니 어지간한 서점에서도 제임스 본드 소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샀죠. 제가 영문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도 미스터 본드 덕분입니다...ㅋ

    저도 첨엔 영문소설 읽느라 고생했는데요, 그래도 읽어 버릇 하니까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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