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0일 금요일

007 카지노 로얄

전투기부터 우주왕복선까지 조종할 줄 모르는게 없는 만능의 사나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면 절대로 패하는 일이 없는 말도 안될만큼 운 좋은 사나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 부시럭 부시럭 꺼내들고 조므락거리면 그자리에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사나이, 미녀들을 끼고다니면서 항상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를 마시는 사나이...

제임스 본드라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게 이런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는 영화에서 보아온 제임스 본드와 상당히 르다. 소설에서의 본드는 냉혈 킬러에 가깝다. 물론 보드카 마티니와 여자를 좋아하는건 비슷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배트맨이 울고갈만큼 특수장비로 무장한 수퍼액션 히어로는 아니다. 영화 시리즈가 제임스본드라는 캐릭터를 초인간적인 수퍼액션 히어로를 만들어놓은 것이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애초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2006년에 돌아온 제임스 본드는 다르다.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제임스 본드가 나타난 것이다. 2006년판 제임스 본드는 카지노에서 더이상 백전백승이 아니다. 적들을 해치울 땐 인정사정 없이 죽여버린다. 세련된 스파이가 아니라 킬러에 가깝다. 바텐더가 보드카 마티니를 '흔들어줄까 아니면 저어줄까(shaken or stirred?)'라고 물어보자 본드왈 '내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것처럼 보이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순간 웃음이 터져나오는걸 억제할 수 없었다. 반갑기까지 했다. 이제야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가 나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더욱 반가운 것은 '카지노 로얄'이라는 친숙한 제목이다.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이번 플레밍의 첫 번째 소설 제목 아닌가! '골든아이'까지는 이해한다. 자메이카에 있는 이언 플레밍의 별장 이름이 골든아이인만큼 브로스난의 첫 번째 007 영화 '골든아이'는 그럭저럭 낯선 제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Tomorrow Never Dies', "World Is Not Enough', 'Die Another Day'는 제목부터 귀에 거슬렸다. 주인공만 제임스 본드일뿐 007 영화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제목도 생소하고 줄거리도 생소하고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개성이 없어보였다. 브로스난이 제임스 본드역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브로스난은 '골든아이'에서 비교적 완벽한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기 때문이다(난 골든아이를 극장에서만 7차례 봤다. 처음 것은 개봉 전날밤에 하는 sneak preview였고 그 뒤로 1주일간은 거의 매일마다 보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영화들은 '대체 007 시리즈가 어디로 가는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만큼 궤도를 이탈해도 한참 이탈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007 팬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황당한 줄거리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스타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냐'는 불평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007 시리즈는 판타지쪽으로 쏠렸다가 다시 전통 스타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해왔던만큼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됐다는 것이다. 007 제작팀도 동의했는지 '카지노 로얄'이라는 구수한(?) 제목과 함께 특수장비를 99% 배제한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스타일로 되돌아갔다. 카지노 로얄엔 특수장비 담당인 Q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Q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만큼 'Q 마이너스 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카지노 로얄은 익사이팅하다. 특수장비를 사용해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없기 때문에 지지고 볶고 두들겨 패야만 얘기가 풀리게끔 됐으며 세련되고 여유가 넘치는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매우 거칠고 007이 아니라 칠칠이(?)로 보일만큼 실수 투성이기때문에 인간미가 느껴진다. 가끔가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맥없이 죽을 팔자가 카지노 로얄의 제임스 본드다.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완벽한 스파이였던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상당히 대조적인 것. 물론, 브로스난은 '고뇌하는 본드'의 모습을 보이며 나름대로 새로운 본드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본드의 내면을 보탰다는게 전부일뿐 '완벽맨 본드'인데엔 변함 없었다. 카지노 로얄의 대니얼 크레이그는 브로스난보다 훨씬 강한 변신을 시도했다. 어떻게 보면 사고뭉치로 보일만큼 덜 다듬어진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테러리스트가 날렵한 동작으로 작은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본드는 아예 벽을 까부수고 쫓아간다. 이전 영화에선 본드가 황비홍 버금가는 동작을 선보이며 도망가고 적들이(특히 죠스) 주변에 있는 것들 다 때려부수며 추격했지만 카지노 로얄에선 이것마저도 거꾸로인 것이다.

물론, 카지노 로얄이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영화로 옮긴만큼 제임스 본드가 엘리트 스파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생긴 '한번뿐의 변화'인지도 모른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다음 작품에서는 '만능맨 본드'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에서의 대니얼 크레이그를 봤을 때 차기작에서도 척하면 척되는 '도깨비 본드'까지는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최대 매력 포인트가 이전보다 상당히 평범해진 제임스 본드인데 007 영화 특성상 차기작에서 다시 무어/브로스난 시대로 돌아간다하더라도 100% 달라지긴 힘들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프로듀서 바바라 브로콜리가 대니얼 크레이그와 2~3편의 007 영화를 추가로 함께 할 계획이라고 한만큼 크레이그의 본드영화에선 카지노 로얄에서의 스타일 그대로 계속 밀고나갔으면 하는게 개인적인 바램이다. 버튼 하나 누르면 휘리릭 하고 해결되는 식의 허무맹랑한 007 영화들에 질릴대로 질렸기 때문이다. 21편의 007 영화들 중에서 이런 식의 영화가 거의 대부분이다. 007 시리즈도 오락영화인 것은 사실이지만 필요이상으로 가벼워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카지노 로얄은 다른 007 영화들에 비해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 마틴 캠벨 감독 스타일이 원래 이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한대로다. 마틴 캠벨의 첫 번째 007 영화 '골든아이'도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던건 마찬가지. 그런데 카지노 로얄은 골든아이보다 좀 더 심하다. 마틴 캠벨 스타일에 이언 플레밍의 원작까지 합세하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영화인만큼 플레밍 원작에서 아이디어 몇 개만 뽑아와서 나머지는 마음대로 만든 이전 007 시리즈들과는 줄거리 전개부터가 다르다. 원작에 충실하게 영화화됐던 OHMSS를 기억하는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을 보면서 제일 먼저 OHMSS가 떠올랐을 것이다. 비록 줄거리는 완전히 다르지만 '21세기 버전 OHMSS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지노 로얄의 줄거리는 '어쩌구 저쩌구하는 적의 계획이 드러나더니 막판에 본드가 다 때려부수며 끝나는' 식이 아니다. 뻔할 뻔자 순서를 밟지 않는 것. 이런 면에서는 OHMSS보다 카지노 로얄이 한술 더 뜬다.

OHMSS 다음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티모시 달튼의 '살인면허(Licence To Kill)'. 달튼은 살인면허가 취소된 민간인 신분의 본드를 연기했다. 제임스 본드가 M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행동을 한건 '살인면허'가 처음. 카지노 로얄에선 '살인면허'와 반대로 00 에이전트가 되는 과정의 본드가 나온다. 이 때문일까? 카지노 로얄은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는 유일한 007 영화다. 건배럴씬이란 위 사진의 장면을 말한다. 현재까지 나온 20편의 007 영화 모두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만 카지노 로얄은 아니다. 그렇다고 007 시리즈 트레이드마크인 건배럴씬이 없어진건 아니다. 다만 이전 영화들처럼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건배럴씬으로 시작하지 않은건 왠지 모르게 좀 섭섭하다. 아주 없어진건 아니므로 그나마 위안이 되긴 한다. 그러나 건배럴씬을 007 영화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00 에이전트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뭔가 색다르게 해보려고 노력하는건 알겠지만 '다이 어나더 데이'부터 자꾸 건배럴씬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건배럴씬은 제임스 본드 테마만큼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대로 내버려둬도 되는데 쓸데없이 건배럴씬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는 것 같다. 카지노 로얄에서 건배럴씬을 새롭게 사용한 아이디어는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아 보이지만 다음부턴 제발 그냥 내버려뒀으면 한다. 나와 같은 007매니아는 2~3년마다 극장에 가서 건배럴씬을 봐야 007영화 보는 맛이 난다. 그런데 카지노 로얄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 맛을 빼앗아갔다. '다이 어나더 데이'에선 쓸데없이 총알 날아가는 애니메이션을 추가시켜 눈쌀 찌푸리게 하더니 이번엔 건배럴씬의 위치를 바꿔? 그것도 썰렁하게 다른데도 아니고 화장실에서???(윗 사진 잘 보면 본드 뒤로 체크무늬가 보이는데 그게 바로 화장실 타일이다) 40년 넘는 전통의 건배럴씬을 토일렛씬으로 바꾸다니 정말 이러기냐! 다음번부턴 원상복귀 시켜주기 바란다.

소니의 광고도 눈쌀 찌푸리게 만들었다. 특수장비들이 등장하지 않는게 처음엔 마음에 들었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카지노 로얄에서 특수장비를 뺀 이유가 다른데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007 영화는 2시간짜리 상품광고나 다름없지만 카지노 로얄은 아예 까놓고 소니 전자제품으로 도배를 했다. 아무리 배급사가 소니 픽쳐스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니 바이오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 소니 에릭슨 핸드폰 등 닥치는대로 소니제품이 영화에 등장한다. 오죽했으면 외신으로부터 '폭발하는 바테리와 플레이스테이션3 발매지연 문제를007이 해결한다'는 소리를 들었겠는가. 영화를 보면 왜 이런 소리가 나왔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개인적으로 소니제품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노트북, 데스크탑,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TV, 게임기 등등 나도 소니제품 투성이다. 이제부턴 나도 길거리 나가서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하련다.


위 사진은 소니스타일 닷컴에서 판매중인 '제임스 본드 번들'이다. 영화 카지노 로얄에서 사용된 소니제품들을 모안놓은 것이다. "Gear up like Bond?' 장사하는 법도 가지가지라지만 이건 좀 보기 흉하다. 아무리 소니 픽쳐스 영화라지만 이런 식으로 소니제품만 대놓고 광고하는게 보기좋은가? 혼자있을 때 주머니에서 PSP 꺼내들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천하무적의 본드라지만 그렇게 구입하기 힘들다는 플레이스테이션3까지는 힘들었겠지 아마도?

소니제품뿐만 아니라 본드가 애용하는 오메가 시계도 컴백했다. 여주인공 베스퍼가 본드에게 '롤렉스냐'고 묻자 본드가 친절하게도 '오메가'라고 가르쳐준다. 최근들어 007 영화에서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다른 브랜드까지는 해오던대로 했다고 치지만 소니광고는 너무 속보였다. 아예 작심하고 달려든 것처럼 보였는데 소니 CEO가 영국인이라서 더 심하게 된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다른건 다 넘어간다고 해도 본드걸 베스퍼가 갑자기 소니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 장면은 거진 TV광고 수준이었다.

핏대 오른 김에 하는 말인데 카지노 로얄 주제곡도 썩 맘에 들지 않는다. 가수가 누구든 개의치 않는다. 왠지 모르게 007영화 주제곡은 60년대풍이어야만 한다는 공식이 생긴 것 같다. 마치 코나미가 60년대를 배경으로한 비디오게임 '메탈기어 솔리드 3'에 60년대풍의 '스네이크 이터(Snake Eater)'라는 주제곡을 넣어 사람 웃긴 것처럼 말이다(코나미는 E3에서 60년대라는걸 강조하기 위해 스네이크 이터 주제곡 CD를 일부러 레코드판 커버에 넣어 관람객들에게 나눠주기도). 메탈기어 솔리드 3는 그렇다쳐도 007 시리즈는 왜 60년대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카지노 로얄이라는 이언 플레밍의 고전을 영화화했기 때문에 음악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면 할말 없을지 모르겠지만 007 제작진은 21세기에도 어울리고 제임스 본드에도 어울리는 곡을 제발 찾아냈으면 한다. 크리스 코넬의 'You Know My Name'은 그럭저럭 고전 본드영화 분위기를 살리긴 했지만 매력이 없다. 물론 아하의 'Living Daylight'보다는 훨씬 훌륭하지만 아직도 007 영화 주제곡 스타일을 정하는데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폴 매카트니, 톰 존스, 셜리 배시, 낸시 시나트라에게 007 주제곡을 다시 한번 불러달라고 부탁하는게 나을 것 같다. 셜리 배시는 골드핑거,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문레이커 등 이미 3편의 007영화 주제곡을 불렀으니 기왕 이렇게 된거 4개 채우라고 해라.

제 6대 제임스 본드 얘기도 좀 해보자. 대니얼 크레이그가 금발이다 어쩌다 말이 많았지만 카지노 로얄을 보고나서 이야기했으면 한다. 나는 이미 그를 둘째라면 서러울만큼 훌륭한 제임스 본드로 인정했다.

브로스난의 첫 번째 007영화를 봤을 때엔 만족스럽지 못한 구석이 꽤 있었다. 본드의 내면을 연기하겠다면서 본드를 멜로 캐릭터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골든아이에서 본드가 바닷가에 혼자 앉아 고뇌하는 장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브로스난의 '멜로 본드' 접근은 나에겐 거부감만 생겼을 뿐이다. 브로스난이 이쪽이 아니라 다른쪽으로 브로스난만의 본드 캐릭터를 만들고자 했다면 문제가 덜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혼식 하자마자 신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OHMSS에서 슬픔에 빠진 본드를 연기해보고 싶다며 OHMSS를 리메이크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브로스난이 잡은 본드 이미지 방향이 내가 원하던 쪽과 거리가 있다는걸 알았다. 결국 브로스난은 로저 무어의 가볍고 쉽게 풀려가는 스타일에 멜로를 섞어놓는데 그치고 말았다. 숀 코네리는 두말하면 잔소리일정도로 최고의 007이고 로저 무어는 코네리 팬들이 싫어하긴 했지만 위트넘치는 본드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달튼은 2편밖에 못했지만 로저 무어로 가벼워졌던 007 시리즈에 다시 무게를 실어놓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브로스난도 무엇인가를 해야했으나 내가 볼 때 뚜렷한 개성이 있는 제임스 본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결정됐을 때 나 역시도 걱정했다. 도대체 이친구는 어떠한 이미지의 본드 캐릭터를 만들어나갈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로스난까지는 일단 얼굴만 봐도 감이 대충 잡혔지만 대니얼 크레이그는 좀 달랐다. 하지만 막상 카지노 로얄을 보고나니 큰 걱정을 하지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저 무어, 브로스난 등 능글능글한(?) 배우들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크레이그가 상대적으로 유머감각이 부족한건 사실인 것 같다. 잘못하다간 상당히 삭막해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크레이그가 이 부분만 조금 개선하면 숀 코네리 이후 처음으로 무자비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두 얼굴의 본드'가 드디어 탄생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코네리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은 무자비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추지 못한 배우들이었다. 본드팬들은 '로저 무어는 맨손격투씬도 거진 없을 정도로 쉽게 쉽게 풀어가는 만화 주인공 같은 본드'라고 평했다. 달튼은 너무 거칠었다는 평을 받았고 브로스난은 너무 부드러웠다는 평을 들었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오늘 카지노 로얄을 보고 대니얼 크레이그에서 숀 코네리의 '바로 그것'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줄거리가 잘 받쳐주면서 크레이그가 본드 캐릭터를 제대로 키워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대 '선배 본드들' 부럽지 않을만한 물건이 될 것처럼 보인다.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연기에 그만큼 반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얼굴이었지만 생각밖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수장비가 난무하는 판타지성 짙은 스타일의 007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카지노 로얄이 너무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려한 특수장비로 허접한 영화 줄거리를 커버하는 식의 007 영화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제값을 하지 못하는 영화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계속 이런 분위기로 나아가면서 잘못 인식된 제임스 본드 캐릭터 이미지도 고쳐나갔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다. 007영화만 알고 이언 플레밍의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배트맨과 비슷한 부류로 생각하지만 이언 플레밍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판타지 어드벤쳐로 흘러가는 007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결혼식 직후 아내를 잃은 본드가 암살범 블로펠드를 찾아내 목졸라 죽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영화에선 본드의 이러한 면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다. 로저 무어나 피어스 브로스난이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누군가를 목졸라 살해하는걸 상상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코네리는 가능했다. 무어는 'For Your Eyes Only'에서 단 한차례 보여줬다. 달튼은 'Licence To Kill'에서 친구의 복수를 위해 살인면허까지 반납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복수에만 전념했다. 이렇게 본드의 본성, 어두운 면들이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된 적은 손가락에 꼽힌다. 이러한 본드가 진정한 제임스 본드다. 제임스 본드가 만약 악인이었다면 얼마나 지독했을까 상상을 하게될만큼 본드의 또다른 면을 제대로 보여줘야 제대로 된 본드라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형사 가제트가 절대 아니다. 브로스난의 'World is Not Enough'를 보러갔을 때 이상하게 고등학생 애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007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싱긋 웃으며 '본드가 드니스 리차드(본드걸)를 따잡숫는걸(?) 보러 왔다'고 하더라. 본드영화가 이런 식으로 인식된건 잘못된 것이다. 본드걸도 중요하고 특수장비도 중요하다지만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이들에 묻혀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대니얼 크레이그가 하나씩 고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카지노 로얄 스타일로 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제일 걱정되는건 대니얼 크레이그가 아니라 스크린라이터들인데 차기작에선 스크린라이터들이 교체되는걸로 들었다. 카지노 로얄만 보고 안심할 수 없는 이유는 카지노 로얄은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상 스크린라이터들이 오리지날 스토리를 만들 때마다 생긴다. 사실 이언 플레밍이 남긴 원작들은 이미 밑천이 드러났으니 천상 오리지날 스토리가 필요한데 스크린라이터들이 삽을 줄기차게 드는게 가장 큰 문제. 이언 플레밍 이후에 나온 제임스 본드 소설들도 허접할뿐더러 영화 줄거리도 마찬가지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그만의 본드 스타일을 굳히는데 성공하려면 스크린라이터들의 도움이 절실한데 어찌될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 전체에서 탑5 안에 들 수 있을만한 작품이다. 점수를 준다면 A- 정도? 90년대 이후 나온 007영화들 중에선 카지노 로얄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카지노 로얄 이전까지는 '골든아이'가 90년대 이후 최고작이었으나 더이상 아니다. 카지노 로얄은 오랜만에 한번 더 보고싶은 007영화다. 아마도 한번 더 보게 될 듯. 한번이 될지 여러번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재미있는 007영화를 봤다는 생각뿐이다. 벌써부터 DVD 출시일을 기다리게 되고 본드22가 기대된다. '또 비슷비슷한게 나오겠지' 하던 생각에서 뭔가 새롭게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정말 기대된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