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0일 금요일

이언 플레밍도 거부하는 '안티 크레이그'

다니엘 크레이그가 피어스 브로스난 다음으로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됐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을 것이다. 그의 첫번째 본드영화 <카지노 로얄>이 개봉된지 한참 지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죽었다 깨도 다니엘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최고라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지적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조지는 것이 단순히 배우가 제임스 본드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결정된 이후부터 말이 참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블론드에 파란눈의 제임스 본드는 곤란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키가 너무 작다, 얼굴이 좀 모자란다는 것까지 대부분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크게 틀린 것이 없다. 블론드에 파란눈의 제임스 본드가 좀 어색한 것은 사실이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키가 이전 제임스 본드들에 비해 작은 것도 사실이다. 얼굴도 피어스 브로스난처럼 보이시한 '귀족형' 꽃미남이 아니다. 고급스러움보다는 터프함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일부는 악당으로 나오면 어울릴 얼굴이라고도 한다.

남자 주인공은 착하고 점잖고 지적이고 부드럽고 귀엽게 생긴 배우가 맡아야 한다면 할말 없다.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만든다면 당연히 주인공이 꽃미남이어야 할 것이다. 'Pretty boy'라고 불리는 꽃미남 배우들 말이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하이틴 영화 주인공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에로/로맨스 영화도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외모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이유는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이 보여줬던 플레이보이 이미지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여자들만 보면 눈썹 찡긋거리는 게 진짜 제임스 본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 크레이그에선 이런 맛이 없으니까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온갖 트집을 잡는 것이다.

대부분의 안티 크레이그들은 피어스 브로스난의 본드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피어스 브로스난 타령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어스 브로스난이 제임스 본드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라이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피어스 브로스난이 보여준 제임스 본드가 '정통' 제임스 본드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이다. 골수 본드팬들은 브로스난의 본드영화 중에서 <골든아이> 하나 빼곤 다들 쓰레기에 가깝다고 하지만 이들은 브로스난의 영화가 제대로 된 007 시리즈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브로스난의 마지막 본드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를 거진 불후의 명작 취급까지 한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그렇게 된 게 도대체 어떻게 맘에 들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왜 <다이 어나더 데이>처럼 만들지 않는거냐'고 심각하게 따져묻는 친구들을 누가 상대하고 싶어할까 생각해보라. 안티 크레이그들이 왕따가 된 이유 중 하나다.


2002년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자동차 배틀씬.

아무튼, 안티 크레이그들이 써놓은 리뷰를 잠깐 보기로 하자.

이들은 '카지노 로얄 보이콧 운동'을 했기 때문에 <카지노 로얄>을 극장에서 보지않고 DVD로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지노 로얄>은 전세계적으로 흥행성공했다. 원래 안티 크레이그들은 자기네들 공간에서만 떠들 뿐이지 이름있는 제임스 본드 커뮤니티에선 대개 왕따 당하는 팔자다.

안티 크레이그들도 <카지노 로얄>이 흥생성공한 것을 알고있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게 사실인 걸 이들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리뷰에 '카지노 로얄이 흥행성공 했으니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앞으로 여러 편 더 나올 것 같다'고 자포자기 한다.

하지만, 그래도 꼬투리는 잡아야 하겠던 모양이다. 다니엘 크레이그만 조져봤자 별 소용이 없다고 느꼈는지 이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꼬투리 잡기 식 영화평을 써내려가다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맘에 안든다고, 주연배우가 맘에 안든다고 원작소설까지 조지는 친구들은 보기 힘든 것 같지만 여기 있었다.

안티 크레이그들은 이언 플레밍의 소설 <카지노 로얄>은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라면서 그 이유로 DB5, Q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꼽았다. DB5는 '본드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아스톤 마틴 DB5를 의미하며, Q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특수장비를 제공하는 캐릭터를 말한다. 결국, 소설 <카지노 로얄>이 다른 007 영화에서 보던 것과 달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왜 소설 <카지노 로얄>에는 '본드카'도 없고 '특수장비'도 나오지 않냐는 것이다.

소설 <카지노 로얄>은 1953년에 나온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튼 하나 누르면 미사일이 나가는 '본드카'가 안나와서 기분 나쁘단 얘기? 소설에는 영화에서 보던 것들이 안나와 기분 조졌단 얘기?

1964년 영화 <골드핑거>에서 본드와 Q가 아스톤 마틴 DB5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안티 크레이그들의 무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소설의 분위기가 매우 어둡고 칙칙하며, 제임스 본드가 매우 거칠게 나오는 게 맘에 안든다고 한다. 게다가, 소설에서의 본드는 플레이보이가 아닌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여자를 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소설에서도 여자를 꽤 밝히는 것으로 나오긴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티나게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아닌데다 <카지노 로얄>에는 많은 여자 캐릭터들이 나오지 않으니까 이것도 불만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지도 않지만 위기에 처했다더라도 싱글싱글 웃으면서 총 한방 쏘고 우스겟 소리 한마디 하면 해결되는 영화 스타일에 익숙해져버린 이들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나오는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보고 쇼크먹은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자기네들도 '본드팬'이라고 하고 다닌다. 이것도 이들이 왕따 당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1989년 티모시 달튼 주연의 <라이센스 투 킬>부터 피어스 브로스난의 2002년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까지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서 제목이나 내용을 따온 것이 아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 중에 <라이센스 투 킬>, <골든아이>, <투모로 네버 다이스>, , <다이 어나더 데이>와 같은 건 없다. 이런 소설 자체가 없으니 영화 줄거리는 당연히 영화를 위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지 원작소설에서 옮겨온 게 아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있다.

영화 스크린플레이를 소설로 옮긴 것이다. <라이센스 투 킬> 이후에 나온 영화 줄거리는 이언 플레밍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용 줄거리'인데 이것을 다시 소설로 만들었다. 작업은 존 가드너, 레이몬드 벤슨 등 이언 플레밍 이후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써온 소설가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이런 '영화 소설'들에는 영화에 나온 특수장비 같은 것들이 그대로 다 나온다. 예를 들면, 소설 <다이 어나더 데이>엔 제임스 본드의 아스톤 마틴 Vanquish와 자오의 재규어 XKR이 미사일을 주고받는 장면까지 그대로 나온다. '본드카'와 '특수장비'들이 소설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안티 크레이그들이 이언 플레밍의 고전 제임스 본드 소설들은 읽지않고 영화를 소설로 옮겨놓은 것만 읽었다면 소설과 영화간에 차이가 없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들도 같은 제목의 영화와 내용이 완전히 똑같은줄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목만 같을뿐 내용은 천지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말이다. 꼭 영화를 소설로 옮긴 책들이 아니더라도 이언 플레밍이 아닌 존 가드너, 레이몬드 벤슨이 쓴 제임스 본드 소설만을 읽었더라도 혼란스러울 수 있다. 존 가드너, 레이몬드 벤슨의 제임스 본드 소설들은 이언 플레밍보다 영화 시리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익숙해졌다면 이언 플레밍의 소설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언 플레밍의 오리지날 소설들을 읽고나서 '제임스 본드 답지않다'는 괴상한 소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안티 크레이들의 얘기는 007 영화 시리즈에서 만들어진 'easy going' 스타일을 버리고 보다 심각한 분위기의 이언 플레밍 원작 스타일로 돌아가는 게 맘에 안든다는 것이다. 이언 플레밍 원작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가 오리지날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맘에 안든다는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캐스팅 된 것도 영화화 하기로 결정한 <카지노 로얄>의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은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은 갓 00 에이전트가 된 본드를 연기하기에 너무 늙었으니 천상 젊은 배우를 찾아야 했고, 그중 하나가 다니엘 크레이그였다. 결국, 왜 이언 플레밍 원작으로 돌아갔고, 왜 <카지노 로얄>을 영화화 하기로 결정했냐고 EON 프로덕션에게 따지는 것이 된다. 일부 안티 크레이그들은 007 시리즈 프로듀서, 마이클 G. 윌슨과 바바라 브로콜리를 비난하기도 한다.

만약,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닌 다른 배우가 제임스 본드로 발탁됐다면? 다른 배우가 <카지노 로얄>에서 제임스 본드역을 맡았다면?

왼쪽부터: 이완 맥그레거, 클라이브 오웬, 저레드 버틀러

다니엘 크레이그 이외로도 후보는 많았다. 이완 맥그레거, 클라이브 오웬, 저레드 버틀러 이외에도 휴 잭맨, 주드 로, 콜린 패럴 등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과 1983년생 배우까지 합한다면 더 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임스 본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배우들은 위의 세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셋 다 제임스 본드역을 거절했지만 이완 맥그레거는 EON 프로덕션이 마지막 순간까지 잡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됐든간에, 저들 중 하나가 다니엘 크레이그 대신 제임스 본드가 됐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언 플레밍의 원작 분위기에 가까워지는 것이 마음에 안드는데 얼굴만 바뀐다고 안티 크레이그들이 만족했겠냔 말이다. 아마도 안티 크레이그들은 '저들 중 하나로 제임스 본드를 바꾸고 <카지노 로얄>이 아니라 <다이 어나더 데이> 스타일로 만든다면 혹시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난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전제하에 배우를 교체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게 뻔하다. 새로운 배우도 피어스 브로스난과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배우가 될테니 말이다. 피어스 브로스난 스타일이란 버튼 하나 누르면 척하고 해결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카지노 로얄>에서의 제임스 본드라면?

2003년 영화 'I'll Sleep When I'm Dead'에서의 클라이브 오웬.

블론드에 파란눈, 키, 인물 문제는 해결될지 몰라도 '이언 프레밍의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는 데엔 변함이 없는데 안티 크레이그들이 가만있을까? 아니면, 안티 맥그레거, 안티 오웬, 안티 버틀러가 탄생했을까?

안티 크레이그는 사실 안티 이언 플레밍이 맞다. 골수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을 통해 아주 오랜만에 플레밍 원작의 맛이 되살아난 것을 반가워하지만 안티 크레이그들은 플레밍의 원작에 대해선 아는 게 없고 브로스난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만 알고있는데 이게 바뀐다니까 발광하는 것이다. 로저 무어가 그랬듯이, 피어스 브로스난이 그랬듯이 제임스 본드는 느긋하게 특수장비에 의존해가며 위기를 빠져나가는 게 제맛인데 느닷없이 웬 이언 플레밍 타령이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배우도 맘에 안들고 영화도 맘에 안들뿐만 아니라 플레밍의 <카지노 로얄> 소설도 맘에 안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지노 로얄>에 출연한다는 전제로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발탁됐다면 이들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니었더라도 공격했을 것이다. 가장 큰 불만은 배우가 아닌 다른 데 있으니 말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대가 지나고 나면 EON 프로덕션은 다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로 돌아갈 게 거의 분명하다. 이언 프레밍 스타일을 털고 다시 특수장비에 의존하는, '본드카'와 'Q'가 나오는 그런 스타일의 본드영화로 말이다. 이게 또 통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돌아가려는 시도 정도는 할 것 같다. 솔직히 난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는 게 맘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영화 나오면 보게 될 것이다. 그냥 그런줄 알고 본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가 항상 그래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이언 플레밍 스타일로 돌아올 것이다. 007 시리즈가 원래 그렇다니까!

그런데, 왜 안티 크레이그, 안티 <카지노 로얄>들은 원작에 가까운 영화는 눈뜨고 못보겠다는 식으로 나오는걸까? 누군 취향이 없어서 그냥 본다고 하나?

안티 크레이그는 안티 제임스 본드다. 자기들은 자칭 '본드팬'이라지만 멍멍이 립스틱 까는 소리다.

댓글 2개 :

  1. 좋은 해석입니다.
    007 소설도 약간 읽어보고, 영화도 몽땅 갖고 있는 (나름 골수팬인) 저로서는 가장 영화화를 잘 한 편으로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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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카지노 로얄'은 아주 오랜만에 원작냄새가 나서 좋았죠. 근데, 당장 내년에 나올 영화는 어찌될지 살짝 걱정이 됩니다.

    골수팬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자주 오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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