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영화배우 하비에르 바뎀(Javier Bardem)이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에 악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본드팬과 영화팬들은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범죄영화 '노 컨트리 포 올드맨(No Country for Old Men)'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바뎀이 007 시리즈에서 악역을 맡는다니 기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과연 하비에르 바뎀이 본드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스카이폴'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한다고 해도 절대 용서가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다 - 바로 '스토리'와 '악당'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 007 시리즈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스카이폴'의 악당 라울 실바는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악당이 아니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이해하려 노력해도 바뎀이 연기한 라울 실바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 머물렀어야 옳았지 007 시리즈에 나와서는 아니 되었던 캐릭터였다.
블론드로 머리 색을 바꾼 하비에르 바뎀의 어색한 모습에 적응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뎀이 연기한 실바가 007 시리즈 악당이 아닌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의 악당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점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도 수퍼히어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제임스 본드를 '턱시도가 유니폼인 수퍼히어로'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007 시리즈에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에나 나올 법한 악당이 나와도 되는 건 아니다. 007 시리즈는 그러한 수퍼히어로물과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여기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비에르 바뎀에게 코믹북 수퍼히어로 악당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맡긴 것이다. 최근 들어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를 기초로 한 영화들이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며 흥행에 성공하자 이것을 따라하기로 한 것이다.
인기와 유행도 좋고 청소년 팬 확보도 중요하다지만 007 시리즈와 제대로 어울리는지 부터 먼저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고 까놓고 밝혔다. "이번엔 우리도 흉내냈으니까 다크 나이트 팬들도 007을 좀 봐 달라"고 애걸한 셈이다.
007 시리즈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했는지 무능한 007 제작진에 묻고 싶다.
007 제작진이 '다크 나이트' 시리즈만 참고한 것도 아니다. 마블 코믹스의 수퍼히어로 영화 '어벤져스(The Avengers)'를 명백하게 모방한 씬이 바로 눈에 띈다.
(참고: 이 장면은 이미 스틸과 트레일러 등을 통해 미리 공개된 것이므로 스포일러라 판단하지 않는다.)
'스카이폴'엔 실바(하비에르 바뎀)가 감금되어있는 씬이 나온다. 실바는 감금된 상태에서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M(주디 덴치) 등과 대화를 나눈다.
이 씬은 '어벤져스'에서 로키(톰 히들스톤)가 감금되어있던 씬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어벤져스'를 먼저 본 관객들은 감금되어있던 실바가 어떻게 될지 뻔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벤져스'를 먼저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을 만했다.
이 정도로 '스카이폴'의 실바 감금 씬은 노골적인 수퍼히어로 영화 하미지(Homage)였을 뿐만 아니라 플롯도 뻔하고 매우 바보스러웠다.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007 제작진의 수퍼히어로 영화 베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실바가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수퍼히어로 영화 베끼기가 계속 됐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런던 지하철 씬이다.
(참고: 이 씬도 소니 픽쳐스가 영화 개봉 이전에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던 씬이므로 스포일러라 판단하지 않는다.)
실바(하비에르 바뎀)를 추격하던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런던의 지하에서 마주치게 된다. 본드가 실바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본드는 매우 위험한 실바를 사살하지 않고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실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더니 실바는 기다렸다는 듯 버튼을 눌러 폭탄을 터뜨린다. 그러나 폭발 이외로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자 본드가 여유를 되찾는데, 그 순간 폭발로 파괴된 벽을 허물고 지하철이 들이닥친다. 본드가 돌진하는 지하철을 허겁지겁 피하는 사이 실바는 유유히 도주한다.
과연 이것이 007 시리즈에 나올 만한 체이스 씬인가?
007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야 "그게 뭐 어떠냐" 하겠지만, 이것은 007 시리즈가 아닌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나 나옴 직한 체이스 씬이지 007 시리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씬이다.
'스카이폴'이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뎀이 연기한 라울 실바가 배트맨 시리즈에 나오는 악당, 조커를 연상케 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물론 지난 70년대에 제작된 로저 무어(Roger Moore)의 제임스 본드 영화들도 코믹북 스타일을 흉내낸 바 있다. 당시엔 항상 적들을 여유있게 무찌르는 '천하무적 007' 이미지,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옴 직한 가젯들(본드카 포함), 그리고 겉으로는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제임스 본드에 맥없이 당하는 헨치맨(죠스) 등 너무 유치하고 아동틱한 씬들이 문제의 '코믹북' 씬으로 지적됐다.
많은 본드팬들은 이처럼 가볍고 실없어 보이는 코믹북 스타일의 7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에 비판적이었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찬송하는 본드팬들은 "어둡다", "진지하다", "사실적이다"는 점들을 공통되게 장점으로 꼽고 있다. 70년대의 유치하고 능글맞은 '코믹북' 스타일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최대 장점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톤이 어둡고 진지하기만 하면 무조건 다 오케이였어?
물론 애써 정신나간 007 제작진을 변호하려면, "과거의바보스럽던 70년대 007 시리즈 하미지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수퍼히어로 영화를 따라한 것이지 과거 클래식 007 시리즈 하미지로 보이지 않는다. 007 시리즈에 등장해온 악당들은 냉혹한 킬러 아니면 코믹하고 바보스러운 헨치맨 둘 중 하나였지 '스카이폴'의 라울 실바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캐릭터는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 라울 실바가 지나치게 '필드형'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 등장한 악당들은 대부분 CEO 급의 보스형 악당들이었다. 스펙터(SPECTRE)의 블로펠드가 그랬고, 골드핑거, 스트롬버그, 드랙스, 크리스타토스, 카말 칸, 조린, 산체스, 트레빌리언, 카버, 그레이브스, 르쉬프, 도미닉 그린과 콴텀(Quantum) 등 거의 모든 007 악당들이 어지간해선 직접 현장에 나서지 않는 보스형이었다.
그러나 실바는 특이할 정도로 '필드형' 악당이었다. 그룹의 리더인 것까진 알겠으나 데스크에 앉아서 지시를 내리는 타잎이 아니라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서는 코만도 지휘관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비에르 바뎀이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은 '어벤져스'에서 로키(톰 히들스톤)가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던 모습과 겹쳐졌다.
자 그럼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악당이 필요한지 말이다.
하비에르 바뎀 출연이 확정되었을 때 본드팬들이 큰 기대를 했던 이유는 바뎀이 블로펠드 등을 연상시키는 점잖고 세련된 악당 역을 맡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 프랑스 배우 매튜 아말릭(Mathieu Amalric)에 기대를 걸었다 큰 실망을 했던 본드팬들은 하비에르 바뎀이 제대로 된 007 시리즈 악당을 연기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하비에르 바뎀이 '스카이폴'에서 맡은 라울 실바는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클리셰 천지의 캐릭터였을 뿐만 아니라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007 제작진은 하비에르 바뎀에게 제임스 본드 못지 않게 좋은 옷과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점잖은 멋쟁이 악당 캐릭터를 맡기지 않은 것일까? 요즘 세계가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만큼 때로는 본드의 동지인 듯 하면서도 때로는 적으로 보이는 알 수 없는 캐릭터를 바뎀에게 맡겼더라면 훨씬 007 시리즈에 어울렸을 것이다. 본드와 함께 턱시도를 입고 카지노에서 술을 마시며 갬블을 하다가도 마지막엔 서로 총구를 겨누게 되는 악당이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바뎀이 이러한 악당을 맡았더라면 진지한 톤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와도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 바뎀이 맡은 역은 개인적인 감정과 복수심에 사무친 스케일이 작은 싸이코가 전부였다. 악당 조직의 두목인지 부하 헨치맨인지 조차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마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범죄영화 또는 배트맨 시리즈 등과 같은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007 시리즈는 '개인적인 복수(Personal Vendetta)' 보다 '냉정한 비즈니스'를 중요시 하는 세계를 주로 보여줘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스카이폴'은 모든 게 라울 실바를 중심으로 한 사적인 복수극이 전부였다. 스토리가 사적인 방향으로 기울면서 스케일이 작아졌으며, 영화도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스카이폴'을 007 영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데 하비에르 바뎀의 실바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스카이폴'의 스토리가 그가 꾸미는 일종의 복수극이라는 데서 부터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하더니, 007 영화를 범죄영화나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모두 실바의 업적이다.
하지만 007 시리즈도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지 않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다르다", "새롭다"는 것이 무조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변화를 주긴 주되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변화라는 것이 무조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전통은 무조건 낡은 것이고 새롭게 바뀐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믿지만, 무엇이든 간에 한도를 넘어선 안 된다.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할 땐 하더라도 어울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무작정 시도해선 안 된다. 007 제작진이 이번 영화에 보다 색다른 악당을 선보이고자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라울 실바라는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도 않는 괴상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007 제작진이 요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어떻게 하면 007 시리즈의 틀을 깰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듯 한데, 이것은 올바른 변화로 가는 방법이 아니라 007 시리즈를 해치는 행위다. 그렇게 룰을 깨고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다른 영화를 만들면 될 것이지 왜 007 시리즈를 끌고 들어가는지 묻고 싶다. 그 아무도 007 제작진에게 007 시리즈만 계속 만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다. 007 시리즈 공동 프로듀서였던 해리 살츠맨(Harry Saltzman)은 007 시리즈와 함께 사이드 프로젝트로 제임스 본드와 성격이 다른 또다른 스파이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007 제작진도 007 시리즈와 성격이 다른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007 시리즈로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다.
그렇다면 하비에르 바뎀의 라울 실바가 007 시리즈 최악의 악당일까?
최악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바닥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007 시리즈 자체를 죽이기 위해 나타난 악당인 듯 하므로 가장 무시무시한 녀석이라고 해야 할 듯.
"KILL BOND! NOW!!"
과연 하비에르 바뎀이 본드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스카이폴'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한다고 해도 절대 용서가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다 - 바로 '스토리'와 '악당'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 007 시리즈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스카이폴'의 악당 라울 실바는 007 시리즈에 어울리는 악당이 아니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이해하려 노력해도 바뎀이 연기한 라울 실바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 머물렀어야 옳았지 007 시리즈에 나와서는 아니 되었던 캐릭터였다.
블론드로 머리 색을 바꾼 하비에르 바뎀의 어색한 모습에 적응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뎀이 연기한 실바가 007 시리즈 악당이 아닌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의 악당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점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도 수퍼히어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제임스 본드를 '턱시도가 유니폼인 수퍼히어로'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007 시리즈에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에나 나올 법한 악당이 나와도 되는 건 아니다. 007 시리즈는 그러한 수퍼히어로물과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여기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비에르 바뎀에게 코믹북 수퍼히어로 악당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맡긴 것이다. 최근 들어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를 기초로 한 영화들이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며 흥행에 성공하자 이것을 따라하기로 한 것이다.
인기와 유행도 좋고 청소년 팬 확보도 중요하다지만 007 시리즈와 제대로 어울리는지 부터 먼저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고 까놓고 밝혔다. "이번엔 우리도 흉내냈으니까 다크 나이트 팬들도 007을 좀 봐 달라"고 애걸한 셈이다.
007 시리즈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했는지 무능한 007 제작진에 묻고 싶다.
007 제작진이 '다크 나이트' 시리즈만 참고한 것도 아니다. 마블 코믹스의 수퍼히어로 영화 '어벤져스(The Avengers)'를 명백하게 모방한 씬이 바로 눈에 띈다.
(참고: 이 장면은 이미 스틸과 트레일러 등을 통해 미리 공개된 것이므로 스포일러라 판단하지 않는다.)
'스카이폴'엔 실바(하비에르 바뎀)가 감금되어있는 씬이 나온다. 실바는 감금된 상태에서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M(주디 덴치) 등과 대화를 나눈다.
이 씬은 '어벤져스'에서 로키(톰 히들스톤)가 감금되어있던 씬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어벤져스'를 먼저 본 관객들은 감금되어있던 실바가 어떻게 될지 뻔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벤져스'를 먼저 보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을 만했다.
이 정도로 '스카이폴'의 실바 감금 씬은 노골적인 수퍼히어로 영화 하미지(Homage)였을 뿐만 아니라 플롯도 뻔하고 매우 바보스러웠다.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007 제작진의 수퍼히어로 영화 베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실바가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수퍼히어로 영화 베끼기가 계속 됐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런던 지하철 씬이다.
(참고: 이 씬도 소니 픽쳐스가 영화 개봉 이전에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던 씬이므로 스포일러라 판단하지 않는다.)
실바(하비에르 바뎀)를 추격하던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런던의 지하에서 마주치게 된다. 본드가 실바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본드는 매우 위험한 실바를 사살하지 않고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실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더니 실바는 기다렸다는 듯 버튼을 눌러 폭탄을 터뜨린다. 그러나 폭발 이외로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자 본드가 여유를 되찾는데, 그 순간 폭발로 파괴된 벽을 허물고 지하철이 들이닥친다. 본드가 돌진하는 지하철을 허겁지겁 피하는 사이 실바는 유유히 도주한다.
과연 이것이 007 시리즈에 나올 만한 체이스 씬인가?
007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야 "그게 뭐 어떠냐" 하겠지만, 이것은 007 시리즈가 아닌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나 나옴 직한 체이스 씬이지 007 시리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씬이다.
'스카이폴'이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뎀이 연기한 라울 실바가 배트맨 시리즈에 나오는 악당, 조커를 연상케 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물론 지난 70년대에 제작된 로저 무어(Roger Moore)의 제임스 본드 영화들도 코믹북 스타일을 흉내낸 바 있다. 당시엔 항상 적들을 여유있게 무찌르는 '천하무적 007' 이미지,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옴 직한 가젯들(본드카 포함), 그리고 겉으로는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제임스 본드에 맥없이 당하는 헨치맨(죠스) 등 너무 유치하고 아동틱한 씬들이 문제의 '코믹북' 씬으로 지적됐다.
많은 본드팬들은 이처럼 가볍고 실없어 보이는 코믹북 스타일의 7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에 비판적이었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찬송하는 본드팬들은 "어둡다", "진지하다", "사실적이다"는 점들을 공통되게 장점으로 꼽고 있다. 70년대의 유치하고 능글맞은 '코믹북' 스타일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최대 장점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톤이 어둡고 진지하기만 하면 무조건 다 오케이였어?
물론 애써 정신나간 007 제작진을 변호하려면, "과거의바보스럽던 70년대 007 시리즈 하미지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에 유행하는 수퍼히어로 영화를 따라한 것이지 과거 클래식 007 시리즈 하미지로 보이지 않는다. 007 시리즈에 등장해온 악당들은 냉혹한 킬러 아니면 코믹하고 바보스러운 헨치맨 둘 중 하나였지 '스카이폴'의 라울 실바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캐릭터는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 라울 실바가 지나치게 '필드형'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 등장한 악당들은 대부분 CEO 급의 보스형 악당들이었다. 스펙터(SPECTRE)의 블로펠드가 그랬고, 골드핑거, 스트롬버그, 드랙스, 크리스타토스, 카말 칸, 조린, 산체스, 트레빌리언, 카버, 그레이브스, 르쉬프, 도미닉 그린과 콴텀(Quantum) 등 거의 모든 007 악당들이 어지간해선 직접 현장에 나서지 않는 보스형이었다.
그러나 실바는 특이할 정도로 '필드형' 악당이었다. 그룹의 리더인 것까진 알겠으나 데스크에 앉아서 지시를 내리는 타잎이 아니라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서는 코만도 지휘관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비에르 바뎀이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은 '어벤져스'에서 로키(톰 히들스톤)가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던 모습과 겹쳐졌다.
자 그럼 본드팬들에게 묻고 싶다 - 007 시리즈에 이런 악당이 필요한지 말이다.
하비에르 바뎀 출연이 확정되었을 때 본드팬들이 큰 기대를 했던 이유는 바뎀이 블로펠드 등을 연상시키는 점잖고 세련된 악당 역을 맡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 프랑스 배우 매튜 아말릭(Mathieu Amalric)에 기대를 걸었다 큰 실망을 했던 본드팬들은 하비에르 바뎀이 제대로 된 007 시리즈 악당을 연기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하비에르 바뎀이 '스카이폴'에서 맡은 라울 실바는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클리셰 천지의 캐릭터였을 뿐만 아니라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007 제작진은 하비에르 바뎀에게 제임스 본드 못지 않게 좋은 옷과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점잖은 멋쟁이 악당 캐릭터를 맡기지 않은 것일까? 요즘 세계가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만큼 때로는 본드의 동지인 듯 하면서도 때로는 적으로 보이는 알 수 없는 캐릭터를 바뎀에게 맡겼더라면 훨씬 007 시리즈에 어울렸을 것이다. 본드와 함께 턱시도를 입고 카지노에서 술을 마시며 갬블을 하다가도 마지막엔 서로 총구를 겨누게 되는 악당이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바뎀이 이러한 악당을 맡았더라면 진지한 톤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와도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비에르 바뎀이 맡은 역은 개인적인 감정과 복수심에 사무친 스케일이 작은 싸이코가 전부였다. 악당 조직의 두목인지 부하 헨치맨인지 조차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마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범죄영화 또는 배트맨 시리즈 등과 같은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007 시리즈는 '개인적인 복수(Personal Vendetta)' 보다 '냉정한 비즈니스'를 중요시 하는 세계를 주로 보여줘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스카이폴'은 모든 게 라울 실바를 중심으로 한 사적인 복수극이 전부였다. 스토리가 사적인 방향으로 기울면서 스케일이 작아졌으며, 영화도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스카이폴'을 007 영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데 하비에르 바뎀의 실바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스카이폴'의 스토리가 그가 꾸미는 일종의 복수극이라는 데서 부터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하더니, 007 영화를 범죄영화나 수퍼히어로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모두 실바의 업적이다.
하지만 007 시리즈도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볼 필요가 있지 않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다르다", "새롭다"는 것이 무조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변화를 주긴 주되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변화라는 것이 무조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전통은 무조건 낡은 것이고 새롭게 바뀐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믿지만, 무엇이든 간에 한도를 넘어선 안 된다.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할 땐 하더라도 어울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무작정 시도해선 안 된다. 007 제작진이 이번 영화에 보다 색다른 악당을 선보이고자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라울 실바라는 007 시리즈에 어울리지도 않는 괴상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007 제작진이 요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어떻게 하면 007 시리즈의 틀을 깰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듯 한데, 이것은 올바른 변화로 가는 방법이 아니라 007 시리즈를 해치는 행위다. 그렇게 룰을 깨고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다른 영화를 만들면 될 것이지 왜 007 시리즈를 끌고 들어가는지 묻고 싶다. 그 아무도 007 제작진에게 007 시리즈만 계속 만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다. 007 시리즈 공동 프로듀서였던 해리 살츠맨(Harry Saltzman)은 007 시리즈와 함께 사이드 프로젝트로 제임스 본드와 성격이 다른 또다른 스파이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007 제작진도 007 시리즈와 성격이 다른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007 시리즈로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다.
그렇다면 하비에르 바뎀의 라울 실바가 007 시리즈 최악의 악당일까?
최악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바닥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007 시리즈 자체를 죽이기 위해 나타난 악당인 듯 하므로 가장 무시무시한 녀석이라고 해야 할 듯.
"KILL BOND! NOW!!"
하비에르 바르뎀이 악당으로 선정되었다기에.
답글삭제아 노나없을 떠올리면서
007에도 야 이새끼 진짜 위험하고 나쁜놈이다. 싶은 악당이 등장하기를바랬는데...
사실 007같은 시리즈에서 악당이라면 동기는 그닥 중요하지않고
간지와 포스,분위기 아니면 한씬이라도 딱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거는 아무것도 없는 무색무취였네요. 나쁘진않지만 좋지도않은 그래서 오히려 안좋았던.
문제는 바뎀이 악당 보스냐 아니면 부하로 일하는 킬러냐는 점이었습니다.
답글삭제말씀하신 노 컨트리 포 올드맨(노나없?) 앤튼 쉬거를 007 시리즈로 옮겨놓으면,
부하로 일하는 킬러, 측 헨치맨에 가깝지 보스형 악당과는 거리가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스카이폴의 실바는 보스형 악당과 킬러 헨치맨의 이미지를 모두 갖춘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실제로는 보스지만 행동하는 건 헨치맨인 좀 어중간한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제 생각엔 제작진이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에 나옴직한 악당을 원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렇다 보니 캐릭터가 흐지부지 미적지근해진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뎀에게 과거 노나없처럼 BAD ASS 악당을 맡기려 했다면,
악당 조직구조를 좀 바꿨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언리미티드에서처럼 여자를 보스로 돌린다는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암튼 저도 바뎀의 악당 연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