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2일 목요일

'데블 메이 케어' - 본드, 잼없스 본드...

이언 플레밍(Ian Fleming)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임스 본드 소설이 나왔다.

영국 작가 세바스찬 펄크스(Sebastian Faulks)가 쓴 '데블 메이 케어(Devil May Care)'의 가장 큰 특징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그대로 계승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언 플레밍 탄생 100주년 기념작인 만큼 플레밍의 스타일을 되살리는 데 중점을 둔 것. 이언 플레밍 사후에 출간된 제임스 본드 소설 중에서 '가장 플레밍 다운 소설'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오호라! 드디어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소설이 나온 것일까?


▲'데블 메이 케어' 미국판 표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한번만으론 부족해 보인다.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데블 메이 케어'는 1/4 정도만 읽어도 한숨이 나오는 소설이다. 이언 플레밍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오마주(Homage)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한심한 소설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가 007 시리즈 4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지난 007 시리즈의 명장면들을 빌려왔던 것과 징그러울 만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언 플레밍 100주년 기념 소설을 오마주로 때웠다는 게 어이없긴 해도 여기까진 용서하고 넘어갈 준비가 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이언 플레밍의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맛이 느껴진다면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었다. 작가 세바스찬 펄크스는 이언 플레밍 소설과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의 차이점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언 플레밍이 영화에서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쓴 소설 같았다. 무엇이 '플레밍 스타일'이고 무엇이 '영화 스타일'인지 소설과 영화 시리즈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쓴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플레밍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간다고 해놓고 제임스 본드를 'One-Liner'라 불리는 한줄 짜리 농담을 입에 달고 다니는 가벼운 캐릭터로 묘사했을 리 없다.

작가가 플레밍 원작보다 영화 시리즈를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데블 메이 케어'가 이언 플레밍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책인 만큼 싫든 좋든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정확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 펄크스가 만들어 놓은 건 소설과 영화를 마구 뒤섞어 놓은 '짬뽕 메들리'일 뿐이었다. '플레밍의 작문 스타일까지 따라했다', '플레밍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소설과 이어지도록 했다'던 광고내용과는 천지차이였다.

캐릭터 부터 뒤죽박죽이다. '데블 메이 케어'의 제임스 본드는 피어스 브로스난의 영화판 제임스 본드를, 영국을 증오하는 고너(Gorner)라는 억만장자는 소설 '문레이커(Moonraker)'의 휴고 드랙스(Hugo Drax)를 각각 모델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한가지 확실한 건 작가가 '골드핑거(Goldfinger)'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흰색 턱시도를 입은 제임스 본드, 둥근 모자를 쓴 동양인 캐릭터, 돈을 걸고 스포츠 시합을 하는 도중 '사기'를 치고, 비행기 창문이 깨지면서 사람들이 빨려나가는 플롯 등은 '골드핑거'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수준이다. 모자를 쓴 동양인 캐릭터는 오드잡(Oddjob)에서 Chagrin으로, 내기 스포츠 종목은 골프에서 테니스로, 추락하는 비행기는 소형이 아닌 '다이 어나더 데이' 수준의 큰 비행기로 조금씩 바꿔서 생각하면 된다.

아, 물론 Chagrin이 뇌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신경을 다쳐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The World is Not Enough' everyone?

지난 일을 회상하는 방식을 이용해 플레밍의 소설과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도 눈물겹다. 본드가 기차를 탔을 땐 '타티아나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를 탔던 게 기억난다(From Russia With Love)'고 하고, 본드가 이란인 대리어스(Darius)을 만났을 땐 '케림 베이가 생각난다(From Ruissia With Love)'고 한다. 대리어스는 본드를 이란의 남녀혼탕으로 데리고 가면서 'You Only Live Twice'의 타나카 흉내까지 낸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과거에 대한 질문을 받은 본드는 '블로펠드와 트레이시가 어쩌구...' 하면서 'On Her Majesty's Secret Servive'를 회상한다. 이란에서 본드를 도와주는 캐릭터 하미드(Hamid)는 본드가 고너의 비밀 기지에서 봤다는 '날개 달린 배'를 '카스피안해의 괴물'이라고 한다. '닥터노'에서 쿼럴이 '닥터노의 섬에 용이 산다'고 했던 걸 빌려온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 소설 '카지노 로얄'과 'From Russia With Love'에 나왔던 캐릭터 매티스(Mathis)까지 데려왔더라.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흉내낼 자신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꼼꼼히 찾아보면 더 있겠지만 일단 이쯤에서 그만 하기로 하자.

자, 그렇다면 메인 스토리는?

'데블 메이 케어'의 줄거리는 고너가 영국과 소련간의 전쟁을 유도한다는 '투모로 네버 다이스', '다이 어나더 데이' 수준의 이야기다.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이유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소설의 향수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60년대판 '투모로 네버 다이스'를 만드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고안해 낸 아이디어가 고작 영국과 소련간의 핵전쟁이라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다.

다 좋다고 하자. 하지만, 고너가 런던을 파괴하고 싶을 정도로 영국을 싫어한다면 그가 왜 그렇게도 영국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에 대한 설명을 잔뜩 늘어놓는 척 하다가 나중에 가서 '전부 다 뻥이야'라는 식으로 허무하게 뭉그러뜨리는 센스를 보여준다. 이건 반전이 아니라 거진 희롱하는 수준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본드걸'도 흐지부지다. '데블 메이 케어'엔 스칼렛이란 이름의 본드걸이 나오지만 작가의 주먹구구식 스토리텔링에 맞춰 오락가락 하는 부자연스러운 여자 캐릭터일 뿐이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선 본드걸이 빠지면 안 된다, 본드와 본드걸이 함께 위험에 처하는 대목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정해진 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캐릭터로 보일 뿐 매력적이지도 않고 존재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코믹하게도 '데블 메이 케어'는 소설 속 여주인공 보다 소설 밖 커버모델에 더욱 눈길이 가는 소설이다. 영국판 표지엔 미국판과 달리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여자모델 Tuuli Shipster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커버걸'에 신경 쓸 시간에 소설 속 본드걸과 스토리를 보강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데블 메이 케어'는 알찬 내용보다는 이언 플레밍, 제임스 본드, 섹시한 여자모델을 내세워 책이나 많이 팔아보자고 만든 책인데 어쩌랴!


▲Tuuli Shipster(왼쪽), '데블 메이 케어' 영국판 표지(오른쪽)

뿐만 아니라, 읽으면 읽을 수록 스릴러 소설에 소질이 없는 작가가 쓴 소설처럼 보였다. 처음엔 '유치하다', '수준이 낮다' 정도였는데 가면 갈수록 횡설수설 하는 술주정 수준이 돼가는 게 아무리 봐도 베테랑 스릴러 작가 솜씨처럼 보이지 않았다. 'LARGER-THAN-LIFE' 어드벤쳐 스토리를 맛깔스럽게 만드는 요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작가였다면 마약밀매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어처구니 없는 전쟁 씨나리오로 둔갑하는 엉성한 스토리를 이토록 조리 없게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작가에게 제임스 본드 소설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바스찬 펄크스에게 이언 플레밍 100주년 기념 소설을 맡겼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스릴러 어드벤쳐 쟝르 자체에 소질이 없어 보이는 작가가 '플레밍 다운 제임스 본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세바스찬 펄크스의 '데블 메이 케어'를 끝까지 읽는 건 고문 수준에 가까웠다. 웃기지도 않은 미스테리와 반전, 어처구니 없는 캐릭터, 유치한 스토리, 말도 안 되는 플롯 등 완성도가 발바닥 수준인 소설을 마지막까지 참고 읽는 게 쉽지 않았다. 도중에 몇 번씩 내려놓고 싶은 걸 이겨내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냈을 때의 그 홀가분함이란!

'다이 어나더 데이'를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클래식 제임스 본드 소설'과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언 플레밍의 스타일을 계승했다'는 광고에 낚인 본드팬들은 성질 버리기 딱 알맞은 책이다. '완전히 속았다', '사기당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특히 'PURIST'들은 안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욕 밖에 안 나올 테니까...

댓글 2개 :

  1. 허걱... 번역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이미 질렀는뎅...
    말씀을 들어보니, 괜찮은 영화(소설이 아닌)의 줄기에 가장 부실했던 시나리오의 영화들 줄거리를 갖다붙인 스토리군요.

    안돼~~~~~!!!!!
    소설 속의 제임스 본드는 그렇지 않다능~

    어흑!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돈이 아깝다니...

    덧1. PURIST가 무슨 뜻인가요?
    소설 J.B.를 좋아하는 사람들인가요?

    덧2. 영어 소설을 잘 읽으시니 부럽습니다. 전 읽으려고 벌써 마음의 준비와 사전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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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 주문하셨군요.

    1/4을 넘기기 전에 싹수가 보입니다...ㅡㅡ;

    보아하니 작가가 10대 초반일 때 영화 '골드핑거'를 무지하게 감명깊게 본 모양입니다. 작가가 53년생이니까 대충 계산이 나오더라구요.

    암튼, 그래서인지 '골드핑거' 영향을 참 많이 받은 티가 나구요, 영화의 제임스 본드와 소설의 제임스 본드를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놨습니다. 순수한 '이언 플레밍 소설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는 아닙니다. 그 맛이 안 나더군요...ㅡㅡ; 역시 본드 소설은 플레밍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PURIST'는 변질되지 않은 오리지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요. 007 시리즈의 경우엔 변질되지 않은 플레밍의 클래식 소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당되죠.

    영어 소설은 읽어버릇 하다보니...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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