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제는 베드씬이다. 언제부터인가 베드씬은 007 시리즈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부분이 됐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서도 제임스 본드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오는만큼 영화에서도 미녀들과 멋진 시간을 보내는 씬이 빠질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그런데, 베드씬이 왜 문제냐고?
베드씬을 제임스 본드 테마와 건배럴씬 처럼 007 시리즈에 반드시 나와야 하는 '전통' 중 하나로 취급하면서 '본드와 본드걸이 흰 시트를 덮고 침대에 누워있는 전형적인 007 스타일 베드씬'을 억지로 끼워넣으려 한 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베드씬/러브씬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억지스럽고 유치해 보여도 '무조건 베드씬이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만든 영화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007 시리즈에 나온 거의 모든 베드씬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플레이보이 미남 에이전트 제임스 본드, 섹시한 본드걸, 로맨스, 에로틱, 센슈얼(Sensual), 기타 등등 모두 중요할 지 몰라도 억지로 베드씬으로 연결시키려 한 바람에 오히려 보기 흉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번 007 시리즈 베드씬을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가 1962년에 개봉했으니 60년대 영화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제임스 본드 시리즈 1탄 '닥터 노(Dr. No/1962)'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닥터 노'의 유일한 베드씬인 미스 타로와의 씬은 억지로 끼워넣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닥터 노'의 리딩 본드걸인 허니 라이더는 베드씬이 없었다. 비키니만 입고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본드 앞에 버티고 선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리라.
2탄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1963)'에도 베드씬은 빠지지 않았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임스 본드를 플레이보이로 만들기 위해 오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기일발'에선 호텔 방에서 타티아나와 본드가 만나는 장면에서 베드씬이 한차례 나온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만큼 문제될 게 없었다.
3탄 '골드핑거(Goldfinger/1964)'도 양호한 편에 속한다. 온갖 특수장치로 무장한 '본드카', 아스톤 마틴 DB5까지 나오는 등 영화 분위기가 전작보다 많이 가벼워졌지만 쓸데 없는 베드씬으로 영화를 유치하게 만들진 않았다.
'골드핑거'에도 베드씬이 딱 한 번 나온다. 그 유명한 '금칠 당한 시체씬'이 나오기 직전에 본드가 호텔에서 질 매스터슨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씬이다.
'골드핑거'의 리딩 본드걸인 푸씨 갈로어(Pussy Galore)는 이름은 죽여주지만 제임스 본드와 침대에 오르진 않는다. 어찌 보면 '이름값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름이 'Pussy'라고 꼭 침대에 올라야 한다는 법은 없으므로 패스!
베드씬이 조금씩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하는 건 4탄 '썬더볼(Thunderball/1965)'부터다.
'골드핑거'부터 패밀리 어드벤쳐 블록버스터 영화 성격이 짙어진 007 시리즈는 계속해서 볼거리 위주의 빅 스케일 어드벤쳐 영화로 변해갔다. 쉽게 말하자면 '갈수록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볼거리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관능미 넘치는 본드걸들과의 섹시한 씬인 만큼 베드씬의 수도 늘어났다.
첫 번째 'Steamy Scene'은 증기가 가득한 곳에서 벌어진다. 본드가 헬스 클리닉 간호사 패트리씨아와 증기 목욕실(Turkish Bath)로 들어가는 씬이다. "썬더볼'의 쓸데 없는 러브신/베드씬 1호다.
본드와 패트리씨아의 의미없는 로맨틱 씬은 욕실에서 침실로 이동해 계속된다.
하지만 '썬더볼'에서 제임스 본드와 함께 침대에 오르는 본드걸은 피오나 볼피(Fiona Volpe)라는 스펙터 에이전트다.
본드를 붙잡으러 온 게 목적이었던 만큼 구태여 베드씬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 베드씬 없이 본드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피오나 일당에게 붙잡혔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사이에 베드씬이 끼었다는 게 오히려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본드와 피오나의 베드씬은 그런대로 오케이다.
제임스 본드는 리딩 본드걸인 도미노와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이번엔 욕실, 침실이 아닌 해저라는 게 하이라이트.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썬더볼'의 쓸데 없는 베드씬/러브씬 2호다.
아무래도 60년대 클래식 영화라는 것을 잊어선 안될 듯.
5탄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1967)'도 전작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영화는 더욱 공상과학 영화에 가까워 졌고, 쓸데 없는 베드씬도 여러 차례 나온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베드씬 부터 문제다.
홍콩 에이전트 링(Ling)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침대에 오른 첫 번째 아시안 본드걸이 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씬이다. '007 시리즈엔 의미가 있든 없든 무조건 베드씬이 나온다'는 것을 영화관객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듯.
그런데, 쓸데 없는 베드씬을 끼어넣으려다 되레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제임스 본드의 사망을 거짓으로 꾸민 것인데 침대에 쓰러진 본드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본드가 피를 흘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씬이 나왔을 때만 해도 관객들은 본드가 실제로 총에 맞은 건지 아니면 짜고 한 건지 모르고 있었다(상식적으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총에 맞아 죽는 영화도 없겠지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짜고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럼 침대에 묻은 피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낳았다.
홍콩 에이전트 링이 그날따라 생리중이었다고는 제발 하지 마!!
영화 '두번 산다'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만큼 리딩 본드걸로 일본 에이전트 2명이 나온다. 아키(Aki와 키시(Kissy)다.
그러나, 본드와 키스를 주고받는 정도에서 그칠 뿐 적나라한 베드씬은 나오지 않는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제임스 본드와 위장결혼을 한 키시가 본드의 침대를 별도로 마련한 씬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번 산다'는 0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지 않은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워낙 많이 나오는 영화기 때문이다. '두번 산다'가 60년대 클래식이고, 허점 없는 완벽한 영화도 물론 없겠지만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너무 쉽게 눈에 띄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헬가와 본드의 만남이다. 스펙터 에이전트인 헬가는 처음엔 본드를 고문할 듯 칼을 들이댄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키스!
포르노도 이것보다는 그럴싸하게 연출할 것 같구만.
헬가는 본드의 손을 묶었던 끈을 끊어준다. 그러자, 칼을 넘겨받은 본드가 헬가의 드레스를 칼로 끊으면서 하는 말...
좋다. 제임스 본드가 워낙 매력만점이라서 '헬가닥' 했었다고 치자.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 것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비행기씬에서 헬가가 본드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헬가의 마음이 또 '헬가닥'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뒤죽박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헬가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 듯.
007 시리즈는 6탄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1969)'이 되어서야 다시 플레밍의 원작으로 되돌아갔다. 숀 코네리가 물러나고 조지 레젠비가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되었다는 큰 변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놓칠 수 없는 것은 '썬더볼', '두번 산다'의 공상과학 영화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시 이언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여황폐하의 007'에는 베드씬이 2차례 이상 나오지만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 만큼 쓸데 없는 베드씬은 없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리딩 본드걸 트레이시와 본드의 베드씬도 원작에 나온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본드걸 루비와의 베드씬도 원작에 나온다.
플레밍의 원작과 장소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드가 트레이시에게 청혼하는 것도 원작에 나온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본드와 트레이시의 결혼식 장면도 물론 원작에 나온다.
그렇다고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원작에 충실한 제임스 본드 영화엔 부자연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씬들이 많지 않는다는 정도는 짚고 넘어가자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70년대에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 영화는 어떨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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