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본드걸 후보로 이름이 가장 자주 오르내렸던 여배우를 한 명 꼽으라고 하면 미국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신이 좀 많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매우 섹시한 데다 액션영화까지 되는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신이 많은 게 왜 문제냐고?
내가 문신한 여자를 아주 싫어해서다.
하지만 내가 안젤리나 졸리가 본드걸이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졸리가 본드걸이 되면 그녀의 카리스마가 제임스 본드를 압도할 것 같아서 였다. 안젤리나 졸리는 이미 '툼 레이더(Tomb Raider)' 시리즈 등 액션영화에서 메인 캐릭터 역할을 맡은 바 있는 '리딩 우먼'인데 제임스 본드를 받쳐주는 본드걸 역으로 어울리겠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툼 레이더' 1탄에서 조연을 맡았던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의 뒤를 이어 제 6대 제임스 본드가 되었다는 점도 우연의 일치 치곤 묘해 보였다.
그러나 전세계 본드팬들은 브로스난의 뒤를 이을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확정되기 이전부터 안젤리나 졸리를 본드걸 0순위로 꼽곤 했다. 많은 본드팬들은 영국배우 클라이브 오웬(Clive Owen)이 제임스 본드가 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그와 함께 출연할 여배우로 안젤리나 졸리를 택하곤 했다.
아래 사진은 한 본드팬이 만든 가상의 제임스 본드 영화 포스터다.
그럼에도 '졸리 본드걸'이 걱정되었던 또다른 이유는 액션이 되는 본드걸을 더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의 본드걸 중 대부분이 액션이 되는 터프한 본드걸이었는데,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의 양자경,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의 할리 베리(Halle Barry) 캐릭터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본드걸이었는 지를 떠올려 보면 왜 이런 본드걸을 더이상 원하지 않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안젤리나 졸리가 본드걸이 되면 마치 라라 크로프트(Lara Croft)가 제임스 본드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졸리가 섹시하면서도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본드걸을 맡을 리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졸리더러 제임스 본드 역을 맡으라고 하면 모를까 본드걸로는 썩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졸리 본인도 이것을 잘 알고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배니티 페어(Vanity Fair)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007 시리즈 배급사였던 소니 픽쳐스의 회장, 에이미 패스칼(Amy Pascal)이 본드걸 역할을 제의했으나 "본드걸엔 관심없고 제임스 본드를 맡고 싶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본드걸 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얼마 지나 패스칼이 "마땅한 영화를 찾은 것 같다"며 다시 연락했다고 한다.
그 영화가 바로 '살트(Salt)' 였다.
'살트'는 메인 캐릭터를 맡을 예정이었던 톰 크루즈(Tom Cruise)가 영화를 떠나면서 소니 픽쳐스의 '여자판 제임스 본드' 프로젝트로 바뀐 영화다. 안젤리나 졸리를 캐스팅해 '여자판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탄생시킨 뒤 그녀를 중심으로 한 액션 프랜챠이스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니 픽쳐스의 '여자판 제임스 본드 만들기'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정답은 'NO'다.
메인 캐릭터, 에블린 살트(안젤리나 졸리)의 출생, 가족관계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스파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자판 제임스 본드와 같은 쿨한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인 것만은 사실이다. 여러 곳에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오마쥬가 눈에 띈 것 또한 사실이다. 본드팬이라면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하는 파트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니 픽쳐스가 두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로 재미를 본 회사라서 인지 제임스 본드 오마쥬도 그럴싸한 부분에 사용했더라. 북한과의 포로교환('다이 어나더 데이'), 칼날이 숨겨져 있는 구두('위기일발') 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졸리의 에블린 살트가 갈수록 코믹북 캐릭터에 가까워졌다는 데 있었다. 쿨한 캐릭터를 만들고자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와 같은 스타일리쉬한 캐릭터가 아니라 코믹북 수퍼히어로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다. 갈수록 에블린 살트가 코믹북을 기초로 했던 유니버설의 2008년 영화 '원티드(Wanted)'에서 졸리가 맡았던 캐릭터, 폭스와 비슷해지는 것 같았다. 점점 '제임스 본드 스타일리쉬'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캐릭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든 건 스토리 였다. '살트'의 스토리는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다. 물론, 액션 먼저-스토리 나중의 여름철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에블린 살트를 여자판 제임스 본드와 같은 굵직한 캐릭터로 만들고자 했다면 스토리에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썼어야만 했다. 그러나 CIA, 러시안 에이전트, 대통령 암살이 어쩌구 하는 지극히도 평범한 스토리라인이 전부였다. 제작진이 메인 캐릭터 부분을 업그레이드시킨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를 구상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론 '소니 픽쳐스의 스파이/테러리즘 테마의 액션 스릴러 영화는 여기까지가 한계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캐릭터에 신경을 좀 쓴 것을 제외하곤 '밴티지 포인트'에서 발전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전은 고사하고 되레 퇴보했더라.
그래도 안젤리나 졸리는 볼만 하지 않았냐고?
'예쁘다', '귀엽다가 아니라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는 많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안젤리나 졸리다. 이 친구가 그냥 서 있는 것만 봐도 'Fucking Cool'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지간한 남자배우들보다도 터프하고 쿨해 보이는 친구가 바로 안젤리나 졸리다.
그래서 였는지, 왼손잡이인 졸리가 양손을 번갈아가며 핸드건을 사용해도 그려려니 싶었다. '툼 레이더'에선 쌍권총을 들고 다녔는데 '살트'에선 Glock은 왼손으로, Beretta는 오른손으로 쏜다고 해서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핸드건을 발로 쏴도 이 친구가 하면 멋졌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지 않았다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찜통더위를 뚫고 영화관으로 달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최고인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큰 기대를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이보다는 나은 퀄리티를 기대했었다. 주연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 뿐만 아니라 스파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리예브 슈라이버(Liev Schreiber), 'Patriot Games', 'Clear and Present Danger' 등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주연의 톰 클랜시(Tom Clancy) 스릴러 영화를 연출했던 필립 노이스(Phillip Noyce) 감독 등이 참여한 만큼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살트'는 코믹북 수준의 캐릭터와 흔해빠진 유치한 줄거리가 영화를 말아먹고 말았다. 제작진이 공을 들인 캐릭터도 갈수록 시시한 캐릭터가 되어갔고,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어설프게 모방한 듯한 'Larger-Than-Life' 스토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관심밖이었다.
안젤리나 졸리가 액션영화에 잘 어울리는 몇 안 되는 헐리우드 여배우라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액션영화는 다들 재미가 없다. 영화 제작진들이 졸리의 존재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일까?
소니 픽쳐스의 '살트'는 캐릭터 중심의 새로운 액션 프랜챠이스를 성공적으로 탄생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최근들어 헐리우드가 그쪽에 매달리고 있는 데도 괄목할 만한 아이콘급 오리지날 영화 캐릭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여자판 제임스 본드'라면서 만든 게 이 모양이니 말 다 한 셈인지도 모른다. 스토리고 뭐고 다 제쳐놓고 안젤리나 졸리의 캐릭터에만 올인했는 데도 이 모양이었으니 헐리우드가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에 버금가는 새로운 AA급 오리지날 영화 캐릭터를 탄생시킬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트' 속편이 나올 확률은 제법 높아 보인다. 이번 영화가 사실상 프리퀄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속편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니 픽쳐스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같은 캐릭터 중심의 인기 액션 시리즈를 노리고 만든 영화인 만큼 어찌되든 에블린 살트가 속편으로 돌아와야 말이 될 것 같다.
물론 흥행 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액션영화라는 점, 6월말 미국에서 발생했던 러시안 스파이 사건 덕에 많은 사람들이 스파이 영화에 흥미를 갖게되었다는 점 등 흥행성공에 유리한 점들을 갖추고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성공은 힘들더라도 참패는 면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니 픽쳐스는 북미보다 인터내셔널 시장에서 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속편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탄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어야 하는데 '살트'는 캐릭터부터 시작해서 그 어느 것도 이룬 게 없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함없이 속편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해도 여전히 별 기대가 안 된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예로 들어 보자. 본드팬들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팬이지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영화배우들의 팬이 아니다. 영화배우들은 그저 돈을 받고 카메라 앞에서 제임스 본드 시늉을 한 게 전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살트'에선 안젤리나 졸리(영화배우)를 빼면 에블린 살트(캐릭터)는 껍데기일 뿐이다. 흥미로운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트'는 원작이 없어서 제임스 본드,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처럼 원작 팬들의 서포트도 기대할 수 없다. 소설, 코믹북, 비디오게임 등 원작을 기초로 한 경우엔 원작 팬들이 큰 지원군이 되곤 하지만 에블린 살트에겐 이들 마저도 없다.
그래서 인지, 그녀의 앞날이 험난해 보인다.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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