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트루 그릿' - 원작소설, 오리지날, 그리고 리메이크

나는 시대극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수 십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아도, 수 백년 전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컨템프러리 세팅의 영화를 좋아하지, 과거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제법 즐겨 보는 시대극 쟝르가 하나 있다. 바로 웨스턴이다.

내가 웨스턴을 즐겨 보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부전자전'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내가 영화에 재미를 붙였을 때는 이미 웨스턴 쟝르가 한물 간 이후였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웨스턴 영화를 본 기억은 거의 없지만('실버라도(Silverado)'가 그 중 하나다), TV에서 클래식 서부영화를 해줄 때 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함께 보곤 했던 게 기억난다.

지난 90년대였던가? 헐리우드가 웨스턴 쟝르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는 지는 모르겠어도, '영 건 2(Young Guns 2)', '언포기븐(Unforgiven)',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 '툼스톤(Tombstone)' 등 꽤 여러 편의 웨스턴이 개봉했었다. 2000년대에도 '3:10 투 유마(3:10 to Yuma)', '아팔루사(Appaloosa)' 등이 있었다.

2000년대에 개봉한 웨스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하나 있다면, 콘템프러리 웨스턴 '노 컨트리 포 올드 맨(No Country for Old Men)'이 될 것이다.

그런데 '노 컨트리 포 올드맨'을 만든 코엔 형제(Coen Brothers)가 클래식 웨스턴 '트루 그릿(True Grit)'을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존 웨인(John Wayne)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겼던 바로 그 영화를 코엔 형제가 리메이크한다는 것이었다.

'트루 그릿'은 미국 작가 찰스 포티스(Charles Portis)의 동명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인디안 거주지역으로 도주한 부랑자를 체포하기 위해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난 보안관을 고용한 14세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존 웨인 주연의 '트루 그릿'은 이미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는 친숙한 영화이며, DVD로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찰스 포티스의 원작소설은 읽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내가 웨스턴 소설을 읽은 적이 있긴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렸을 적에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의 'O.K 목장의 결투'에 관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파치 리더 제로니모(Geronimo)에 대한 책도 읽었던 것 같다.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아무래도 빼야겠지?

최근엔 콘템프러리 웨스턴 영화 '노 컨트리 포 올드 맨'을 보고 코맥 매커시(Cormac McCarthy)의 원작소설을 찾아서 읽은 적이 있다.

아무튼, 기억을 쥐어짜 보니 웨스턴 쟝르에 해당되는 책들을 더러 읽은 것 같긴 하지만, '즐겨 읽었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트루 그릿' 리메이크가 곧 개봉한다니 책으로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두껍지 않은 책이라서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한 번 읽어봐야겠지?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약간 뜻밖이었던 것은,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소설 '트루 그릿'은 중년여성 매티 로스가 자신이 14세였을 때 아버지를 죽인 부랑자 톰 체이니를 잡기 위해 모험에 나섰던 일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시점 소설이었다. 존 웨인 주연의 1969년 영화에서도 14세 소녀 매티 로스가 메인 캐릭터였지만, 원작이 그녀의 눈을 통해서 본 1인칭 시점 소설일 줄은 몰랐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톰 체이니를 잡기 위해 매티가 고용한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과 텍사스에서부터 체이니의 뒤를 추적해온 텍사스 레인저 라비프, 그리고 루스터와 라비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위험한 체포작전에 따라붙은 14세 소녀 매티 로스 세 명이 '체이니 사냥'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걱정되었던 건, 컨템프러리 소설만 즐겨 읽는 내가 아주 오랜 만에 집어 든 웨스턴 소설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걱정할 게 없었다. 책은 얇았고, 줄거리는 단순명료했으며, 전개는 시원시원했던 덕분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루하다는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의외로 유머도 풍부했다. 2명의 터프가이가 14세 소녀와 함께 범죄자를 잡으러 나섰다는 상황부터 코믹했을 뿐만 아니라 셋이 모였다 하면 옥신각신하며 싸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존 웨인 주연의 1969년 영화에도 코믹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책을 읽어 보니 원작에서부터 유머가 풍부한 결과였다.

또한, '잘난 딸 하나가 열 아들 안 부럽다'는 주제(?)도 와 닿았다. '나 같은 아들을 두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아들보다 딸을 좋아한다. 아들이 한 번 빗나가기 시작하면 얼마나 험악(?)해지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도 아들보다 딸을 더 좋아하는 1이다.

자, 그렇다면 존 웨인의 1969년 영화와 원작소설은 얼마나 비슷할까?

소설을 읽고 나니 시작과 마지막을 파트를 제외하면 원작에 매우 충실하게 만든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비교해 보니 못해도 90% 이상은 원작소설과 일치하는 듯 했다.

존 웨인은 어떤 역할을 맡았냐고?

애꾸눈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 역을 맡았다. 텍사스 레인저 라비프(La Boeuf이지만 원작과 영화에서 모두 자신 이름을 '라비프'로 발음하는 것으로 나온다) 역은 컨트리 가수 글렌 캠벨(Glen Campbell), 매티 로스 역은 킴 다비(Kim Darby)가 맡았다. 이밖에도, 악당 역으로 로버트 듀발(Robert Duvall),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데니스 하퍼(Dennis Hopper) 등도 출연했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의 2010년 리메이크는 어땠을까?

책까지 사서 읽으며 예습(?)까지 한 걸 보니 개봉 첫 날 가서 봤을 것 같지 않수?

2010년 리메이크에선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가 루스터, 맷 데이먼(Matt Damon)이 라비프, 헤일리 스타인필드(Hailee Steinfield)가 매티, 그리고 죠시 브롤린(Josh Brolin)이 톰 체이니 역을 맡았다.



하지만 2010년 리메이크는 1969년 오리지날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영화는 아니다. 시작과 마지막은 원작소설과 일치했으나 영화의 중간 부분에서 메이저 급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오리지날과 같았지만 몇 가지 설정을 바꿔놓은 게 눈에 띄었다. 원작소설과 대충 비교해보면 대략 70% 정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원작과 약간의 차이가 난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원작소설과 얼마나 일치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존 웨인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겼던 1969년 오리지날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라도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는 지도 모른다. 또한, 오리지날 영화의 다소 어색했던 부분들을 수정하면서 완성도를 높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과의 차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루스터, 라비프, 매티 세 명이 항상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작소설과 1969년 오리지날 영화에선 세 명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함께 이동했는데, 2010년 리메이크에선 3인1조가 자주 깨지곤 했다. 제작진은 세 명의 파티멤버가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하도록 변화를 주면서 스토리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보고자 한 것 같았다. 하지만 '트루 그릿'의 재미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세 명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데, 여기에 변화를 준 것이 과연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궁금했다.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든 건 음악이었다.

서부영화에 웬 찬송가?

웨스턴 영화음악은 독특한 면이 있으며, 클래식 서부영화 주제곡 중에도 유명한 히트곡들이 많다. 서부영화의 흥을 돋구는데 음악이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트루 그릿'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전부 교회음악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서부영화와 찬송가가 서로 매치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지 음악이 나올 때 마다 영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부영화에 잘 어울리는 멋지고 파워풀한 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찬송가 스타일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관 내 분위기를 살펴봤더니, 나만 음악이 이상하게 들렸던 게 아닌 것 같았다. 엔드 타이틀로 아리이스 드멘트(Iris DeMent)가 부른 '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가 흐르자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부영화 엔드 타이틀 곡으로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게 들렸던 게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영화 내내 이런 풍의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는데, 마지막엔 보컬까지 곁들인 노래가 나오자 웃음을 터뜨린 듯 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래가 서부영화와 어울리는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


또 한가지 어색했던 건 출연배우들의 남부 액센트였다. 어찌된 게 모두들 치과에 다녀온 뒤 마취가 안 풀린 듯 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입에 무언가를 문 채로 중얼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인공 루스터 역을 맡은 제프 브리지스의 말투는 존 웨인이 아니라 존 매든(John Madden)과 비슷했고, 텍산으로 변신한 메사츠세츠 주 출신 맷 데이먼의 남부 액센트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미국 남부가 배경인 영화인 만큼 남부 액센트가 중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들릴 정도로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남부 액센트가 중요했다면 남부 출신 배우들에 맡기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1969년 오리지날 영화에서 라비프 역을 맡았던 글렌 캠벨이 아칸소 출신이었던 것처럼 죠시 할로웨이(Josh Holloway), 매튜 매커너히(Matthew McConaughey), 브래드 피트(Brad Pitt) 등 남부 액센트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배우들에게 맡겼더라면 한결 자연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웨스턴 쟝르에 아주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기도 하다.

어색한 남부 액센트 때문이었는지, 이들이 연기한 캐릭터도 왠지 어색해 보였다. 제프 브리지스의 루스터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보안관보다는 술주정뱅이에 가깝게 보였다. 루스터가 술을 좋아하는 캐릭터인 건 맞지만, 지나친 남부 액센트까지 겹치면서 술주정뱅이 쪽에 보다 가까워졌다. 존 웨인은 1969년 '트루 그릿'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제프 브리지스는 2010년 리메이크로 연기상을 노리기 힘들 듯 하다.

무엇보다도 코믹했던 건, 라비프 역의 맷 데이먼이었다. 콧수염을 달고 텍사스 레인저 복장을 한 맷 데이먼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 솟구치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너무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데이먼의 어색한 남부 액센트에 오래 된 찬송가까지 배경음악으로 울려퍼지니, 이거 참...ㅋ



'노 컨트리 포 올드 맨'으로 웨스턴 쟝르를 건드려 봤던 코엔 형제가 정통 웨스턴에 도전했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들이 패밀리 영화와 서부영화의 중간 쯤이라고 할 수 있는 '트루 그릿'을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코엔 형제 스타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영화를 고른 것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2010년 버전 '트루 그릿'이 용감한 14세 소녀의 모험을 그린 패밀리 어드벤쳐도 아니고, 터프가이들의 피 튀기는 사투를 그린 거친 액션영화도 아닐 뿐만 아니라, 배경음악으론 찬송가까지 나오는 약간 혼란스러운 웨스턴이 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볼 만은 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액션, 유머, 감동 3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아니었으며, 크게 만족스러운 서부영화도 아니었지만, 크게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B 정도?

그럼 오리지날과 리메이크 중 어느 게 더 맘에 드냐고?

아무래도 오리지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리지날이 리메이크보다 더 서부영화답게 보이고, 더 재미있으며, 존 웨인이라는 대배우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리메이크작에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오리지날에 빠졌거나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리메이크에 포함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14세 소녀 매티 역의 헤일리 스타인필드도 물건이었다. 1969년 오리지날의 킴 다비도 좋았지만 2010년 리메이크의 스타인필드도 똘똘하고 용감한 매티 역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다. 2010년 리메이크도 나쁘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1969년 오리지날에 더 정이 간다.

오리지날과 리메이크의 장점들을 추려 하나로 합치면 최고의 영화가 나올 것 같은데...

댓글 4개 :

  1. 정말 맷 데이먼 저건 아니지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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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화를 코메디로 만드는 엉뚱한 방법도 참 여러가지구나 싶더라구요...ㅋㅋ
    스틸과 트레일러를 통해 데이먼의 모습에 충분히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도 보자마자 크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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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올 한해 너무 감사했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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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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