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6일 목요일

조지 클루니의 '아메리칸', 60년대 영화 같았다

'만약 007 시리즈 제작진이 미국 영화배우를 제임스 본드 역으로 캐스팅한다면 누가 가장 잘 어울릴까'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지껏 미국 영화배우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한명을 꼽아본다면 누가 있을까?

지금은 제임스 본드 역을 맡기에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지만, 한 때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맡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국배우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므로 '아메리칸'인 클루니가 JB로 캐스팅되는 걸 보고싶진 않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그런대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클루니도 영국소설로 태어난 캐릭터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제임스 본드는 물론 아니다. 그대신 영국 소설가 마틴 부스(Martin Booth)의 '베리 프라이빗 젠틀맨(A Very Private Gentleman)'을 베이스로 한 스릴러 영화 '아메리칸(The American)'에서 본명이 무엇인지 불확실한 주인공, 프로페셔널 킬러 역을 맡았다.

사실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인 캐릭터가 암살용 스나이퍼 라이플을 만드는 킬러라는 게 전부일 뿐 액션/어드벤쳐 영화로 옮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빠른 전개의 익사이팅한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리 프라이빗 젠틀맨'은 이탈리아에서 나비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위장한 채 다음 암살 미션을 준비하다가 캐톨릭 신부와 친분을 쌓고 창녀와 사랑에 빠지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1인칭 시점 소설이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시작부터 힘들었다. 이탈리아 동네의 풍경,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 등을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데서 부터 한 번에 두 줄씩 읽어내려가고픈 충동을 느끼게 했다. 암살청부를 받은 킬러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무슨 여행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유명한 이언 플레밍도 음식메뉴, 술이름, 담배 브랜드, 자동차 브랜드 등등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곤 했지만 (바로 이 때문에 007 영화 시리즈가 PPL의 천국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마틴 부스는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한 쓸데 없어 보이는 이것 저것들에 대한 설명을 너무 자주, 길게 했다.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스토리 전개 속도는 여전히 더뎠다. 그러더니 '젊진 않지만 그렇다고 노인도 아닌' 주인공, Mr. Farfalla(버터플라이)가 캐톨릭 신부와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2명의 창녀와 쓰리섬을 하고, 그 중 하나에 감정을 느끼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정체불명의 미행자를 따돌리면서 이런 일에서 은퇴한 뒤 이탈리아 시골에 정착해 살고싶다는 생각에 젖어드는 쪽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암살플롯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주인공의 사생활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메인을 차지한 것이다.

그렇다. '베리 프라이빗 젠틀맨'은 시원시원한 어드벤쳐 소설이 아니었다. 주인공이 씨트로엥 2CV를 몰고, 월터(Walther) 핸드건을 사용하는 점 등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부분들도 더러 있었지만, 소설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와는 완전히 달랐다. 300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소설이었는데도 다 읽고 책을 내려놓았을 때 700 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름 흥미로운 부분들도 있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기엔 힘든 소설이었다.



자, 그렇다면 영화는 어땠을까?

영화 줄거리는 원작에 비교적 출실한 편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영화도 '중년 킬러의 이탈리안 라이프'에 대한 얘기가 전부라는 거냐고?

그렇다. 엔딩 파트는 원작과 크게 달랐지만, 이것을 제외하곤 주인공이 '잭'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 원작에선 영국인이던 메인 캐릭터가 영화에선 미국인으로 바뀌었다는 점, 창녀가 둘이 아니라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 등 몇 가지 마이너적인 차이점을 제외하곤 원작과 대부분 일치했다.

그렇다면 영화도 원작처럼 따분했다는 얘기냐고?

그렇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추격씬, 총격전 등을 추가하고 창녀 클라라와의 사이에도 긴장감이 흐르도록 바꾼 것이 눈에 띄긴 했지만, 액션 스릴러라 불리기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스릴러 영화 비스무리한 모양새를 갖춰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였다. 그러나 킬러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을 찾아볼 수 없는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로 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스토리 역시 신선하지 않았다. '은퇴하기로 결심한 중년의 프로페셔널 킬러의 마지막 일이 자꾸 꼬인다'는 백만 번은 들어본 듯한 단순한 스토리를 엿처럼 늘여 놓은 게 전부였다. 소설에선 고독한 킬러의 내면묘사라도 있었다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것도 없었다. '이탈리아', '중년의 킬러', '캐톨릭 신부', '창녀와의 사랑' 등 수십년 묵은 듯한 진부한 구닥다리 소재들 때문이었는지 암울한 분위기의 클래식 6~70년대 영화를 보는 듯 했을 뿐 무언가 특별하다 할 만한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공(조니 클루니)과 사랑에 빠진 이탈리안 창녀, 클라라와의 섹스씬마저도 지루했다. 이탈리안 여배우 비올란테 플라시도(Violante Placido)가 헤어누드까지 선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베드씬은 길고 지루했고, 헤어누드는 눈길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클라라의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는 점도 신경쓰였다. 원작에서의 클라라는 아르바이트로 창녀생활을 하는 블론드의 20대 대학생으로, 주인공과는 부녀지간으로 보일 정도로 나이차가 난다고 나온다. 나이 많은 프로페셔널 킬러와 어린 여대생 창녀의 러브스토리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클라라 역을 맡은 이탈리안 여배우는 아무리 봐도 20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바람에 '나이차가 많이 나는 커플의 러브스토리'는 사라지고 '킬러와 창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흔한 설정만 남게 됐다.

영화 캐릭터의 나이가 원작보다 많아진 것은 단지 클라라 하나가 전부가 아니다. 조지 클루니가 맡은 메인 캐릭터 하나를 제외하곤 캐톨릭 신부, 여자 스나이퍼 모두 원작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인그리드'라는 이름의 여자 스나이퍼와 창녀 클라라는 원작에선 모두 20대였으나 영화에선 30대로 '업그레이드' 됐고, 베네디토 신부는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에서 노인으로 부쩍 늙었다. 20대 아르바이트 창녀는 30대 베테랑으로, 중년의 신부는 전형적인 노인 신부로 각각 바뀐 것이다.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다면, 왜 이들의 나이를 원작보다 많게 정했냐는 것이다. 원작에선 신부는 고독한 삶을 사는 주인공의 친구격이었고, 클라라는 주인공이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느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애인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선 신부는 아버지뻘로, 클라라는 30대로 바뀌면서 주인공과 신부의 관계, 주인공과 클라라의 관계 모두가 조금씩 이상하게 틀어졌다. 가뜩이나 볼 게 없는 영화였던 만큼 등장 캐릭터들간의 관계라도 제대로 그렸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이것도 아니었다. 신부는 언제나 노인이어야 했고, 부녀지간으로 보일 정도로 나이차가 나는 커플은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영화 '아메리칸'을 재미있게 본 것 같지 않다고?

원작을 읽은 덕분에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아, 그렇고 보니 하나 더 있다. 제임스 본드 오마쥬다. 영화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거리가 멀었지만 007 시리즈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씬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는 잭(조지 클루니)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핸드건을 꺼내든 채 이탈리아의 마을을 뛰어다니는 씬이다.



이 장면이 어느 제임스 본드 영화의 어떤 장면과 닮았다는 거냐고?

아래는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역시 이탈리아에서 핸드건을 뽑아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주변 경치, 옷차림, 핸드건 등 여러모로 비슷하다.



잭(조지 클루니)이 핸드건을 겨누는 장면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이 장면은 또 어느 제임스 본드 영화의 어떤 장면과 비슷하다는 거냐고?

또 '콴텀 오브 솔래스'다. 아래는 이탈리아 추격씬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그의 핸드건, 월터 PPK(Walther PPK)를 겨누는 모습이다.



잠깐! 혹시 클루니가 들고있는 핸드건도 제임스 본드가 애용하는 바로 그 월터 PPK 아니냐고?

원작에선 주인공이 월터 P5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선 P5 대신 PPK를 사용한 듯 하다.

내친 김에 P5와 PPK를 비교해 보자. 위의 핸드건이 P5이고 아래 것이 제임스 본드의 PPK다. P5는 실제로 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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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건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에이, 남자의 넘버1 악세사리가 바로 핸드건인데 새삼스럽게시리...ㅋ 나더러 남성용 TV 시리즈를 만들라고 하면 제목은 'Sex and the Handgun'이 될 걸?

그래도 클루니가 들고 있는 이런 총에는 관심 없다. 사슴 잡으러 갈 일 있수? 사라 페일린과 친구사이가 되면 하나 장만할 지 모르겠지만 아직은...ㅋ



그런데 조지 클루니 역시 멋있지 않수?

영화 '아메리칸'이 재미가 없었는데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 A부터 F 중에서 점수를 주자면 아무래도 D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도 C-------를 주고싶은 이유 모두 조지 클루니의 멋 때문이다. 클루니도 숀 코네리(Sean Connery) 못지 않게 멋지게 늙는 것 같다. 내가 클루니의 나이가 되어 머리가 은발이 되었을 때 지금의 그처럼 멋진 모습일까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남자나 여자나 어렸을 적 한창일 때의 외모보다 늙어서 어떻게 되는 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젊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짧거든...

(항상 그랬듯이) 얘기가 산으로 간 것 같지만, 마지막은 이 노래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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