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8일 일요일

'아메리칸 스나이퍼', 전투 아닌 군인에 포커스 맞춘 최고의 전쟁영화

지난 2000년대에만 해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또는 테러와의 전쟁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군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드러낸 정치색이 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다룬 영화가 특히 심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군까지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미군과 군인 가족들은 헐리우드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으며, 2000년대 개봉한 대부분의 이라크 전쟁 영화들이 미국서 저조한 흥행성적을 내는 데도 일조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선 톤이 많이 달라졌다. 요즘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테러와의 전쟁 등에서의 미군의 활약을 긍정적으로 그린 영화가 자주 개봉하고 있다.

21세기의 미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2011년에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스가 오사마 빈 라덴을 성공적으로 사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실제 현역 네이비 실스가 직접 출연한 '액트 오브 밸러(Act of Valor)', 미국 정부가 영화 제작진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논란이 일었던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그린 영화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 200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홀로 생환한 네이비 실스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론 서바이버(Lone Survivor)' 등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네이비 실스의 활약상을 그린 전쟁영화가 매년마다 한 편씩 개봉했다.

2015년도 예외가 아니다.

2015년엔 네이비 실스 스나이퍼로 유명한 크리스 카일(Chris Kyle)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한 전쟁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가 개봉했다. 2014년 12월 미국에서 제한 개봉했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1월16일 미국 전역에서 개봉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프로듀서 길드 오브 아메리카(PGA) 어워드, 디렉터스 길드 오브 아메리카(DGA) 어워드에 연이어 노미네이트된 데 이어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작품, 남우주연, 각색 등을 비롯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작품상을 비롯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만큼 잘 된 영화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YES"다.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감독이 연출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요근래 나온 최고의 전쟁영화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텍사스에서 태어나 카우보이 생활을 하다 네이비 실이 되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면서 베테랑 워리어가 된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이 전쟁터보다 더욱 적응하기 힘들어지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바이오픽 드라마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Chris Kyle)은 '론 서바이버(Lone Survivor)'로 유명한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과 네이비 실스 트레이닝 과정 때부터 친구 사이인 실재 네이비 실 스나이퍼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때로는 아이와 여자까지 저항세력으로 둔갑하는 비정규 게릴라전에서 스나이퍼로 활약하며 여러 힘든 결단을 내려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살인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복잡한 상황을 거치면서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사살을 기록한 스나이퍼가 된 크리스 카일의 이야기를 그렸다.

크리스 카일은 그가 사살한 테러리스트 숫자보다 그것을 통해 살릴 수 있었던 미군의 숫자를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우선순위가 "GOD-COUNTRY-FAMILY" 순이었던 애국자다. 크리스 카일이 쓴 자서전에 따르면, 결혼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카일의 아내 테이야(Taya)가 전쟁터로의 복귀를 만류했지만 그럼에도 카일은 묵묵히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길 반복했고, 결국 테이야가 카일의 '우선순위'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쟁터에서 총을 쏘는 군인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군인 가족 역시 함께 전쟁을 겪는다는 점,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미국 생활 적응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모습 등을 매우 실감나게 묘사했다. 네이비 실스의 용맹스러운 전투 이야기가 전부가 아닌 군인과 군인 가족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 전쟁영화라는 점이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이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특별한 영화로 만들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투 씬으로 가득찬 평범한 액션영화가 아니라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과 군인 가족들이 봤을 때 남의 얘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밀리터리 드라마였다.

미국에선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중엔 팔, 다리 등이 절단된 부상병들도 많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그들과 마주쳤을 때 등을 두르려주지 않았다는 게 후회되도록 만드는 영화였다.

▲실제 크리스 카일과 그의 자서전 '아메리칸 스나이퍼'
▲실제 크리스 카일과 그의 아내 테이야
▲오랜 친구 사이인 '론 서바이버'의 마커스 러트렐(왼쪽)과 크리스 카일(오른쪽)

하지만 한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가 크리스 카일 역을 맡았다는 점이었다.

브래들리 쿠퍼가 네이비 실스 역을 맡는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농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터프가이 네이비 실 크리스 카일 역을 꽃미남 브래들리 쿠퍼가 맡는다는 게 넌센스처럼 들렸다.

물론 요즘 미국에서 인기있는 주연급 남자배우 중 액션영화에 잘 어울릴 만한 배우가 거의 없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코믹북 수퍼히어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헐리우드 액션 캐릭터를 영국과 호주 배우들이 독식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80년대에만 해도 액션, 스릴러, 코메디, 드라마 등 다양한 쟝르에 모두 잘 어울리는 주연급 배우들이 많았으나, 요샌 꽃미남, 힙스터 타잎이 아니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일차원적인 마초 액션맨만 있을 뿐 그 중간에 해당되는 배우를 찾기 힘들다.

브래들리 쿠퍼가 크리스 카일 역을 맡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브래들리 쿠퍼는 크리스 카일 역을 비교적 잘 연기했다. 터프가이 네이비 실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크리스 카일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았고,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또한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마초 액션영화가 아니라 군인과 군인 가족에 관한 밀리터리 드라마 성격의 바이오픽이었다는 점도 적잖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만약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지난 '론 서바이버'처럼 인텐스한 전투 씬에 올인한 액션영화였다면 브래들리 쿠퍼가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베테랑 네이비 실처럼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드라마 성격이 강한 영화였던 덕분에 어색함이 다소 가려진 것 같았다. 꽃미남 브래들리 쿠퍼에게 크리스 카일 역을 맡겼다는 점은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지만, 쿠퍼는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면서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쿠퍼를 진지한 마초 터프가이 액션맨으로 다시 보게 만들 정도는 절대 아니었어도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유머가 크게 부족했다는 점이다.

크리스 카일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카일이 유머감각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카일은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던 상황을 마치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의 한 장면처럼 코믹하게 묘사하곤 했다. 물론 '터프가이 유머'로 볼 수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네이비 실스 스나이퍼의 '컴뱃 유머'가 재미있었다. 따라서 영화에서도 코믹한 씬이 더러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런 유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카일이 이라크에서 동료 팀메이트들과 코믹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이야기는 영화로 옮기지 않았다. 물론, 주연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가 '행오버(The Hangover)'라는 코메디 영화 시리즈로 유명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머를 없앴을 수도 있고, 영화가 크리스 카일과 그의 가족이 겪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이기 때문에 유머를 생략했을 수도 있다. 제작진이 영화를 무겁고 진지한 톤으로 만들려 한 것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유머를 완전히 걷어낸 건 실수라고 생각한다. 전쟁터에서도 웃을 거리를 찾아내는 여유가 생길 정도로 이라크 현지 상황에 적응한 베테랑 네이비 실의 모습도 보여줬어야 했다.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보다 크리스 카일과 그의 가족이 겪은 개인적인 드라마 쪽에 무게를 둔 영화라는 점은 이해하지만, 너무 그쪽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아무리 그게 핵심이더라도 눈에 띄게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액션 씬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액션에 무게를 둔 전쟁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맘에 들었으므로 인텐스한 전투 씬이 없었다는 점은 크게 아쉽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고싶었던 전투 씬이 나오지 않은 게 아쉬웠다. 책을 영화로 옮기다보면 많은 부분이 누락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잘 알지만, 전투 씬를 너무 소홀하게 형식적으로 때우고 넘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의 책에 등장하는 몇몇 인상적인 전투 씬을 잘 골라서 효과적으로 집어넣었더라면 기억에 남는 씬들이 많아졌겠지만, 드라마 성격이 강한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기 때문인지 제작진은 전투 씬 자체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것이 크게 신경에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입맛에 100% 딱 맞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90% 이상은 맞았으므로 불평거리가 많지 않은 영화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을 맡은 최근 영화 중 가장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요새는 군인들의 등을 두드려주면 "전쟁광(Warmonger)"이라는 소리를 듣고, "애국자"라고 하면 IRS가 조사를 하는 판이다. 그래도 변함없이 믿음직스러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을 맡았으니까 전쟁에서 돌아온 아메리칸 워리어를 기리는 올바른 훌륭한 영화가 나왔다고 본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앞으로 열릴 헐리우드 영화 시상식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홈 비디오로 출시되면 잽싸게 낚아채야 할 또 하나의 영화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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