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007 시리즈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점 중 하나는 007 시리즈가 냉전이 한창일 때 탄생한 시리즈라서 007 시리즈가 냉전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과 거리가 있다. 왜냐면,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영화화 프로젝트가 막 시작했던 50년대 중후반부터 당시 제작진이 냉전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제작진은 앞으로 냉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으며 금세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이 원했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성격 또한 냉전을 배경으로 한 사실적인 첩보물이 아니라 쿨한 젠틀맨 스파이의 스타일리쉬한 액션 어드벤쳐 영화였으므로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을 적으로 삼지 말고 냉전과 무관한 새로운 적을 만들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냉전과 무관한 새로운 적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게 바로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는 스펙터와 함께 시작했다.
일각에선 냉전이 끝나면서 007 시리즈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도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다소 있다. 냉전이 끝나면서 007 시리즈를 비롯한 모든 첩보물이 직간접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007 시리즈에 더욱 큰 타격을 입혔던 건 냉전종식보다 스펙터를 더이상 007 시리즈에 등장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007 시리즈의 역사를 훑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제작된 일곱 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서 3탄 '골드핑거(Goldfinger)'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의 007 시리즈에 스펙터가 적으로 등장했다.
007 제작진은 70년대 중반에 스펙터를 다시 제임스 본드 영화에 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를 갖고 있었던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가 허락을 하지 않는 바람에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비슷한 또다른 범죄조직을 영화에 등장시켜야 했다.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1979년작 '문레이커(Moonraker)'가 여기에 해당되는 영화다.
007 시리즈에 더이상 스펙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007 제작진은 80년대부터 냉전으로 눈길을 돌렸다. 6070년대에 요긴하게 울궈먹었던 스펙터 옵션이 날아가자 냉전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제작된 다섯 편의 8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 중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을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의 007 시리즈에 소련이 적으로 등장했다. 007 시리즈가 '냉전시대 시리즈'가 됐던 게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80년대가 지나면서 냉전시대까지 저물자 90년대부턴 오만잡것(?)들이 007의 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스펙터는 여전히 사용하지 못하는데 냉전마저 끝난 바람에 007 제작진은 새로운 적을 또다시 만들어야만 했으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로 허술한 줄거리가 꼽히는데, 줄거리가 시원찮아지도록 만든 가장 큰 이유가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적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로 제임스 본드가 교체된 2000년대 중반에도 새로운 적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는 콴텀(Quantum)이라 불리는 범죄조직을 소개했다. 007 제작진이 콴텀을 소개한 이유는 스펙터와 유사한 새로운 범죄조직을 만들어 007의 숙적으로 키워나가려 했던 것이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과거 스펙터처럼 터무니 없는 테러 음모를 꾸미지 않고 그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범죄조직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콴텀을 계속 성장시키지 못했다. 이 바람에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Skyfall)'에선 또다시 브로스난 시대의 오만잡것 타잎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스타일 악당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2013년 11월 007 제작진이 케빈 맥클로리 측으로부터 스펙터를 포함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 관련 라이센스 일체를 넘겨받으면서 범죄조직 스펙터를 다시 007 시리즈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007 시리즈에 그렇게 필요했던 제임스 본드의 숙적을 드디어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스펙터가 지난 6070년대처럼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악당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큰 문제점 하나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영화 '스카이폴'로 3부작이 완성된 듯 했으므로, '본드24'부턴 트릴로지를 뒤로 하고 스펙터를 중심으로 새출발을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007 스펙터'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부터 '스카이폴(Skyfall)'까지의 사건 배후에 모두 스펙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본드가 스펙터의 두목, 블로펠드를 찾아가 마침표를 찍는다는 스토리다. 여기에 본드와 블로펠드의 사적인 과거사에 대한 서브플롯을 곁들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그렇다. '007 스펙터'는 트릴로지를 뒤로 하고 스펙터와 함께 새출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앞서 공개된 세 편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줄거리를 완결시키는 성격을 띤 영화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완결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가 실제로 완결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007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완결편처럼 보이게끔 셋업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뜻밖인 건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영화에 한 번 사용하고 다시 집어넣을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펙터를 되찾았으니 007 제작진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새로운 적을 매번 만들 필요 없이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는데,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007 스펙터'에 한 번 등장시키고 다시 봉인할 생각을 했다니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수정판에서 바뀌긴 했지만, 스크립트 초안엔 블로펠드가 영화의 마지막에 본드의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돼있었다. 따라서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블로펠드를 '007 스펙터'에서 죽이면서 끝낼 생각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블로펠드를 살려두는 쪽으로 스크립트를 수정하면서 이전 포스팅 에서 다뤘던 것처럼 줄거리를 이어붙일 수 있는 옵션이 아직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많은 본드팬들이 예상했던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컴백 씨나리오와 여러모로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앞으로 몇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더 출연할 예정인지는 몰라도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그의 나머지 제임스 본드 영화에 계속 등장시키는 게 올바르지 않나 생각한다. 007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영화팬들은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생소하게 들린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시키면서 어린 관객들에게 새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미국의 헐리우드 전문 사이트, 데드라인닷컴(Deadline.com)의 '스펙터' 관련 기사를 읽다 한참 웃은 적이 있다. 한 유저가 '스카이폴'도 좋고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도 좋다면서 댓글을 잘 써나가다 마지막에 '스펙터'라는 단어가 친숙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유저들이 "숀 코네리(Sean Connery) 시절 영화를 좀 찾아서 봐라", "나이가 몇이냐", "공부 좀 해라 꼬마야" 등의 코믹한 댓글을 달았다. '스펙터'라는 단어가 친숙하지 않을 정도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아는 게 없으면서 본드팬인 것처럼 댓글을 단 유저를 완전히 찌그러뜨린 댓글들도 코믹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코네리 영화를 좀 찾아 보라"는 댓글을 단 유저의 아이디 'Plenty O'Toole'이 가장 코믹했다.
"Bond Girls are FOREVER, eh?"
위의 데드라인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스카이폴'이 좋다면서 본드팬이 다 된 것처럼 굴면서도 '스펙터'라는 단어가 생소하다고 말하는 어린 관객들이 많다. 이들은 클래식 007 시리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물론 영국, 미국 쪽에선 007 시리즈에 대한 이해도가 베테랑 성인 본드팬 못지 않은 수준인 1020대 본드팬도 많지만, 요새 유행하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즐겨 보는 어린 관객들에겐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은 어린 관객들이 '스펙터'와 '블로펠드'에 익숙해지는 기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007 스펙터' 영화 한 편으로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리기에 너무 부족하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007 제작진이 이번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는 점이다.
007 제작진이 역사를 새로 쓴 이유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이미 여러 차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등장했었기 때문에 스토리가 중복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작소설 등을 통해 이미 공개되었던 내용까지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블로펠드 트릴로지'로도 불리는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썬더볼(Thunderball)', '여왕폐하의 007(On Her Mejesty's Secret Service)',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의 내용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했지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원작소설에서의 본드와 블로펠드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냈던 사이가 아니다. 본드는 블로펠드가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을 만든 이후에 알게 됐다. 블로펠드 역시 플레밍의 소설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영화 '스펙터'에선 본드와 프란츠 오버하우서/블로펠드가 어렸을 때 한스 오버하우서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과거사를 바꿔놓았다. 본드와 한스 오버하우서의 관계는 이언 플레밍의 숏스토리 '옥토퍼시(Octopussy)'에 잠시 나오므로 한스 오버하우서를 끌어들인 것까진 문제될 게 없다. 한스 오버하우서의 아들, 프란츠 오버하우서는 원작소설에 나오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프란츠를 악당으로 설정했다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발츠)가 다름아닌 블로펠드라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참고하면서 새로운 악당 캐릭터를 만든 아이디어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하필이면 거기에 블로펠드를 갖다 붙인 게 문제다. 최근 들어 '오리진', '비긴스'가 유행이라지만 007 제작진이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지나치게 뜯어고쳤다고 본다. 007 제작진이 지난 '스카이폴'에 이어 이번 '스펙터'에서도 본드의 과거사를 들추려 한다는 점까지는 싫든 좋든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하필이면 007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인 블로펠드를 본드의 과거와 엮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후에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서부터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에 함께 생활했던 사이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스토리는 크레이그가 007 시리즈를 떠나면서 완결되고 새로운 영화배우로 교체된 이후엔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할 것으로 보이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크레이그가 007 시리즈를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텐데 그 때 가선 또 어떻게 소개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한편, 크리스토프 발츠(Christoph Waltz)는 프란츠 오버하우서가 블로펠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유출된 스크립트 초안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따르면 프란츠 오버하우서는 한스 오버하우서의 친아들이 아니라 입양된 아들이며, 프란츠 오버하우서의 본명은 "블로펠드"라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를 만들려 한다는 점이다.
제임스 본드의 내면, 과거사 등을 들추는 것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릴 만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둬야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거꾸로 하고 있다. 미션 중심으로 하면서도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여러 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지만, 007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에서부터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를 만들려 하고 있다.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부터 인연이 있었던 관계로 설정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007 제작진이 미션 중심의 영화를 계획했다면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테러 플롯을 중심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스펙터'에선 스펙터가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인 스펙터와 우두머리 블로펠드가 44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007 제작진은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를 만들지 않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스카이폴'은 악당이 부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이해한다지만, '스펙터'에선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변함없이 과거사 타령에서 맴돌고 있다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리는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다면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임스 본드의 과거사나 들추는 줄거리를 썼겠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펙터가 화산 지하기지에서 우주선을 발사하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건 아니지만, 규모가 작더라도 현실적이고 대단히 위협적인 테러 플롯 구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유출된 자료에 따르면,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미스터리'가 메인 플롯이고 스펙터가 꾸미는 음모는 지난 '스카이폴'에 나왔던 청문회 씬의 연장선 수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펙터'가 사실상 '스카이폴 2'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펙터의 존재감이 매우 약해 보인다. 지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비밀스러운 범죄조직 '콴텀'이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이렇다 보니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제대로 새로 소개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본드와 블로펠드의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과거사 미스터리로 장난 치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스타일의 비슷비슷한 헐리우드산 액션영화를 내놓는 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영화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007 제작진이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에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아무래도 현재의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스토리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소질이 크게 부족한 듯 하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미래의 007 시리즈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스펙터와 냉전을 모두 잃은 뒤 새로운 적을 찾는데 고전하던 007 제작진이 다시 영화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묵혀둘 리 없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선 스펙터가 앞으로 얼마나 자주 등장할지 알 수 없지만, 크레이그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면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테러 플롯을 중심으로 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여러 편 제작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 때가 오면 이번처럼 이상하게 과거사가 뒤죽박죽되지 않은 정상적인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위험한 테러 플롯을 꾸미는 본모습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그러나 이건 사실과 거리가 있다. 왜냐면,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영화화 프로젝트가 막 시작했던 50년대 중후반부터 당시 제작진이 냉전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제임스 본드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제작진은 앞으로 냉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으며 금세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이 원했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성격 또한 냉전을 배경으로 한 사실적인 첩보물이 아니라 쿨한 젠틀맨 스파이의 스타일리쉬한 액션 어드벤쳐 영화였으므로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을 적으로 삼지 말고 냉전과 무관한 새로운 적을 만들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냉전과 무관한 새로운 적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게 바로 범죄조직 스펙터(SPECTRE)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는 스펙터와 함께 시작했다.
일각에선 냉전이 끝나면서 007 시리즈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도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다소 있다. 냉전이 끝나면서 007 시리즈를 비롯한 모든 첩보물이 직간접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007 시리즈에 더욱 큰 타격을 입혔던 건 냉전종식보다 스펙터를 더이상 007 시리즈에 등장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007 시리즈의 역사를 훑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제작된 일곱 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서 3탄 '골드핑거(Goldfinger)'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의 007 시리즈에 스펙터가 적으로 등장했다.
007 제작진은 70년대 중반에 스펙터를 다시 제임스 본드 영화에 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스펙터 관련 라이센스를 갖고 있었던 영화 프로듀서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가 허락을 하지 않는 바람에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비슷한 또다른 범죄조직을 영화에 등장시켜야 했다.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1979년작 '문레이커(Moonraker)'가 여기에 해당되는 영화다.
007 시리즈에 더이상 스펙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007 제작진은 80년대부터 냉전으로 눈길을 돌렸다. 6070년대에 요긴하게 울궈먹었던 스펙터 옵션이 날아가자 냉전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제작된 다섯 편의 80년대 제임스 본드 영화 중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을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의 007 시리즈에 소련이 적으로 등장했다. 007 시리즈가 '냉전시대 시리즈'가 됐던 게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80년대가 지나면서 냉전시대까지 저물자 90년대부턴 오만잡것(?)들이 007의 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스펙터는 여전히 사용하지 못하는데 냉전마저 끝난 바람에 007 제작진은 새로운 적을 또다시 만들어야만 했으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로 허술한 줄거리가 꼽히는데, 줄거리가 시원찮아지도록 만든 가장 큰 이유가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적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로 제임스 본드가 교체된 2000년대 중반에도 새로운 적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는 콴텀(Quantum)이라 불리는 범죄조직을 소개했다. 007 제작진이 콴텀을 소개한 이유는 스펙터와 유사한 새로운 범죄조직을 만들어 007의 숙적으로 키워나가려 했던 것이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과거 스펙터처럼 터무니 없는 테러 음모를 꾸미지 않고 그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범죄조직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콴텀을 계속 성장시키지 못했다. 이 바람에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Skyfall)'에선 또다시 브로스난 시대의 오만잡것 타잎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스타일 악당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2013년 11월 007 제작진이 케빈 맥클로리 측으로부터 스펙터를 포함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 관련 라이센스 일체를 넘겨받으면서 범죄조직 스펙터를 다시 007 시리즈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007 시리즈에 그렇게 필요했던 제임스 본드의 숙적을 드디어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스펙터가 지난 6070년대처럼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악당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큰 문제점 하나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영화 '스카이폴'로 3부작이 완성된 듯 했으므로, '본드24'부턴 트릴로지를 뒤로 하고 스펙터를 중심으로 새출발을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007 스펙터'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부터 '스카이폴(Skyfall)'까지의 사건 배후에 모두 스펙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본드가 스펙터의 두목, 블로펠드를 찾아가 마침표를 찍는다는 스토리다. 여기에 본드와 블로펠드의 사적인 과거사에 대한 서브플롯을 곁들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그렇다. '007 스펙터'는 트릴로지를 뒤로 하고 스펙터와 함께 새출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앞서 공개된 세 편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줄거리를 완결시키는 성격을 띤 영화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완결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스펙터'가 실제로 완결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007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완결편처럼 보이게끔 셋업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뜻밖인 건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영화에 한 번 사용하고 다시 집어넣을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펙터를 되찾았으니 007 제작진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새로운 적을 매번 만들 필요 없이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는데,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007 스펙터'에 한 번 등장시키고 다시 봉인할 생각을 했다니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수정판에서 바뀌긴 했지만, 스크립트 초안엔 블로펠드가 영화의 마지막에 본드의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돼있었다. 따라서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블로펠드를 '007 스펙터'에서 죽이면서 끝낼 생각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블로펠드를 살려두는 쪽으로 스크립트를 수정하면서 이전 포스팅 에서 다뤘던 것처럼 줄거리를 이어붙일 수 있는 옵션이 아직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많은 본드팬들이 예상했던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컴백 씨나리오와 여러모로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앞으로 몇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더 출연할 예정인지는 몰라도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그의 나머지 제임스 본드 영화에 계속 등장시키는 게 올바르지 않나 생각한다. 007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영화팬들은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생소하게 들린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시키면서 어린 관객들에게 새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미국의 헐리우드 전문 사이트, 데드라인닷컴(Deadline.com)의 '스펙터' 관련 기사를 읽다 한참 웃은 적이 있다. 한 유저가 '스카이폴'도 좋고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도 좋다면서 댓글을 잘 써나가다 마지막에 '스펙터'라는 단어가 친숙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유저들이 "숀 코네리(Sean Connery) 시절 영화를 좀 찾아서 봐라", "나이가 몇이냐", "공부 좀 해라 꼬마야" 등의 코믹한 댓글을 달았다. '스펙터'라는 단어가 친숙하지 않을 정도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아는 게 없으면서 본드팬인 것처럼 댓글을 단 유저를 완전히 찌그러뜨린 댓글들도 코믹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코네리 영화를 좀 찾아 보라"는 댓글을 단 유저의 아이디 'Plenty O'Toole'이 가장 코믹했다.
"Bond Girls are FOREVER, eh?"
위의 데드라인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스카이폴'이 좋다면서 본드팬이 다 된 것처럼 굴면서도 '스펙터'라는 단어가 생소하다고 말하는 어린 관객들이 많다. 이들은 클래식 007 시리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물론 영국, 미국 쪽에선 007 시리즈에 대한 이해도가 베테랑 성인 본드팬 못지 않은 수준인 1020대 본드팬도 많지만, 요새 유행하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즐겨 보는 어린 관객들에겐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은 어린 관객들이 '스펙터'와 '블로펠드'에 익숙해지는 기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007 스펙터' 영화 한 편으로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리기에 너무 부족하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007 제작진이 이번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는 점이다.
007 제작진이 역사를 새로 쓴 이유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이미 여러 차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등장했었기 때문에 스토리가 중복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작소설 등을 통해 이미 공개되었던 내용까지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블로펠드 트릴로지'로도 불리는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썬더볼(Thunderball)', '여왕폐하의 007(On Her Mejesty's Secret Service)',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의 내용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했지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원작소설에서의 본드와 블로펠드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냈던 사이가 아니다. 본드는 블로펠드가 스펙터라는 범죄조직을 만든 이후에 알게 됐다. 블로펠드 역시 플레밍의 소설 '여왕폐하의 007'에서 본드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영화 '스펙터'에선 본드와 프란츠 오버하우서/블로펠드가 어렸을 때 한스 오버하우서와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과거사를 바꿔놓았다. 본드와 한스 오버하우서의 관계는 이언 플레밍의 숏스토리 '옥토퍼시(Octopussy)'에 잠시 나오므로 한스 오버하우서를 끌어들인 것까진 문제될 게 없다. 한스 오버하우서의 아들, 프란츠 오버하우서는 원작소설에 나오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프란츠를 악당으로 설정했다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발츠)가 다름아닌 블로펠드라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을 참고하면서 새로운 악당 캐릭터를 만든 아이디어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하필이면 거기에 블로펠드를 갖다 붙인 게 문제다. 최근 들어 '오리진', '비긴스'가 유행이라지만 007 제작진이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지나치게 뜯어고쳤다고 본다. 007 제작진이 지난 '스카이폴'에 이어 이번 '스펙터'에서도 본드의 과거사를 들추려 한다는 점까지는 싫든 좋든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하필이면 007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인 블로펠드를 본드의 과거와 엮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후에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서부터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에 함께 생활했던 사이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스토리는 크레이그가 007 시리즈를 떠나면서 완결되고 새로운 영화배우로 교체된 이후엔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할 것으로 보이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크레이그가 007 시리즈를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텐데 그 때 가선 또 어떻게 소개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한편, 크리스토프 발츠(Christoph Waltz)는 프란츠 오버하우서가 블로펠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유출된 스크립트 초안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따르면 프란츠 오버하우서는 한스 오버하우서의 친아들이 아니라 입양된 아들이며, 프란츠 오버하우서의 본명은 "블로펠드"라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를 만들려 한다는 점이다.
제임스 본드의 내면, 과거사 등을 들추는 것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릴 만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둬야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거꾸로 하고 있다. 미션 중심으로 하면서도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여러 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지만, 007 제작진은 지난 '스카이폴'에서부터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를 만들려 하고 있다. '007 스펙터'에서 본드와 블로펠드가 어렸을 적부터 인연이 있었던 관계로 설정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007 제작진이 미션 중심의 영화를 계획했다면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꾸미는 테러 플롯을 중심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스펙터'에선 스펙터가 꾸미는 음모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007 시리즈의 가장 유명한 범죄조직인 스펙터와 우두머리 블로펠드가 44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왔는데도 007 제작진은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를 만들지 않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스카이폴'은 악당이 부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이해한다지만, '스펙터'에선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돌아왔는데도 변함없이 과거사 타령에서 맴돌고 있다면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리는 스파이 스릴러 플롯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다면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임스 본드의 과거사나 들추는 줄거리를 썼겠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펙터가 화산 지하기지에서 우주선을 발사하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건 아니지만, 규모가 작더라도 현실적이고 대단히 위협적인 테러 플롯 구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소니 픽쳐스 해킹으로 유출된 자료에 따르면,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미스터리'가 메인 플롯이고 스펙터가 꾸미는 음모는 지난 '스카이폴'에 나왔던 청문회 씬의 연장선 수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펙터'가 사실상 '스카이폴 2'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펙터의 존재감이 매우 약해 보인다. 지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비밀스러운 범죄조직 '콴텀'이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이렇다 보니 007 제작진이 44년만에 돌아온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제대로 새로 소개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본드와 블로펠드의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과거사 미스터리로 장난 치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스타일의 비슷비슷한 헐리우드산 액션영화를 내놓는 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다운 영화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007 제작진이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에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아무래도 현재의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 스토리다운 스토리를 만드는 소질이 크게 부족한 듯 하다.
스펙터와 블로펠드는 미래의 007 시리즈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스펙터와 냉전을 모두 잃은 뒤 새로운 적을 찾는데 고전하던 007 제작진이 다시 영화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묵혀둘 리 없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선 스펙터가 앞으로 얼마나 자주 등장할지 알 수 없지만, 크레이그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면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테러 플롯을 중심으로 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여러 편 제작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 때가 오면 이번처럼 이상하게 과거사가 뒤죽박죽되지 않은 정상적인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위험한 테러 플롯을 꾸미는 본모습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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