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세계 본드팬들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본드25'에 제임스 본드로 출연할 것인가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부터 '스펙터(SPECTRE)'까지 네 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출연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본드25'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고 새로운 배우로 교체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2016년 8월 현재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현재 들리는 바에 따르면 '본드25'가 2018년 개봉 예정이라고 하므로 늦어도 내년 이맘 때가 되면 누가 '본드25'에 제임스 본드로 출연하는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올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하지만 이번 포스팅에선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얼굴로 바뀐다는 가정 하에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의도적인 "원석 가공하기" 그만
60년대 초 007 제작진이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하자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과 영화감독 테렌스 영(Terence Young) 등이 못마땅해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소설 속의 제임스 본드는 깔끔한 외모에 옷을 잘 입는 상류층 신사 타잎인데, 숀 코네리는 거칠고 우락부락한 타잎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코네리가 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너무 딴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007 제작진은 우락부락한 코네리를 정장이 잘 어울리는 젠틀맨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코네리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는 것만 보더라도 "숀 코네리 제임스 본드 만들기" 작전이 대성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작자와 영화감독 모두 숀 코네리 캐스팅을 못마땅해 하는 등 스타트는 과히 좋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론 007 제작진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코네리의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와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도 흥행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코네리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코네리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훌륭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영화평론가들은 코네리의 성공에 대해 "007 제작진이 숨은 보석을 찾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던 코네리를 발굴해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2000년대 중반, 007 제작진은 또다시 다소 의외의 배우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했다.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다. 블론드에 단신인데다 깔끔한 미남형도 아닌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하자 많은 본드팬들이 불만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크레이그가 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너무 딴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영화로 옮기면서 크레이그를 젊고 거친 초보 00 에이전트로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데뷔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본드팬들이 많았으나, 크레이그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은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 영화 탑 5 안에 들 만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영화부터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코네리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가장 이상적인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켜갔던 것과 달리 크레이그는 그만의 개성있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Jason Bourne) 같다",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같다",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평범한 액션영화처럼 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크레이그가 그만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저런 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물론 흥행 면에선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캐릭터 면에선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다소 의외의 배우를 갓 00 에이전트가 된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해서 '카지노 로얄'로 신선하다는 평을 받은 것까진 좋았으나 그 이후부터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만들기"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21세기 007 제작진도 과거 60년대 제작진이 했던 것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가공해 멋진 다이아몬드로 만들려 했으나, 원석만 준비했을 뿐 가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007 제작진은 크레이그의 네 번째 영화 '스펙터(SPECTRE)'에서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런 시도는 크레이그의 두 번째 영화에서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크레이그가 신선하고 색다르면서도 낯익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엔 차기 제임스 본드를 선정할 때 "원석 가공하기"를 또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제임스 본드 역으로 무난해 보이는 배우를 선택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배우를 선택하면 흥미없어 보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처럼 보이지 않는 배우를 선택해 제임스 본드로 만들려는 "원석 다듬기"를 계속 고집하다간 더 이상해질 수 있다. 물론 원석을 다듬어 멋진 다이아몬드를 만들면 더욱 눈에 띌 뿐 아니라 가공 실력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통해 21세기 007 제작진의 가공 실력이 과히 높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이번에 차기 제임스 본드를 선택할 땐 보다 안정적인 후보 중에서 고르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 한다. 지나치게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배우도 아니고 쇼킹할 정도로 제임스 본드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배우도 아닌 그 중간 정도에 해당되는 배우들 중에서 고르는 게 가장 올바를 듯 하다.
◆지나친 'Political Correctness' 의식 중단하고 맹수 본능 되찾아야
제임스 본드가 "60년대 산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소설로는 1953년, 영화로는 1962년부터 시작했으며, 007 시리즈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시기가 60년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007 시리즈에 5060년대 컬쳐가 듬뿍 묻어있던 시기가 007 시리즈의 황금기였으며, 21세기인 지금도 그 때 그 시절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Political Correctness' 공격 쪽에 보다 가깝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60년대의 007 시리즈처럼 그대로 만들면 요즘의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엄격한 'Political Correctness' 룰과 충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엄격하고 예민해지는 'Political Correctness' 덕분에 "요새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요새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 수 없다"가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007 시리즈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따라 지난 90년대부터 'Political Correctness'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007 시리즈가 남의 눈치를 보며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흡연 씬이 사라진 것도 90년대부터이며, 본드걸들이 하나같이 한가닥하는 강한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부터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를 "롤모델"이라고 판단하고 본드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흡연 씬을 없앴으며, 성차별, 여성혐오, 인종차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씬과 설정 등도 없애나갔다.
이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시대 흐름에 맞춰 바꿀 건 바꾸고 조심할 건 조심하는 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제임스 본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타잎의 캐릭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묘사된 제임스 본드는 "롤모델"감의 캐릭터가 절대 아니다. 본드는 도덕, 윤리적으로 항상 올바른 무결점 캐릭터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섹시스트", "여성혐오자"라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다. 본드는 여자 간호사의 가슴을 허락없이 주물러도 잔소리 몇 마디 듣고나서 그 간호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리므로 "승리자"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친구는 절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이러한 다소 거친 부분들을 적당히 다듬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의 결점들을 영화에서 전부 다 걷어내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무조건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려 들 게 아니라 결점도 캐릭터의 특징 중 일부로 받아들이고 유지시켜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각에선 "허락없이 여자 가슴을 주무르는 제임스 본드를 원한다는 것이냐"고 따진다.
꼭 만질 필요까지야 있겠나 싶다.
하지만 원작소설에서부터 제임스 본드가 그런 캐릭터였다면 본드의 그런 면을 영화에서도 적당한 선에서 보여주는 게 옳다고 본다. 본드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능글맞은 플레이보이도 아니고 멜로드라마틱한 순정남도 아닌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묘사돼야 한다. 여기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도록 유머를 살짝 보태면 된다. 맹수라고 매번 사냥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매 영화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진부하고 무의미한 러브씬, 베드씬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섹시스트", "여성혐오자" 비판이 터져나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도 제임스 본드는 그런 비판을 계속 받게 돼있으므로 꼬리내리고 비위맞추려 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정면돌파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결점을 적당한 선에서 묘사하지 않고 항상 바른 행동만 하는 캐릭터로 만들면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아니다. "핸썸하고 우람한 무결점의 이상형 완벽남"은 남성들의 판타지 캐릭터가 아니라 여성들의 이상형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원작소설부터 남성 판타지였으므로 그런 특징을 적당히 유지해야 제임스 본드 시리즈답게 보인다. 물론 요즘엔 "여성용 판타지"라고 하면 박수를 받고 "남성용 판타지"라고 하면 야유를 받는 세상이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이런 걸 의식하면서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 바로 위에 적었듯이, 007 시리즈는 바로 잡으려 해도 끊임없이 같은 비판을 받게 돼있으므로 정면돌파를 하는 쪽이 낫다. 또한, 계속 눈치만 보며 뜯어고치다 자칫 영화 시리즈를 이상하게 망칠 위험도 있다. 비판에 놀아나다 007 시리즈의 색깔과 정체성을 모두 잃고 무너지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진은 비판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정면돌파할 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본드팬들이 지금의 007 제작진에게 바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조금 더 거칠어질 필요가 있다. 액션이나 폭력 수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제임스 본드의 보다 차갑고 인정사정 없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운 비열한 악당으로 보일 정도로 무자비한 본드의 '다크 사이드'를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한다. 본드는 절대로 상냥한 캐릭터가 아니다. 만약 본드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인물 쪽에 가깝다. 따라서 무결점의 수퍼히어로 이미지를 지우고 안티-히어로 쪽으로 약간 이동할 필요가 있다. 자꾸 이빨과 발톱을 감추려 하지 말고 포악하고 인정사정 없는 맹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대화를 할 때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극중 상대 캐릭터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쏠 때도 있어야 한다. 싫든 좋든 제임스 본드는 그런 캐릭터다. 갈수록 까다로와지는 'Political Correctness'에 조종당하면서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면 제임스 본드의 미래는 없다. 욕 먹는 걸 두려워 하는 건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의 아이덴티티 분명하게 해야
제임스 본드는 여러모로 실제로 존재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스파이의 삶을 스릴과 낭만으로 가득한 허구 세계로 묘사한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제임스 본드는 턱시도를 입고 마티니를 마시고, 미녀를 옆에 끼고 럭저리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면서 악당들을 처부수는 남성 판타지 캐릭터라고 해야 가장 정확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스파이 캐릭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보다 격렬하고 진지하고 사실적인 액션 스릴러가 유행하면서 "스타일"을 앞세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일부는 이를 두고 "제임스 본드는 지난 시대의 캐릭터"라고 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과장이 덜된 평범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캐릭터 또는 특수부대 요원 스타일은 '현재진행형' 이슈인 테러와의 전쟁 테마에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다. 또한, 요새 유행하는 어둡고 진지하고 격렬한 영화 스타일과도 매치가 잘 된다. 이런 현대적인 캐릭터들과 비교해보면 제임스 본드가 실제로 존재하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틈을 파고든 대표적인 캐릭터가 제이슨 본(Jason Bourne)이다.
007 시리즈도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제이슨 본 포뮬라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의 스타일을 뜯어고친다고 무조건 현대화되는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가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도록 007 제작진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요새 유행만을 열심히 따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제작진이 다른 영화들을 열심히 따라한 덕분에 최신 유행하는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 영화들과 많이 비슷해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선 삶을 즐길 줄 알던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사라졌고 항상 고통에 시달릴 정도로 머리 속이 복잡한 캐릭터가 됐다. 이건 올바른 본드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건 문제될 게 없지만 쓸데없는 부분을 지나치게 건드렸다. 적당히 어둡고 진지해지는 건 환영이지만, 본드를 우중충하고 머리가 복잡한 캐릭터로 바꾸는 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본드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이전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캐릭터로 이제 와서 변신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다. 소설 시리즈로 60년이 넘었고 영화 시리즈도 5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제임스 본드를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새로 선보인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누가 제임스 본드를 맡든 제임스 본드는 항상 제임스 본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배우로 교체될 때마다 각자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약간씩 변화를 주는 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제임스 본드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를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요즘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스파이 캐릭터를 헐리우드가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50년이 넘도록 007 시리즈를 제작해온 007 제작진마저도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를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현시대에 올바르게 접목시키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007 시리즈가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워너 브러더스의 스파이 영화 '맨 프롬 엉클(Man from U.N.C.L.E)'은 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시대 배경만 바꾼다고 술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약 007 시리즈가 이제 와서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바꾼다면 더이상 묘책이 없다며 제작진이 스스로 항복한 것으로 비쳐지기 딱 알맞다. 이제 와서 60년대 배경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면 "안 봐도 비디오"인 뻔할뻔자 영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클래식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스파이 영화를 더이상 만들 수 없는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요란거창하게 "리부트"를 할 필요도 없고 60년대로 시대를 바꿀 필요도 없다. 그저 과거에 하던대로 하면서 스토리 등 몇 가지만 현시대에 맞게 설정하면 된다. 제임스 본드는 멋진 옷을 입고 경치 좋은 세계적인 휴양지를 어슬렁거리면 된다.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비키니 차림의 본드걸들까지 보태면 할 일 다 한 것이다. 여기에 시대에 맞는 스토리만 곁들이면 된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007 시리즈에 멋과 낭만을 보태면 영화 줄거리가 산으로 가는 고질적인 문제는 007 제작진의 문제이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영화를 더이상 만들 수 없어서가 아니다. 현시대에 맞는 그럴 듯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만 준비된다면 클래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소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제대로만 한다면 21세기인 지금도 클래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에 맞는 스파이 스릴러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물론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약간 시대에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약간 빗나가는 부분은 코믹하게 처리하면 된다. 제임스 본드가 턱시도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보기에 따라 시대에 맞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본드가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는 씬이 나오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007 스펙터'에서 본드가 흰색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는 씬에서도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턱시도가 제임스 본드의 비공식 유니폼으로 불리기 때문에 턱시도 씬이 나오면 "드디어 나올 게 나왔구나" 하면서 웃는 것이다. 007 시리즈를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요새 어떤 스파이가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냐"며 비현실성을 지적할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임스 본드를 실제로 존재하는 21세기 MI6 오피서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서 제임스 본드가 아무리 리얼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가공의 인물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도 실제 MI6 오피서로 보일 정도로 리얼해지지 않았다. 본드가 Q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낄낄거리는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Q, 데스몬드 류웰린(Desmond Llewelyn) 시절엔 더욱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가장 진지하고 격렬한 007 시리즈 중 하나로 꼽히는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에서도 Q가 등장하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상당수의 영화 관객들이 그런 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씬들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007 시리즈를 보면서 그 정도도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꽉 막힌 사람들은 많지 않다. 따라서 약간 시대에 맞지 않거나 어색해 보이는 부분은 코믹하게 처리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된다.
이렇듯 007 시리즈의 문제는 제임스 본드에 있는 게 아니다. 007 포뮬라를 울궈먹으면서 무성의하게 재탕, 삼탕한 건 아이디어가 부족한 제작진의 책임이지 제임스 본드의 책임이 아니다. 유행이니 시대흐름이니 하면서 상황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도 흥행실패의 공포에 시달리는 제작진의 작품이지 제임스 본드의 책임이 아니다.
문제는, 007 제작진이 올바른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007 제작진이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문제를 007 시리즈에서 다룬 이유도 본드가 21세기 캐릭터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는데, 그런 것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다. 007 제작진이 현재진행형 이슈를 007 시리즈에 응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를 고용하라는 것이다. 그쪽 바닥에 밝은 전문가를 고용해야 현시대에 맞고 007 시리즈에도 어울리는 그럴 듯한 플롯을 기대할 수 있다. 스파이 쟝르 전문가가 그럴 듯한 플롯을 만들어주면 007 제작진은 거기에 007 시리즈적인 요소들을 심어넣는 작업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차기 제임스 본드도 안정적으로 정할 수 있다. 완전히 색다른 제임스 본드를 다시 탄생시키기 위해 쇼킹한 배우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진다. 제작진이 올바른 방법을 찾기만 하면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거나 007 시리즈를 물구나무 세우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불필요한 뜯어고치기 없이도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시대에 맞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오지 않고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새출발하게 된다면 또다시 색다른 방향으로 리부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다음 번에도 또 그런 식으로 하면 007 시리즈가 더이상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부터 '스펙터(SPECTRE)'까지 네 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출연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본드25'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고 새로운 배우로 교체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2016년 8월 현재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현재 들리는 바에 따르면 '본드25'가 2018년 개봉 예정이라고 하므로 늦어도 내년 이맘 때가 되면 누가 '본드25'에 제임스 본드로 출연하는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올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하지만 이번 포스팅에선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얼굴로 바뀐다는 가정 하에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의도적인 "원석 가공하기" 그만
60년대 초 007 제작진이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하자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과 영화감독 테렌스 영(Terence Young) 등이 못마땅해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소설 속의 제임스 본드는 깔끔한 외모에 옷을 잘 입는 상류층 신사 타잎인데, 숀 코네리는 거칠고 우락부락한 타잎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코네리가 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너무 딴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007 제작진은 우락부락한 코네리를 정장이 잘 어울리는 젠틀맨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코네리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는 것만 보더라도 "숀 코네리 제임스 본드 만들기" 작전이 대성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작자와 영화감독 모두 숀 코네리 캐스팅을 못마땅해 하는 등 스타트는 과히 좋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론 007 제작진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코네리의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와 세 번째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도 흥행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코네리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코네리는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훌륭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영화평론가들은 코네리의 성공에 대해 "007 제작진이 숨은 보석을 찾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던 코네리를 발굴해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2000년대 중반, 007 제작진은 또다시 다소 의외의 배우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했다.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다. 블론드에 단신인데다 깔끔한 미남형도 아닌 크레이그를 제임스 본드로 선택하자 많은 본드팬들이 불만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크레이그가 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너무 딴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영화로 옮기면서 크레이그를 젊고 거친 초보 00 에이전트로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데뷔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본드팬들이 많았으나, 크레이그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은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 영화 탑 5 안에 들 만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영화부터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코네리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가장 이상적인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켜갔던 것과 달리 크레이그는 그만의 개성있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Jason Bourne) 같다",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같다", "제임스 본드 영화가 아니라 평범한 액션영화처럼 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크레이그가 그만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저런 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물론 흥행 면에선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캐릭터 면에선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다소 의외의 배우를 갓 00 에이전트가 된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해서 '카지노 로얄'로 신선하다는 평을 받은 것까진 좋았으나 그 이후부터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만들기"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21세기 007 제작진도 과거 60년대 제작진이 했던 것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가공해 멋진 다이아몬드로 만들려 했으나, 원석만 준비했을 뿐 가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007 제작진은 크레이그의 네 번째 영화 '스펙터(SPECTRE)'에서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그런 시도는 크레이그의 두 번째 영화에서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크레이그가 신선하고 색다르면서도 낯익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엔 차기 제임스 본드를 선정할 때 "원석 가공하기"를 또 할 생각을 하지 말고 제임스 본드 역으로 무난해 보이는 배우를 선택하는 게 좋을 듯 하다.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배우를 선택하면 흥미없어 보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처럼 보이지 않는 배우를 선택해 제임스 본드로 만들려는 "원석 다듬기"를 계속 고집하다간 더 이상해질 수 있다. 물론 원석을 다듬어 멋진 다이아몬드를 만들면 더욱 눈에 띌 뿐 아니라 가공 실력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통해 21세기 007 제작진의 가공 실력이 과히 높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이번에 차기 제임스 본드를 선택할 땐 보다 안정적인 후보 중에서 고르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 한다. 지나치게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배우도 아니고 쇼킹할 정도로 제임스 본드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배우도 아닌 그 중간 정도에 해당되는 배우들 중에서 고르는 게 가장 올바를 듯 하다.
◆지나친 'Political Correctness' 의식 중단하고 맹수 본능 되찾아야
제임스 본드가 "60년대 산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소설로는 1953년, 영화로는 1962년부터 시작했으며, 007 시리즈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시기가 60년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007 시리즈에 5060년대 컬쳐가 듬뿍 묻어있던 시기가 007 시리즈의 황금기였으며, 21세기인 지금도 그 때 그 시절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Political Correctness' 공격 쪽에 보다 가깝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60년대의 007 시리즈처럼 그대로 만들면 요즘의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엄격한 'Political Correctness' 룰과 충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엄격하고 예민해지는 'Political Correctness' 덕분에 "요새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요새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 수 없다"가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007 시리즈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따라 지난 90년대부터 'Political Correctness'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007 시리즈가 남의 눈치를 보며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흡연 씬이 사라진 것도 90년대부터이며, 본드걸들이 하나같이 한가닥하는 강한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부터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를 "롤모델"이라고 판단하고 본드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흡연 씬을 없앴으며, 성차별, 여성혐오, 인종차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씬과 설정 등도 없애나갔다.
이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시대 흐름에 맞춰 바꿀 건 바꾸고 조심할 건 조심하는 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제임스 본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타잎의 캐릭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묘사된 제임스 본드는 "롤모델"감의 캐릭터가 절대 아니다. 본드는 도덕, 윤리적으로 항상 올바른 무결점 캐릭터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섹시스트", "여성혐오자"라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다. 본드는 여자 간호사의 가슴을 허락없이 주물러도 잔소리 몇 마디 듣고나서 그 간호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리므로 "승리자"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친구는 절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이러한 다소 거친 부분들을 적당히 다듬는 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의 결점들을 영화에서 전부 다 걷어내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무조건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려 들 게 아니라 결점도 캐릭터의 특징 중 일부로 받아들이고 유지시켜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각에선 "허락없이 여자 가슴을 주무르는 제임스 본드를 원한다는 것이냐"고 따진다.
꼭 만질 필요까지야 있겠나 싶다.
하지만 원작소설에서부터 제임스 본드가 그런 캐릭터였다면 본드의 그런 면을 영화에서도 적당한 선에서 보여주는 게 옳다고 본다. 본드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능글맞은 플레이보이도 아니고 멜로드라마틱한 순정남도 아닌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묘사돼야 한다. 여기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도록 유머를 살짝 보태면 된다. 맹수라고 매번 사냥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매 영화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진부하고 무의미한 러브씬, 베드씬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섹시스트", "여성혐오자" 비판이 터져나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도 제임스 본드는 그런 비판을 계속 받게 돼있으므로 꼬리내리고 비위맞추려 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정면돌파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결점을 적당한 선에서 묘사하지 않고 항상 바른 행동만 하는 캐릭터로 만들면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아니다. "핸썸하고 우람한 무결점의 이상형 완벽남"은 남성들의 판타지 캐릭터가 아니라 여성들의 이상형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원작소설부터 남성 판타지였으므로 그런 특징을 적당히 유지해야 제임스 본드 시리즈답게 보인다. 물론 요즘엔 "여성용 판타지"라고 하면 박수를 받고 "남성용 판타지"라고 하면 야유를 받는 세상이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이런 걸 의식하면서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 바로 위에 적었듯이, 007 시리즈는 바로 잡으려 해도 끊임없이 같은 비판을 받게 돼있으므로 정면돌파를 하는 쪽이 낫다. 또한, 계속 눈치만 보며 뜯어고치다 자칫 영화 시리즈를 이상하게 망칠 위험도 있다. 비판에 놀아나다 007 시리즈의 색깔과 정체성을 모두 잃고 무너지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진은 비판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정면돌파할 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본드팬들이 지금의 007 제작진에게 바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조금 더 거칠어질 필요가 있다. 액션이나 폭력 수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제임스 본드의 보다 차갑고 인정사정 없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운 비열한 악당으로 보일 정도로 무자비한 본드의 '다크 사이드'를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한다. 본드는 절대로 상냥한 캐릭터가 아니다. 만약 본드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인물 쪽에 가깝다. 따라서 무결점의 수퍼히어로 이미지를 지우고 안티-히어로 쪽으로 약간 이동할 필요가 있다. 자꾸 이빨과 발톱을 감추려 하지 말고 포악하고 인정사정 없는 맹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대화를 할 때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극중 상대 캐릭터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쏠 때도 있어야 한다. 싫든 좋든 제임스 본드는 그런 캐릭터다. 갈수록 까다로와지는 'Political Correctness'에 조종당하면서 흐느적거리기 시작하면 제임스 본드의 미래는 없다. 욕 먹는 걸 두려워 하는 건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의 아이덴티티 분명하게 해야
제임스 본드는 여러모로 실제로 존재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스파이의 삶을 스릴과 낭만으로 가득한 허구 세계로 묘사한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제임스 본드는 턱시도를 입고 마티니를 마시고, 미녀를 옆에 끼고 럭저리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면서 악당들을 처부수는 남성 판타지 캐릭터라고 해야 가장 정확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스파이 캐릭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보다 격렬하고 진지하고 사실적인 액션 스릴러가 유행하면서 "스타일"을 앞세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일부는 이를 두고 "제임스 본드는 지난 시대의 캐릭터"라고 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과장이 덜된 평범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캐릭터 또는 특수부대 요원 스타일은 '현재진행형' 이슈인 테러와의 전쟁 테마에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다. 또한, 요새 유행하는 어둡고 진지하고 격렬한 영화 스타일과도 매치가 잘 된다. 이런 현대적인 캐릭터들과 비교해보면 제임스 본드가 실제로 존재하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틈을 파고든 대표적인 캐릭터가 제이슨 본(Jason Bourne)이다.
007 시리즈도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서 제이슨 본 포뮬라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의 스타일을 뜯어고친다고 무조건 현대화되는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가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도록 007 제작진이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요새 유행만을 열심히 따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007 제작진이 다른 영화들을 열심히 따라한 덕분에 최신 유행하는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 영화들과 많이 비슷해지는 효과는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선 삶을 즐길 줄 알던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사라졌고 항상 고통에 시달릴 정도로 머리 속이 복잡한 캐릭터가 됐다. 이건 올바른 본드가 아니다.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건 문제될 게 없지만 쓸데없는 부분을 지나치게 건드렸다. 적당히 어둡고 진지해지는 건 환영이지만, 본드를 우중충하고 머리가 복잡한 캐릭터로 바꾸는 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본드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이전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캐릭터로 이제 와서 변신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다. 소설 시리즈로 60년이 넘었고 영화 시리즈도 5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제임스 본드를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새로 선보인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누가 제임스 본드를 맡든 제임스 본드는 항상 제임스 본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배우로 교체될 때마다 각자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약간씩 변화를 주는 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제임스 본드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를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요즘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스파이 캐릭터를 헐리우드가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50년이 넘도록 007 시리즈를 제작해온 007 제작진마저도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를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리지날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현시대에 올바르게 접목시키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007 시리즈가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워너 브러더스의 스파이 영화 '맨 프롬 엉클(Man from U.N.C.L.E)'은 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시대 배경만 바꾼다고 술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약 007 시리즈가 이제 와서 시대 배경을 60년대로 바꾼다면 더이상 묘책이 없다며 제작진이 스스로 항복한 것으로 비쳐지기 딱 알맞다. 이제 와서 60년대 배경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면 "안 봐도 비디오"인 뻔할뻔자 영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클래식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스파이 영화를 더이상 만들 수 없는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만들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요란거창하게 "리부트"를 할 필요도 없고 60년대로 시대를 바꿀 필요도 없다. 그저 과거에 하던대로 하면서 스토리 등 몇 가지만 현시대에 맞게 설정하면 된다. 제임스 본드는 멋진 옷을 입고 경치 좋은 세계적인 휴양지를 어슬렁거리면 된다.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비키니 차림의 본드걸들까지 보태면 할 일 다 한 것이다. 여기에 시대에 맞는 스토리만 곁들이면 된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007 시리즈에 멋과 낭만을 보태면 영화 줄거리가 산으로 가는 고질적인 문제는 007 제작진의 문제이지 클래식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영화를 더이상 만들 수 없어서가 아니다. 현시대에 맞는 그럴 듯한 스파이 스릴러 플롯만 준비된다면 클래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소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제대로만 한다면 21세기인 지금도 클래식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에 맞는 스파이 스릴러 영화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물론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약간 시대에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약간 빗나가는 부분은 코믹하게 처리하면 된다. 제임스 본드가 턱시도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보기에 따라 시대에 맞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본드가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는 씬이 나오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007 스펙터'에서 본드가 흰색 턱시도를 입고 등장하는 씬에서도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턱시도가 제임스 본드의 비공식 유니폼으로 불리기 때문에 턱시도 씬이 나오면 "드디어 나올 게 나왔구나" 하면서 웃는 것이다. 007 시리즈를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요새 어떤 스파이가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냐"며 비현실성을 지적할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임스 본드를 실제로 존재하는 21세기 MI6 오피서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서 제임스 본드가 아무리 리얼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가공의 인물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도 실제 MI6 오피서로 보일 정도로 리얼해지지 않았다. 본드가 Q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낄낄거리는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Q, 데스몬드 류웰린(Desmond Llewelyn) 시절엔 더욱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가장 진지하고 격렬한 007 시리즈 중 하나로 꼽히는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에서도 Q가 등장하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상당수의 영화 관객들이 그런 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진지하고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씬들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007 시리즈를 보면서 그 정도도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꽉 막힌 사람들은 많지 않다. 따라서 약간 시대에 맞지 않거나 어색해 보이는 부분은 코믹하게 처리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된다.
이렇듯 007 시리즈의 문제는 제임스 본드에 있는 게 아니다. 007 포뮬라를 울궈먹으면서 무성의하게 재탕, 삼탕한 건 아이디어가 부족한 제작진의 책임이지 제임스 본드의 책임이 아니다. 유행이니 시대흐름이니 하면서 상황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면서 제임스 본드 영화라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도 흥행실패의 공포에 시달리는 제작진의 작품이지 제임스 본드의 책임이 아니다.
문제는, 007 제작진이 올바른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007 제작진이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문제를 007 시리즈에서 다룬 이유도 본드가 21세기 캐릭터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는데, 그런 것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다. 007 제작진이 현재진행형 이슈를 007 시리즈에 응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를 고용하라는 것이다. 그쪽 바닥에 밝은 전문가를 고용해야 현시대에 맞고 007 시리즈에도 어울리는 그럴 듯한 플롯을 기대할 수 있다. 스파이 쟝르 전문가가 그럴 듯한 플롯을 만들어주면 007 제작진은 거기에 007 시리즈적인 요소들을 심어넣는 작업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차기 제임스 본드도 안정적으로 정할 수 있다. 완전히 색다른 제임스 본드를 다시 탄생시키기 위해 쇼킹한 배우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진다. 제작진이 올바른 방법을 찾기만 하면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거나 007 시리즈를 물구나무 세우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불필요한 뜯어고치기 없이도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시대에 맞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오지 않고 007 제작진이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새출발하게 된다면 또다시 색다른 방향으로 리부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다음 번에도 또 그런 식으로 하면 007 시리즈가 더이상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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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삭제저도 색다른 본드보다 기본에 충실한 본드를 원합니다.
답글삭제트위터나 여타 매체보면 흑인본드,여자본드 원하시는 분들 많던데....
틸다스윈튼을 여자본드로 하자고 말씀하시는분들보면
그냥 새로운 매력있는 여성스파이를 만들면되지. 굳이 남자인 캐릭터를 여자로 만들어서 개성을 없어버리게하고싶어할까 라는 생각 밖에 안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삭제본드는 오랜 역사를 지닌 캐릭터라서 이제 와서 색다르게 바꾸기 힘들다고 봅니다.
기본적인 조건과 특징은 유지하면서 배우 교체시 약간씩 변화를 주는 걸로 충분하죠.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제임스 본드를 리버럴 어젠다 실험용으로 쓰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젠 흑인본드, 여자본드, 게이본드 주장이 정치적 공격으로 보입니다.
굳이 007 시리즈에서 보길 원한다면 흑인 008, 여자 009 스핀오프를 만들면 되겠죠.
그러나 007 제작진이 마블 스타일의 세계공유를 원치 않는 듯 하므로 어려울 듯 합니다.
고스트 버스터즈 2016이 흥행 참패하고도 과연 여성본드 만들까요. 여성 주연으로 만들고 싶으면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하면 되지 왜 오랜 팬들 엿먹여놓고 양성평등이라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네요.
답글삭제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여성본드를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로 헷갈리는 사람들은 아닐겁니다.
삭제전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역사 깊은 영화 시리즈엔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죠.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문제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