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9일 월요일

제임스 본드는 결점 있는 캐릭터 맞지만 모두 바로잡으려 해선 안 된다

"007 시리즈"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50년대에 소설 시리즈로 시작해서 60년대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영화 시리즈로 계속되면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대표하는 여러 가지 전통과 특징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중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가볍게 즐기기에 알맞은 스타일리쉬한 어드벤쳐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나 이와 동시에 성차별, 인종차별 등 여러 논란에도 꾸준히 휘말려왔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이러한 논란에 수시로 휘말리는 이유는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이 창조한 소설 시리즈부터 논란 거리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본드걸"로 불리는 여성 캐릭터가 "오락용", "눈요깃감"으로 등장한 것이 소설 시리즈부터다. 소설 '썬더볼(Thunderball)'에서는 본드가 여간호사의 가슴을 허락없이 만지기도 한다. 사실상 성추행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고 거꾸로 두 캐릭터가 서로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식이다.

플레밍은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적이었던 독일에 대한 적대감, 냉전시대 라이벌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또한, 흑인, 아시안 등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을 몇 차례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단지 인종편견으로 해석할 게 아니라 악당을 더욱 악랄하게 묘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레밍이 적을 항상 "외국인"으로 설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단순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원작 소설부터 원래 어떠했는가를 이해하고 즐길 필요가 있다.

이언 플레밍 역시 제임스 본드를 "Good Guy"로 규정하지 않았다. 플레밍은 플레이보이(Playboy)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제임스 본드가 "Good Guy"도 아니고 "Bad Guy"도 아닌 결점을 가진 캐릭터라면서, 본드를 호감이 가는 캐릭터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Playboy: One reviewer has written of Bond, “He is the bad guy who smoulders in every good citizen.” Do you agree?

Fleming: I don’t think that he is necessarily a good guy or a bad guy. Who is? He’s got his vices and very few perceptible virtues except patriotism and courage, which are probably not virtues anyway. He’s certainly got little in the way of politics, but I should think what politics he has are just a little bit left of center. And he’s got little culture. He’s a man of action, and he reads books on golf, and so on—when he reads anything. I quite agree that he’s not a person of much social attractiveness. But then, I didn’t intend for him to be a particularly likable person. He’s a cipher, a blunt instrument in the hands of government.
(중략)
Playboy: Do you consider his sexual prowess, and his ruthless way with women, to be true to life—even among commandos and secret-service men?

Fleming: Naturally not; but we live in a violent age. Seduction has, to a marked extent, replaced courtship. The direct, flat approach is not the exception; it is the standard. James Bond is a healthy, violent, noncerebral man in his middle thirties, and a creature of his era. I wouldn’t say he’s particularly typical of our times, but he is certainly of the times. Bond’s detached; he’s disengaged. But he’s a believable man—around whom I try to weave a great web of excitement and fantasy. In that, at least, we have very little in common. Of course, there are similarities, since one writes only of what one knows, and some of the quirks and characteristics that I give Bond are ones that I know about. When I make him smoke certain cigarettes, for example, it’s because I do so myself, and I know what these things taste like, and I have no shame in giving them free advertising.

From "Playboy Interview"

따라서, 제임스 본드는 결점이 있는 완벽하지 않은 캐릭터가 맞는다. 항상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는 정의로운 히어로가 아니다. 싫든 좋든 이것이 제임스 본드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잘못된 부분은 고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하게도 맞는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고칠 것이냐다.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하는 건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조건 바꾸고 고치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원작 소설부터 수십년간 여러 논란거리를 달고 다녔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이제와서 싹 달라지는 건 불가능한 얘기다. 어느 정도껏 수위 조절은 가능하겠지만, 수십년동안 007 시리즈의 전통과 특징으로 깊게 뿌리내린 결점들을 이제와서 걷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싫든 좋든 그 결점들도 이젠 007 시리즈의 한 부분이 됐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이 나서서 "바꾸겠다"고 떠들고 다녀도 웃음거리가 되기 딱 알맞다. 이제와서 바로 잡겠다는 소리가 되레 엉뚱하고 코믹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사과를 오렌지로 바꾸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본드25'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것으로 최근 전해진 영국 영화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은 "#MeToo", "Time's Up" 시대가 반영된 본드걸 캐릭터를 준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After being asked if Bond Girls could be depicted in a different light in the #MeToo and Time’s Up era, Boyle told Page Six on Thursday, “You write in real time." 
At an event for his upcoming FX series “Trust,” he said, “You acknowledge the legacy of the world [of Bond] and you write in the world — but you also write in the modern world as well.” - NY Post


대니 보일의 "#MeToo 본드걸" 발언은 여러 영국 언론들에 의해 보도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가디언의 반응이다.

가디언은 "A #MeToo Bond defeats the whole object of the spy who love me"라는 제목의 오피니언을 실었다. 오피니언을 쓴 바바라 엘런(Barbara Ellen)은 "Danny Boyle faces an uphill struggle in his plan for a 'woke' 007"이라고 썼다.

"I’m not mocking #MeToo; I’m mocking the idea of a woke Bond. Bond isn’t just a character any more: he’s a construct, verging on a subculture, a spy-themed homage to the vanishing world of “man’s man” wish fulfilment, where tuxedo-clad heroes womanise and shoot people, and female characters primarily exist to look sexy and impressed, albeit in a “fierce”, “challenging” kind of way." - Barbara Ellen


제임스 본드 컬쳐와 사실상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007 시리즈를 모던化 한다"면서 이제와서 연결지으려 하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눈에 바로 띄게 낯 간지러운 수준의 변화를 줘봤자 되레 더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ULTRA-MASCULINIST" 제임스 본드 컬쳐를 이제와서 바꾸기 힘들 것이란 얘기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찌하든 간에 이래저래 별 소용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제임스 본드가 "성차별자", "인종차별자"라는 비판을 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가끔식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게 본드의 특징 중 하나라는 점 또한 이해해야 한다. 제임스 본드가 원래 그런 면이 있는 캐릭터라는 점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지나치게 높은 수위의 폴리티컬 코렉네스(Political Correctness: 줄여서 PC) 컬쳐가 확산되면서 웃어넘겨도 될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이며 발끈거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미국에서 "스노우플레이크(Snowflake)"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그룹에 해당된다. 일부 미국 코미디언들은 지나친 PC 컬쳐로 "스노우플레이크"가 늘어나면서 이젠 별것 아닌 사소한 농담에도 "불쾌하다", "모욕감을 줄 수 있다"는 비판을 쉽게 받을 수 있어서 일하기 힘들다고 푸념한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높은 수위의 PC 컬쳐를 요구하는 "스노우플레이크" 입맛에 맞추려 하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007 제작진 입장에서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만,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제임스 본드의 결점을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나치게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도록 수위 조절을 하는 정도에서 적당히 머물러야 한다.

007 제작진은 제임스 본드의 모든 결점을 모두 없애거나 바로잡으려 해선 안 된다. 요즘 시대에 맞춰 너무 지나치다 싶은 건 피하는 게 좋겠지만, 그렇다고 제임스 본드의 결점 모두를 없애려 해선 안 된다. 결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남"은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본드의 결점을 모두 걷어내면서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 필요가 없다.

결점이 없는 캐릭터가 되면 재미가 없는 캐릭터가 될 수 있다. 임무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모범생"이 되면 캐릭터가 싱거워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제임스 본드가 결점 투성이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안 그런 척 딴짓을 하는 것처럼 비쳐지면 이것 또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준비한 "변화"를 보면서 쉽게 감동할 사람은 많지 않다. 전세계의 수많은 영화팬들이 007 시리즈가 어떠한 영화 시리즈라는 걸 이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제와서 안 그런 척, 달라진 척 생색내기를 한다고 통할 것 같은가?

왠지 "Danny Boyle Directing Daniel Craig's James Bond Finale May Be Bad News For 007 Fans"라는 제목의 포브스(Forbes) 오피니언에 자꾸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캇 멘델슨(Scott Mendelson)이 제대로 봤다. 최고의 007 시리즈로 불리는 영화들은 유명 영화감독이 아니라 007 시리즈를 훤히 꿰뚫고 있는 전문가들의 작품인 것이 사실이다.

"The good news is that Danny Boyle is an Oscar-winning director. The bad news, to the extent that it matters, is that having an esteemed auteur at the helm is no guarantee of a great 007 flick. Most of the examples of esteemed directors taking a crack at 007 resulted in divisive (or outright loathed) installments.

Up until the Pierce Brosnan era, the James Bond films were mostly directed by genre directors who, well, specialized in James Bond movies.
(중략)
The 007 franchise is a producer-driven series, not unlike the MCU today, with the Broccolis determining the overall path and tone for each new installment.
(중략)
The very idea of an esteemed and award-winning director playing in the James Bond sandbox is a relatively new one. But with the admittedly limited available evidence, you might argue that the most popular 007 flicks are the ones that come from the straightforward genre filmmakers. But even among the action-centric filmmakers, we have instances where a guy makes one of the great Bond movies and then follows up with one of the worst. History shows that news of Danny Boyle directing a 007 flick should be more exciting to Danny Boyle fans than to 007 fans." - Forbes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