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1일 목요일

랄프 파인즈가 007 시리즈에 M으로 계속 출연하고 싶다는데...

2012년 공개된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부터 M으로 출연 중인 영국배우,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가 2020년 개봉 예정인 '본드25' 이후에도 계속 M 역을 맡고 싶다고 야후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본드25'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로 알려졌으나 파인즈는 계속해서 007 시리즈에 M으로 출연하고 싶다는 것.

사실 이것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영화배우가 바뀔 때마다 M까지 함께 교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62년 공개된 007 시리즈 1탄 '닥터노(Dr. No)'부터 1979년 공개된 007 시리즈 11탄 '문레이커(Moonraker)'까지 M으로 출연했던 영국 배우, 버나드 리(Bernard Lee)는 숀 코네리(Sean Connery),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 로저 무어(Roger Moore)까지 세 명의 다른 제임스 본드 영화배우들과 출연했다.

80년대 초 버나드 리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 영국 배우,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1983년작 '옥토퍼시(Octopussy)'부터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까지 M으로 출연했다. 80년대에 M을 맡은 브라운은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과 007 시리즈에 출연했다.

1995년작 '골든아이(GoldenEye)'에서 2012년작 '스카이폴'까지 M으로 출연한 영국 배우, 주디 덴치(Judy Dench)도 마찬가지다. 덴치도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다니엘 크레이그와 출연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 M으로 출연했던 배우들은 2명 이상의 다른 제임스 본드 배우들과 출연했다. 제임스 본드 배우가 바뀌었다고 M까지 교체된 것이 아니라 제임스 본드 얼굴만 바뀌고 M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랄프 파인즈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M으로 출연하고 싶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본드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에 M을 맡았던 배우들이 모두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그렇다. 역시 문제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007 시리즈는 줄거리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리즈"라고 하면 "전편과 줄거리가 계속 이어지는 속편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리즈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007 시리즈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007 시리즈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원래 007 시리즈는 모든 영화가 독자적인 스토리를 갖춘 스탠드-얼론(Stand-Alone)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전까지의 007 시리즈는 하나의 큰 줄거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식의 시리즈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007 시리즈 5탄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서는 숀 코네리가 제임스 본드였고 도널드 플리센스(Donald Pleasence)가 블로펠드로 출연했으나, 007 시리즈 6탄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는 조지 레이전비가 제임스 본드였고 텔리 사발라스(Telly Savalas)가 블로펠드로 출연했으며, 007 시리즈 7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에서는 숀 코네리가 제임스 본드, 찰스 그레이(Charles Gray)가 블로펠드로 출연했다. 뿐만 아니라, 본드(숀 코네리)와 블로펠드(도널드 필리센스)가 5탄 '두 번 산다'에서 직접 만났는데도 6탄 '여왕폐하의 007'에서는 본드(조지 레이전비)와 블로펠드(텔리 사발라스)가 처음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5탄에서 본드와 블로펠드가 만났을 뿐 아니라 블로펠드가 두목으로 있는 범죄조직, "스펙터"가 007 시리즈 1탄 '닥터노'부터 등장했는데 블로펠드가 본드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2탄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스펙터와 블로펠드가 본드를 직접 타겟으로 삼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는 스펙터가 본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짠다는 줄거리였다. 이러한 007 시리즈를 전편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시리얼(Serial) 스타일의 시리즈물로 해석하려면 상당한 상상력을 동원해 억지로 만들어서 짜맞추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007 시리즈가 단편 모음집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각기 다른 스토리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가 바뀌었는데 M이 교체되지 않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다. 전작과의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버나드 리, 로버트 브라운, 주디 덴치가 2명 이상의 제임스 본드 배우들과 출연했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는 이야기가 바뀌었다. 줄거리가 서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시리얼 스타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편과 세계와 줄거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속편 시리즈로 변한 것이다.

과거에는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을 배우만 바꾸고 나머지는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완전히 종결시키고 새로운 배우와 함께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리부트"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가 계속 연결되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와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제임스 본드와 함께 약간의 톤만 바꾸는 정도로 충분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에 약간 힘들어 보인다. 줄거리가 연결되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종결시키고 새로 시작하려면 "하드 리셋"을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하드 리셋"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리부트"라고 부를 정도의 의미있는 큰 변화를 줄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의 전세계 영화관객들이 007 시리즈가 독립된 영화 시리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거리가 연결되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에 익숙해진 요즘 영화관객들에게는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후로도 계속해서 줄거리가 연결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007 시리즈에서는 줄거리가 연결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거꾸로 그게 당연한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 이후로 계속해서 줄거리가 연결되도록 만드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들은 정상적인 옵션이 아니다. 007 시리즈가 정상적으로 계속된다면 새로운 배우와 함께 리부트를 하는 게 100%이므로 지금은 비정상적인 옵션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가 종결된 이후에는 "하드 리셋"이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007 제작진이 이후에도 또 줄거리가 연결되는 시리얼 시리즈를 계속 고수한다면 영화배우가 바뀔 때마다 "하드 리셋"을 해야 하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과거처럼 안정적으로 시리즈가 이어지지 못하고 다른 시리즈물처럼 리부트에 리부트를 반복하는 시리즈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바로 이것이 007 시리즈의 장수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007 제작진이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007 시리즈의 생명을 단축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부 "본드팬"들 사이에서는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가 죽으면서 끝나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지금은 이것이 '본드25' 제작 루머가 되어 나돌고 있으나, 원래는 '본드25' 루머가 나돌기 한참 전부터 "본드팬"들 사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어떻게 종결시키는게 이상적인가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나왔던 이야기다. "본드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007 시리즈의 미래이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를 종결시키고 별다른 부작용 없이 그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랄프 파인즈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후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M으로 계속 출연한다면?

007 시리즈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여지껏 계속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007 시리즈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랄프 파인즈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이후에도 계속 M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세계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하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파인즈가 M으로 계속 출연하길 원한다고 밝혔다는 소식을 반기면서도 이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머리를 긁적이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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