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데이먼이 '본 얼티메이텀(Bourne Ultimatum)' 마케팅용으로 007 시리즈를 밟고가기로 하면서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제이슨 본과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비교하더니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헐리우드 리포터에 의하면 'Bourne Supremacy'와 'Bourne Ultimatum'의 액션씬을 담당한 댄 브래들리(Dan Bradley)가 '본드22(제목미정)'의 세컨드 유닛 감독(2nd Unit Director)을 맡았다고 한다. 댄 브래들리는 'Bourne Supremacy'와 'Bourne Ultimatum'에서 스턴트 코디네이터 겸 세컨드 유닛 감독으로 자동차 액션씬과 격투씬을 담당했다고.
007 프로듀서들이 댄 브래들리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는 뻔한 것이다.
이번에도 가젯들이 나오지 않을테니 자동차 스턴트, 맨손격투 등 리얼한 액션씬을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댄 브래들리를 '본드22' 세컨드 유닛 감독으로 정한 건 아무리 봐도 내거티브하게 나온 제이슨 본 시리즈 쪽에 대한 007 프로듀서의 '응답'으로 보이기도 한다. 계속 그렇게 궁시렁거리겠다면 어디 한번 해보자는 것처럼 보인단 것이다.
그런데, 제이슨 본 시리즈의 것처럼 만들라고?
꼭 그런 건 아니다.
007 제작팀이 댄 브래들리를 픽업한 건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처럼 가젯에 의존하지 않는 리얼한 액션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골드핑거(1964)', '썬더볼(1965)', '두번 산다(1967)'까지는 가젯사용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코믹북 캐릭터 같은 제임스 본드가 나왔지만 '여왕폐하의 007'에선 가젯들을 걷어내고 이언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원작 스타일로 돌아가면 가젯이 빠진 빈공간을 다른 걸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설명 안해도 알 수 있다: 리얼한 액션과 스턴트다.
제임스 본드가 운전하는 도중에 적과 마주쳤다면 '골드핑거'에서처럼 본드가 느긋하게 스위치 박스를 열어젖힐 것 같지만 '여왕폐하의 007'에선 아니다. 쫓아오는 적을 따돌리고 싶은데 버튼을 누르면 미사일이 나가는 장치가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면 '제대로' 운전하는 수밖에 없다.
'여왕폐하의 007' 이후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다시 가젯으로 돌아간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 '문레이커(Moonraker)'가 대표적이다. '문레이커'에선 광선총까지 나오고 제임스 본드가 스페이스 셔틀을 타고 우주까지 나간다. 이언 플레밍의 '문레이커' 소설이 1955년에 나왔으니 책엔 스페이스 셔틀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다가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에서 다시 플레밍의 본드로 돌아온다. '여왕폐하의 007'에서처럼 자동차도 평범하고 가젯들도 나오지 않는 '순수한' 제임스 본드로 돌아온 것이다. 줄거리도 플레밍의 단편 'For Your Eyes Only'와 'Risico'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영화화 했다. 제임스 본드란 캐릭터가 스페이스 셔틀을 타고 우주에 나가 광선총을 쏘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진짜 제임스 본드라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유어 아이스 온리'다.
이 영화에서도 리얼한 액션과 스턴트가 가젯을 대신했다. 흰색 로터스 에스프릿 터보가 터지는 바람에 노란색 씨뜨로엥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도망쳐야하는 씬이 나오게 된 이유다.
이것이 댄 브래들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바로 이 사람 때문이다.
존 글렌(John Glen).
바로 존 글렌이 '여왕폐하의 007'의 세컨드 유닛 감독이었다. 그리곤, '유어 아이스 온리'부터 '살인면허(License To Kill)'까지 5편의 007 영화를 감독했다.
존 글렌이 1981년 '유어 아이스 온리'로 메가폰을 잡자마자 007 시리즈는 가젯 대신 리얼한 액션과 스턴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사일이 나가는 본드카'는 1987년 영화 '리빙데이라이트'로 컴백하지만 티모시 달튼이 제임스 본드였기 때문에 상당히 '피지컬'한 007 영화로 보이지 버튼 누르면 뚝딱인 007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존 글렌의 마지막 007 영화 '살인면허(License To Kill)'은 본드가 친구의 복수에만 전념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리빙데이라이트'보다 훨씬 더 거칠어졌다. 존 글렌이 감독한 007 영화들은 전부 리얼한 액션과 스턴트가 풍부한 익사이팅한 영화들인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007 영화들은 가젯이 많이 나오는 전형적인 '코믹북 제임스 본드' 영화였기 때문에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로 넘어오면서 존 글렌처럼 리얼한 액션과 스턴트를 제대로 찍을 수 있는 액션 전문가의 필요성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투모로 네버 다이스'처럼 홍콩 액션영화 비스무리하게도 만들어 봤고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에선 어거지로 이어붙인 것처럼 보이는 논스톱 액션도 해봤지만 '본드22'는 더이상 이런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댄 브래들리의 역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사실적인 액션과 스턴트씬을 제대로 만드는 것.
이쯤 됐으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제이슨 본 시리즈에 비교하는 건 비교대상을 잘못 택한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얼핏 보기엔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가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과 비슷해보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카지노 로얄이 제이슨 본 시리즈를 따라했다'고 하는 건 깊이없는 평가다. 제임스 본드도 007 시리즈에서 제이슨 본 못지않게 리얼하고 과격했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숀 코네리는 물론이고 로저 무어도 그랬다. 티모시 달튼은 두 말할 필요 없고 1편만 찍고 007 시리즈를 떠난 죠지 레젠비도 가젯사용이 없는 플레밍의 본드를 연기했다.
그런데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얘기만 나오면 제이슨 본 얘기를 한다. 그 이유는 1)가젯이 안 나오는 007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2)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카지노 로얄'을 제이슨 본 시리즈에 비교하기 좋아한다. 안티 다니엘 크레이그들이 주로 '카지노 로얄'과 제이슨 본 시리즈를 비교하기 좋아한다. '줄거리가 심각하니까 제이슨 본 따라했다', '제임스 본드가 젊으니까 제이슨 본 따라했다', '가젯이 안나오니까 제이슨 본 따라했다'고 하는 게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얘기가 이렇게 되니까 맷 데이먼까지 나서서 제임스 본드를 밟고 가는 전략을 쓴 것이다. 서로 별 상관없는 사이인 제이슨 본과 제임스 본드가 묘하게 꼬인 이유는 전부 여기서부터다.
그런데 이젠 댄 브래들리까지 '본드22' 팀에 합류했으니 얘기가 더 재미있어질 수밖에...
존 글렌이 했던 것처럼 댄 브래들리도 '007 시리즈에 어울리면서도 사실적인 액션씬'을 만들어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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