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1일 화요일

제임스 본드의 세계

제임스 본드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라는 건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53년 이언 플레밍의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통해 탄생한 제임스 본드는 1962년 '닥터노(Dr. No)'로 시작한 영화 시리즈의 성공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가 됐다. 제임스 본드 소설은 이언 플레밍이 사망한 이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소설이 계속 출간되고 있으며, 영화 시리즈 역시 숀 코네리의 '닥터노'부터 다니엘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얄'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선 제임스 본드를 로빈 후드와 같은 전설적인 캐릭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엔 배트맨, 영국엔 제임스 본드, 멕시코엔 조로가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제임스 본드는 수퍼맨, 배트맨, 미키 마우스처럼 세계적인 팝 아이콘 중 하나가 된 것.

현재까지 나온 제임스 본드 콜렉티블만 봐도 제임스 본드의 인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스타워즈'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건 아니지만 제임스 본드 콜렉티블도 액션 피규어, 다이캐스트 자동차, 콜렉팅 카드, 매거진, 코믹북, 비디오게임 등 완구에서부터 상당한 가격대의 콜렉티블에 이르기까지 만만치 않은 규모다.



제임스 본드 팬이 많으면 얼마나 많길래 그러냐고?

미국 연예 주간지 '인터테인멘트 위클리(Entertainment Weekly)'가 뽑은 '베스트 팬사이트'에 9위에 오른 게 제임스 본드다. 베스트 팬사이트 1위는 '스타워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디아나 존스'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임스 본드가 이중에서 9위라는 것.



제임스 본드 팬사이트는 전세계적으로 한 두개가 아니다. 미국, 영국 등 영어권 팬사이트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러시아어로 된 유러피언 제임스 본드 팬사이트도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팬사이트가 전부인 건 아니다. 제임스 본드 팬들이 인터넷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팬클럽이라도 있다는 얘기냐고?

직접 확인하시라. 제임스 본드 인터내셔널 팬클럽 멥버쉽 카드다. 사진에 있는 카드는 최근 것이 아니라 90년대 멤버쉽 카드지만 제임스 본드 인터내셔널 팬클럽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 팬은 누구냐고?

제임스 본드 팬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제임스 본드 팬 = 007 영화 팬'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007 영화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 프랜챠이스의 일부분인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온 영화배우들의 팬인 것도 물론 아니다. 돈을 받고 맡은 역할을 연기한 게 전부인 영화배우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제임스 본드 캐릭터다.

팝 아이콘을 둘러보면 대부분 '히어로(Hero)'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히어로'다. 뚜렷한 개성과 매력이 있는 어딘가 특별한 곳이 있는 캐릭터들이 대부분이지 평범하거나 안티-히어로(Anti-Hero) 캐릭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고 우상으로 삼을만한 캐릭터가 팝 아이콘이 될 확률이 높은 것.

제임스 본드는 여기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캐릭터다. 바지 위에 빤스를 입고 하늘을 나는 전형적인 코믹북 판타지 히어로는 아니지만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젠틀맨 에이전트'라는 독특한 스파이 캐릭터를 탄생한 것. 영국의 유명한 첩보소설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철조망을 뜯고 동독으로 넘어가는 스파이'와 비교하면 제임스 본드는 사실감이 떨어지는 판타지 스파이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제임스 본드가 성공한 이유는 뚜렷한 개성이 있는 'Extraordinary Spy Hero'이기 때문이다.

이런 덕분에 제임스 본드는 남녀노소 모두로부터 인기있는 캐릭터로 성공할 수 있었다. 성인들은 섹스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에 매료됐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패밀리 영화 수준으로 수위를 낮춘 007 영화를 보면서 제임스 본드를 어렸을 적 우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어렸을 때부터 007 시리즈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제임스 본드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엔 주간지 '인터테인멘트 위클리'에 'The Spy Who Raised Me'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한국어로 구태여 번역하자면 '나를 키운 스파이'가 된다.



그렇다고, 어렸을 적 추억이 전부인 건 아니다. 플레이보이 매거진 라이프스타일의 표본처럼 보이는 제임스 본드에 성인 남성들이 열광한다는 것을 건너뛰어선 안되는 것.

여자, 자동차, 가젯은 일반 성인 남성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멋진 여자와 자동차, 그리고 카메라, 캠코더, PDA, MP3 플레이어, 비디오게임, 빅 스크린 TV, DVD 플레이어, 홈 시어터 시스템, PC 등의 '어른들의 장난감'에 비상한 관심을 갖는다. 물론, 플레이보이 매거진은 이 세 가지를 빼놓지 않고 다룬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본드걸, 본드카, 가젯이 빠지지 않는 것처럼.

서로 겹치는 데가 많아서일까?

플레이보이 매거진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임스 본드 스페셜 이슈를 선보였다.



그러나, 스페셜 이슈에서만 제임스 본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러시안 모델들을 소개할 때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 'From Russia With Love'를 살짝 바꿔놓은 'From Moscow With Love'라는 제목을 달기도.

러시안 미녀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가 제임스 본드니까.



일부는 플레이보이 매거진이라고 하면 누드사진만 생각한다. 플레이보이를 성인용 누드잡지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

하지만, 플레이보이를 오래 본 사람들은 누드사진 이외의 콘텐츠도 관심있게 본다. 플레이보이 조크, 인터뷰 기사, 신제품 소개 등 누드사진 이외의 것들도 빼놓지 않는다.

물론, 제임스 본드 숏 스토리(Short Story)도 빼놓지 않고 찾아 읽는다.



그렇다. 영화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도 있다. 영화 이전에 이언 플레밍의 소설이 있었고, 플레밍의 소설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가 제임스 본드 소설의 열렬한 팬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케네디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 것!

이언 플레밍과 존 F 케네디는 워싱턴 D.C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으며, 플레밍은 직접 싸인한 제임스 본드 책들을 케네디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른 스파이 캐릭터들은 제임스 본드를 어떻게 생각할까?

제임스 본드는 다른 스파이 영화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톰 클랜시 소설을 영화화한 '공포의 총합(2002)'에서 존 클라크로 나왔던 Liev Schreiber는 인터뷰에서 흰색 스노우 수트를 입고 뛰어다닐 때 제임스 본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이단 퀸,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의 'The Assignment(1997)'에서도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가 나온다.



알 파치노, 콜린 패럴 주연의 '리쿠르트(The Recruit - 2003)'에서도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가 있다.



이밖에도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제임스 본드 이름을 들먹였을까?

정답은 '스파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이름이 제임스 본드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십년동안 사람들의 머릿 속에 스파이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각인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가 제임스 본드이다보니 제임스 본드와 무관한 스파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이름이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무언가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면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는 표현을 쓰는 걸 자주 볼 수 있지만 '왜 하필이면 007작전이냐'고 따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제임스 본드'와 '007'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있는 것.

뿐만 아니라, '스파이'라고 하면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미남'을 떠올리도록 만든 장본인도 바로 제임스 본드다.

요새도 미국 고등학생들은 프롬(Prom)에서 턱시도를 입고 폼 잡으며 '본드, 제임스 본드'라면서 장난친다. 꼭 고등학생들이 아니더라도 턱시도에 검정색 보우타이를 하면 다들 제임스 본드를 생각한다. 제임스 본드가 007 시리즈 1탄 '닥터노(1962)'에서 턱시도를 입고 데뷔한 이후 제임스 본드와 턱시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사실적이지 않은 스파이 캐릭터 아니냐고?

제 임스 본드처럼 '살인면허'를 소지한 에이전트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aka MI6) 직원들일 것이다. 아무래도 제임스 본드가 MI6 소속으로 나오기 때문에 SIS 직원들은 '살인면허 있냐', '00 에이전트냐'는 어이없는 질문에 시달린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SIS는 007 영화 촬영에 협조적이다. 1999년 영화 'The World is Not Enough' 제작시엔 SIS 건물 앞에서의 촬영을 허가했다. 물론, 폭탄이 터지고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촬영했지만 SIS 건물 앞에서의 촬영은 허가한 것.

뿐만 아니라, HQ에서 007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진짜 MI6 에이전트들이 HQ에서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본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런던 SIS HQ를 거쳐 이라크까지 갔다. 이라크 주둔 군부대에서 제임스 본드 영화를 상영한 것.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는 이라크전이 한창일 당시 영국군의 작전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제임스'! 타겟 코드네임은 '골드핑거', '블로펠드'!

AP는 'British Forces Use James Bond Code Names'라는 제목의 기사로, CNN은 인베디드 리포터를 통해 영국군의 '오퍼레이션 제임스'를 보도했다.

아래는 AP 기사 일부다:

For British soldiers fighting in Iraq, the code names involved in their mission are hard to forget - for anyone who has ever seen a James Bond movie.

Crackling over the British communication equipment come references to "Operation James" and its military targets, code-named "Goldfinger," "Blofeld" and "Connery."

By alluding to James Bond, its star Sean Connery and some of the heroes and villains in the 007 movies, British commanders have several goals in mind.

They include confusing the enemy, helping British soldiers remember the code words and boosting military morale with a little humor.

"`Operation James' is an objective named after something the soldiers will remember easily," said Paul Beaver, an independent military expert in London. "James Bond is a No. 1 Brit, and he's a hero."



제임스 본드 '흔적'은 광고에서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미국 수퍼마켓 체인 세이프웨이(Safeway)가 90년대에 CM송으로 사용했던 노래가 떠오른다: 'Nobody Does It Better'.

칼리 사이먼이 불렀던 '나를 사랑한 스파이' 주제곡으로, 아카데미상 주제곡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던 곡이다. 세이프웨이의 라디오 광고는 이 노래와 함께 'Nobody Does It Better Than SAFEWAY'라면서 끝났던 게 기억난다.

최근 광고 중에선 Hummer H3 TV광고가 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로터스 에스프릿이 잠수함으로 변신(?)했던 것을 패러디한 광고다.

꼭 제임스 본드 팬이 아니더라도 무엇을 패러디한 광고인지 한눈에 알아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인 미식축구에서도 제임스 본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학교 밴드가 경기장에서 연주를 하는 대학 풋볼경기에선 제임스 본드 테마가 연주되는 걸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제임스 본드 테마가 미국 대학 미식축구 경기 응원가(?)로 사용되는 것. 2007년 시즌에도 꽤 많은 경기에서 제임스 본드 테마가 응원가로 연주됐다.

NCAA 대학 풋볼뿐만 아니라 NFL도 예외가 아니다. NFL 챔피언을 가리는 수퍼보울 경기가 열리는 날은 '비공식 공휴일'로 불린다. 해프타임 공연도 일반 정규시즌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화려하다. 자넷 잭슨의 '젖꼭지 사건'도 수퍼보울 해프타임에 벌어졌던 해프닝이다. 젖꼭지가 다 튀어나올 정도라면 상당히 화려하다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폴 매카트니의 'Live and Let Die'는 어떤가! 로저 무어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였던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곡 말이다.



이 정도로 유명한 스파이라면 워싱턴 D.C에 위치한 스파이 박물관에서도 한자리 차지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D.C에 있는 스파이 박물관은 실제 스파이들이 사용하던 장비같은 것들을 전시한 곳이지 '스파이 픽션 박물관'이 아니다. 하지만, '본드카' 아스톤 마틴 DB5는 예외인 모양.



마지막으로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이 정도로 유명한 캐릭터를 탄생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처럼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전설적인 팝 아이콘을 탄생시키는 게 절대로 쉬워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캐릭터들이 탄생했지만 이중에서 세월이 두렵지 않다고 할만큼 전설적인 인기를 누리는 캐릭터는 많지 않다. 대부분 평균 언저리의 그저 그런 수준이지 팝 아이콘이라고 불릴만한 캐릭터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단지 영화 캐릭터뿐만 아니라 카툰, 코믹북, 비디오게임 캐릭터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영화, 비디오게임, 또는 애니메이션 한 두편이 조금 인기를 끌었다고 한순간에 전설적인 캐릭터가 탄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수준의 캐릭터들은 반짝하고 사라지게 돼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캐릭터들은 단명하지 않는다. 10년, 50년, 100년이 흘러도 변함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새로운 팝 아이콘이 될까?

내가 한번 만들어 봐?

팝 아이콘 말고 팝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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