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2일 금요일

포인트 없는 '밴티지 포인트'

미국 대통령(윌리엄 허트)이 스페인에서 열린 월드 서밋 연설 도중 저격당한다.

미국인 관광객 하워드(포레스트 위태커)는 대통령이 저격당하는 순간을 우연히 캠코더로 촬영한다.

월드 서밋을 생중계하던 방송사 GNN도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을 그대로 방송한다.

대통령 경호원 토마스 반스(데니스 퀘이드)와 켄트 테일러(매튜 폭스)는 대통령을 쏜 범인을 잡기위해 주위에 흩어져있는 단서들을 하나씩 찾아나선다.



단서? 좋다. 말 나온 김에 '밴티지 포인트'의 단서를 한번 찾아보자.

일단,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면 저격범이 있을 것이고, 건물이 폭발했으면 폭파범이 있을 것이다.

관광객이 캠코더 촬영을 했다면 거기에 단서가 될만한 무언가가 찍혀있을 게 분명하다.

여러 명의 카메라맨을 현장에 보낸 GNN 방송사의 비디오 자료에서도 뭔가 나올 게 분명하다.

테러범이 누구라는 걸 파악하는대로 주인공, 토마스 반스가 추격전을 벌일 게 분명하다.

테러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어린 여자아이가 울면서 돌아다닌다면 어떻게든 액션 한가운데 끼어들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파악이 됐다면 이 영화를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얼핏보면 상당히 복잡한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스테리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 토마스 반스가 어디서 어떻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느냐에 관심이 쏠리지만 생각보다 쉽게 중요한 단서들을 금새 찾아내는 바람에 곧바로 추격전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렇다. '밴티지 포인트'는 생각보다 상당히 단순한 영화다. 테러사건이 터졌고, 범인들이 도주하고, 경호원들이 이들을 추적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내용 자체도 어디서 본 듯 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다니엘 실바의 소설 'The Messenger'다. 바티칸에서의 자폭테러와 미국 대통령 암살 플롯이 생각난 것. 하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데니스 퀘이드를 본 순간 'Patriot Game', 'Clear and Present Danger'의 해리슨 포드가 생각났다. 'Patriot Game'과 'Clear and Present Danger'는 미국 작가 톰 클랜시(Tom Clancy)의 소설을 옮긴 영화다.

톰 클랜시?

톰 클랜시의 소설 중에도 대통령 암살, 폭탄테러 등이 나온다. 다니엘 실바 훨씬 이전에 톰 클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톰 클랜시의 캐릭터, 잭 라이언을 연기했던 해리슨 포드와 묘할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데니스 퀘이드까지 나오다보니 톰 클랜시풍의 스릴러를 흉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순하고 간지러운 줄거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건물이 폭파되는 순간을 시점전환으로 여려 사람의 눈을 통해 지켜보는 건 어떨까? 테러 발생직후 시계를 테러 이전으로 되감은 뒤 시점을 바꿔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여주다가 테러가 발생하면 또다시 리와인드-시점전환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 같다고?

맞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시간끌기에 이보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다지 나쁜 아이디어 같진 않다고?

한 두번 정도에 그쳤다면 나쁜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문제는 시점을 바꿔 테러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너무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리 연달아서!

'리와인드'는 한 두번 정도만 하고 나머지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한데 묶어 보여줘도 될텐데 연달아 시점전환를 하고, 그 때마다 매번 테러 이전으로 '리와인드'를 하다보니 관객들을 상대로 싱거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그런대로 신선해 보였다. 그런데, 시점이 세 번째 바뀔 때부터 객석에서 'Again?!'이란 불평이 터져나오더니 네 번째로 바뀌자 극장 여기저기서 '어흐!'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다섯 번째가 되자 이젠 다들 포기했는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소리만 들렸고, 그 이후부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 '테러사건 이후의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 '언제까지 똑같은 테러사건을 시점만 바꿔가면서 보고 또 보라는 거냐'는 불만도 생겼다. 매번 시점전환 하면서 '리와인드'하는 게 아무리 봐도 '포인트'가 없어 보였다.

'시간끌기'라고 하니까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ABC의 TV 시리즈 '로스트(Lost)'다. 플래시백 - 요새는 플래시 포워드지만 -을 빼고 나면 정작 섬에서 벌어지는 내용은 얼마 되지않는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 말이다. '로스트'는 플래시백/포워드로 시간끌지 않고 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만 진행시킨다면 벌써 끝났 드라마다.

갑자기 '로스트' 얘기는 왜 꺼내냐고?

'되돌아가기'로 시간끄는 영화 '밴티지 포인트'에 '로스트'에서 주인공 잭으로 출연중인 매튜 폭스(Matthew Fox)가 나오는 게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매튜 폭스는 '로스트'에서 보여준 '우는 연기'로 유명하다. 로스팬들은 매튜 폭스가 연기한 잭을 '울보'로 부르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농담일 뿐이지만 매튜 폭스가 '로스트'에서 우는 연기를 많이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매튜 폭스의 '우는 연기'는 '로스트'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마샬 대학교 풋볼팀의 비행기 추락사고 실화를 영화로 옮긴 'We Are Marshall'에 출연한 매튜 폭스는 여기서도 변함없이 우는 연기를 보여줬다.



'밴티지 포인트'에 매튜 폭스가 나오는다는 걸 들었을 때 '여기서도 울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엔 웬 일인지 우는 연기를 하지 않더라.

거진 우는 표정이 나오긴 했지만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매튜 폭스 이외로 눈에 띄는 배우가 또 하나 있다: 이스라엘 출신 여배우 아이엘렛 주러(Ayelet Zurer).

아이엘렛 주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Munich)'에 나왔던 여배우다. 이스라엘 여배우가 이스라엘에 대한 영화에 나왔으니 이상할 게 없을지도.

그런데, 이번엔 무슬림 테러리스트로 나온다.



출연배우 이외의 볼거리는 아무래도 소니 전자제품이 될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콜롬비아/소니 픽쳐스 영화는 소니 전자제품을 빼면 볼 게 없어졌다. 2006년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에도 소니 전자제품을 곳곳에 깔아놓으면서 비난을 샀지만 이 버릇이 어디로 안 간 모양이다. '밴티지 포인트'도 '카지노 로얄' 저리가라 할만큼 소니제품 천지다.

몇 가지 둘러보기로 하자.

GNN 중계방송 직원들의 데스크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가 눈에 띈다. 소니 픽쳐스 영화에 노트북 컴퓨터가 카메라에 잡혔다 싶으면 무조건 소니 바이오(VAIO)라고 생각하면 된다. Remember 'Casino Royale'?


[소니 바이오 노트북]

영화에서 포레스트 위태커가 들고다니던 캠코더 역시 소니 제품이다. 캠코더에 촬영된 비디오에 중요한 단서가 포함됐다는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소니 캠코더 광고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카지노 로얄'에선 디지털 카메라가 눈에 띄더니 '밴티지 포인트'에선 HD 캠코더였다.


[소니 캠코더]

'카지노 로얄'에서 수시로 등장했던 게 소니에릭슨 핸드폰이다. 제임스 본드가 사용한 핸드폰을 포함해 영화에 나온 핸드폰 전체가 모두 소니에릭슨 핸드폰이던 것으로 알고있다. '카지노 로얄'에서 툭하면 핸드폰을 주무르는 장면이 나온 건 전적으로 소니에릭슨 핸드폰 광고를 위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밴티지 포인트'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더라.


[소니에릭슨 QuickShare]

참사현장 중계를 보는 장면에 소니 TV가 나왔다는 건 길게 얘기할 필요조차 없겠지?


[소니 TV]

소니 픽쳐스의 영화는 유치하게 보일 정도로 소니 전자제품 광고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카지노 로얄'에서도 그랬고 이번 '밴티지 포인트'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영화를 통해 소니제품 광고를 하고싶다는 것 자체를 뭐라 할 순 없다. 다만, 문제는 티가 덜나게 적당히 하면 어디 덧나냐는 것이다. 광고하는 것까진 좋지만 이렇게 티나게 노골적으로 하면 영화까지 유치하게 보인다는 것도 이해했으면 좋겠다.

소니 픽쳐스가 007 시리즈를 배급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본드팬들이 부쩍 늘어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니 픽쳐스가 007 시리즈를 자사 전자제품 광고수단으로밖에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밴티지 포인트'서부터 소니 전자제품 광고에 열을 올리는데 금년 가을 개봉하는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선 얼마나 심할지 한번 생각해 보시구랴. 소니 픽셔츠는 찍혔어!

그런데, '밴티지 포인트'에선 이런 것을 빼면 볼 게 없다. 미스테리도 놀라온 반전도 없을 뿐더러 기억에 남을만한 액션도 없는 흔해빠진 수준의 액션/스릴러가 전부다. 연달아 시점전환을 하는 것으로 유별나게 보이려 했지만 짜증만 날 뿐 스타일리쉬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가 짧은 덕분이다. 시점전환으로 계속 '리와인드'를 하면서 시간끄는 데 성공했다지만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계속 시점전환만 할 순 없는 법. 그런데, 시점전환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영화라서 길게 끌어봤자 엉성한 줄거리와 유치한 플롯만 눈에 띌 게 뻔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시점전환 놀이(?)가 끝나는대로 속전속결하는 게 상책이겠지?

'밴티지 포인트'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연속으로 시점전환을 하는 게 생각보다 신경에 많이 거슬렸다는 것을 제외하곤 예상했던대로 그저 그런 수준의 스릴러 영화였다.

대통령 암살, 테러공격 등 얼핏보기엔 거창한 폴리티컬 스틸러 같지만 '밴티지 포인트'도 '11세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중 하나다. 포장은 그럴 듯하게 해놨지만 뜯어보면 딱 그 수준밖에 안된다. 겉은 뻔지르한데 까보면 유치한, '포인트' 없는 액션영화를 원한다면 '밴티지 포인트'를 강추!

댓글 2개 :

  1. 한마디로 뻔한영화군요.ㅋ
    저격당한다는 내용하니까 작년에 봤던 더블타겟(shooter, 마크 월버그 나왔던 영화)이 떠오르네용.
    그 영화도 뻔한 영화였지만, 볼거리도 많고 재밌었어요.ㅋ

    답글삭제
  2. 트레일러 하난 잘 만들었죠.
    '300' 사운드트랙에서 노래까지 빌려오고...
    '슈터'라...
    은퇴한 친구 찾아가서 함정에 빠뜨리는 거였나요?
    잘 기억이...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