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제임스 본드 스페셜 (2) - 007 vs 제이슨 본

(이어서) 말이 나온 김에 제이슨 본 시리즈를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제이슨 본 시리즈

과연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을 따라하는 것일까?

연출, 촬영, 편집 등 영화적인 부분에서 서로 겹치는 데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인 부분에만 해당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제이슨 본 '캐릭터'가 소설 속 제임스 본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거꾸로 제이슨 본이 제임스 본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야 옳다.

예를 찾아보기로 하자.

제이슨 본이 머리를 다치며 물에 빠져 기억상실에 빠진다는 설정은 플레밍의 소설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 나오는 부분이다. 1967년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에선 이러한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플레밍의 원작소설에는 나온다. '기억상실에 빠진 에이전트'라고 하면 '제이슨 본'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제이슨 본이 기억을 잃기 훨씬 전에 제임스 본드도 기억상실에 빠진 적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 아내를 잃은 제임스 본드는 후속편 '두번 산다'에서는 충격, 슬픔,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사나이로 나온다. 아내를 잃었으니 제임스 본드의 무드가 밝을 리 없다. 소설 마지막에 기억상실에 빠진 뒤에는 답답하고 막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일까? 제이슨 본 시리즈 2탄 'Bourne Supremacy'에서 여주인공이 저격당해 죽자(참고: 사랑하던 여인이 차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는 것도 똑같다) 열받은 제이슨 본이 복수에 나서는 게 왠지 반갑게(?) 보이더라.

왜 반가웠냐고?

제임스 본드의 아내, 트레이시가 살해당하는 것까지는 영화에 나왔지만 본드가 이에 대한 복수를 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제이슨 본이 대신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언 플레밍의 '두번 산다' 책 커버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는 영화에서 살해당한 아내의 복수를 할 기회를 왜 갖지 못했을까?

이 모든 원인은 지난 50년대 중반 영화 프로듀서들이 제임스 본드 캐릭터의 성격을 바꾸고자 한 데서 부터 출발한다. 프로듀서들이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젠틀맨 에이전트를 원하면서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은 영화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배라는 것을 모르는 수퍼히어로 수준의 캐릭터를 원했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의 인간적인 고뇌, 슬픔, 분노 등이 드러나는 부분은 영화로 옮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제이슨 본 '캐릭터'는 007 영화로 제대로 옮겨지지 않은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를 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플레밍의 소설 '두번 산다'를 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플레밍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제이슨 본 시리즈가 소설 속 제임스 본드와 겹치는 부분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플레밍의 소설보다 007 영화 시리즈가 더욱 유명한 만큼 많은 영화팬들은 '제이슨 본이 원작의 제임스 본드를 많이 모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슨 본 시리즈 제작진도 이를 알고 계획했을 게 분명해 보인다.

이런데도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 시리즈를 따라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이전보다 거칠고 액션과 스턴트가 사실적인 게 비슷해 보인다는 것만 가지고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을 비교하는 게 올바른 것일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일까?

물론,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영화를, 영화만 가지고, 영화끼리만 비교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슨 본 시리즈도 '누가 누구를 베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와 메인 플롯을 플레밍의 원작에서 빌려와 놓고선 원작으로 돌아간 제임스 본드 영화에 대고 '따라한다'고 할 처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007 시리즈가 원작소설이 없는 영화 시리즈라면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했다는 게 일리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이 있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원작소설들이 미국 작가 로버트 러들럼의 첫 번째 제이슨 본 소설보다 훨씬 먼저 나온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이후에 '이언 플레밍의 소설은 실제 정보부의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매우 리얼한 첩보소설을 선보였던 영국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작품들을 비롯해 그 이후에 나온 수많은 스파이 소설과 제임스 본드 아류 소설/영화를 일일히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모두 통틀어 제이슨 본 시리즈가 제임스 본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는지 아니면 그 반대이겠는 지는 길게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답이 나오는 문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지난 50년대 영화 프로듀서들이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007 영화제작을 처음 계획했던 50년대 당시 프로듀서들이 플레밍의 원작을 최대한 실리기로 하고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을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한번 상상해 보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리처드 버튼이냐고?

리처드 버튼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쓴 작가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로 원했던 배우 중 하나다. 처음 만들어진 007 영화 스크립트가 플레밍의 원작에서 멀어지긴 했어도 제임스 본드로는 리처드 버튼을 원했던 것이다. 플레밍이 리처드 버튼을 제임스 본드 후보로 꼽았다는 것만 보더라도 원작자가 상상하고 있었던 제임스 본드가 어떠한 캐릭터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만약 영화 프로듀서들이 플레밍의 원작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기로 정하고 리처드 버튼을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하고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chcock)에게 연출을 맡겼다면 아마도 지금의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와 비슷했을 지도 모른다. 플레밍의 소설 속 액션과 스턴트는 '사실적'이었으니 잠수정으로 변신하는 자동차, 투명자동차 따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리처드 버튼이 연기한 제임스 본드도 지금의 다니엘 크레이그와 비슷한 데가 많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이슨 본 시리즈를 따라한다'는 비판을 듣고있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오늘날 제임스 본드와 상당히 비슷했을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작 스타일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대중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겠는 지는 알 수 없다. 50년대 영화 프로듀서들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밝고 화려한 캐릭터로 바꾼 덕분에 007 시리즈가 지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섹시한 본드걸, 멋진 본드카, 그리고 신출귀몰한 가젯의 도움 없이 007 영화 시리즈가 내일모레 50주년이 될 정도로 장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와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많이 다르다는 것만 이해하면 누가 누구를 따라했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겠지만 1개의 캐릭터가 2개의 '아이덴티티'를 갖고있다 보니 어느 게 '진정한 제임스 본드'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소설 속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비교적 잘 연기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얼마나 원작에 가까운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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