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 원작의 제임스 본드와 거리가 있다.
거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닮았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블론드에 키가 작고 인물이 약간 딸린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문제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 크레이그는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불린다. 물론,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제치고 '베스트 본드'가 될 가능성은 현재로썬 낮지만 60년대의 숀 코네리와 지금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비교하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넘버원은 몰라도 넘버투는 확실하게 맡아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숀 코네리가 이언 플레밍의 원작과 완벽하게 매치되었던 것도 아니다. 코네리의 거칠고 투박한 외모와 말투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가 아니었다. 플레밍이 코네리를 제임스 본드로 인정한 것도 영화가 성공한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크레이그가 베스트 본드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갑고 진지한 외모 덕이 크다.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를 맡은 배우 중에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을 제외하곤 진지한 얼굴의 배우가 없었다. 많은 본드팬들이 티모시 달튼을 원작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배우라고 했던 가장 큰 이유도 그가 소설 속 제임스 본드처럼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드팬들은 또다른 패션모델이 아닌 진지한 이미지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가 된 것에 만족했다. 블론드다, 키가 작다, 기타등등의 문제점은 둘 째 치더라도 이번엔 '날라리 본드'가 아니라는 데 안도한 것이다.
이와 함께 가벼운 플레이보이 이미지도 사라졌다. 영화에서는 본드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돌아다니면서 찝쩍거리는 가벼운 플레이보이로 나오지만 책에서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섹스'와 '미녀'는 책에도 풍부하게 나오지만 제임스 본드는 영화에서처럼 건들거리는 플레이보이가 아니었다.
사실, 플레이보이는 고사하고 여자문제가 제임스 본드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거쳐간 여자는 많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할만 한 여자를 못 만난다는 게 문제다. 여러 미션을 거치면서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지만 즐거움도 잠시일 뿐 다들 본드를 떠나버린다. 본드가 떠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이 본드를 놓고 떠난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제임스 본드가 임자를 만난 것 같다 싶으면 다들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의 베스퍼가 그랬고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에서 본드가 결혼했던 트레이시도 그랬다. 본드는 트레이시를 잃은 충격과 슬픔, 분노로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생활하기도 했다.
본드가 수많은 여자들과 침대에 올랐다지만 여자 운이 따르는 건 아닌 듯. 어찌보면 제임스 본드는 평생 싱글로 살아야 할 팔자인지도 모른다.
이런 속사정 때문인지 성격도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모험을 즐기는 진지한 젠틀맨이긴 하지만 말이 많고 조크를 자주 하는 밝은 성격의 사나이는 아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다니엘 크레이그가 소설 속 제임스 본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50년대 탄생한 만큼 원작의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기 위해선 클래식한 분위기도 필요하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물론 이것도 갖췄다. 컬러사진에 잘 어울리는 가벼운 얼굴이 아니라 흑백사진에 잘 받는 클래식한 얼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50년대 젠틀맨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터프가이 이미지다.
소설 속 제임스 본드는 2차대전부터 시작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나이로, 미남이긴 하지만 얼굴에 흉터가 있으며, 늘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일거리'가 없으면 좀이 쑤시는 타잎이다. 직업상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저축하기 보다 버는대로 쓰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요란스러운 '액션맨' 타잎인 것은 아니지만 데스크보다는 프론트라인을 선호하는 터프가이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 부분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단련된 신체를 갖고있는 것은 맞지만 육체미 선수 수준은 아닌 만큼 지나치게 근육을 키울 필요는 없었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숀 코네리와 함께 가장 거칠고 피지컬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다니엘 크레이그는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에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가 어떠할 지 걱정반 기대반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모든 걱정이 사라지더라.
▲다니엘 크레이그 AS 제임스 본드
하지만 문제점도 눈에 띄었다. '제임스 본드가 얻어터지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려 한 것처럼 보였다. 소설에선 제임스 본드가 고생을 많이 하는 편인 것은 맞다. 고문도 여러 차례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적도 많다. 뿐만 아니라 아내를 잃은 뒤엔 사람이 다르게 보일 정도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나중엔 머리까지 다치면서 기억을 모두 잃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카지노 로얄'은 소설 속 제임스 본드의 'Vulnerability'를 피 흘리는 것으로만 덮으려 한 것처럼 보였다. 제임스 본드가 상처 하나 생기지 않는 수퍼 에이전트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한 두번이면 됐지 복습, 재복습 시킬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본드팬들은 '더욱 강한 제임스 본드'를 원하지 않았냐고?
맞다. 하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오해가 있다. 로저 무어(Roger Moore)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절 영화가 지나치게 박력이 없고 가젯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치고 받을 때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한 게 전부지 다 뒤집어 엎고 다니는 액션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액션이 너무 잦아도 문제지만 필요할 때엔 확실하게 치고 받을 줄 아는 제임스 본드를 보고싶었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 문제는 제임스 본드가 '액션맨'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플레밍의 소설보다 더욱 과격하게 그린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상당히 거친 캐릭터인 것은 맞지만 매편마다 분노에 휩싸여 과격해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노'와 '복수'는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한 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가 전편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만큼 캐릭터 성격도 물려받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칫하단 '다니엘 크레이그 = 성난 007'로 굳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다면 본드팬들은 앞으로 어떠한 제임스 본드를 보고싶어 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노련한 제임스 본드'다.
더이상 초보 에이전트도,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는 노련해진 제임스 본드를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바로 이것이 소설 속 제임스 본드의 본 모습인 만큼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를 멋지게 영화로 옮기는 것을 보고싶어하는 것이다.
'노련해진 제임스 본드'라고 해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식의 여유있는 성격의 제임스 본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조크맨 본드'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슬픔과 분노, 복수 등으로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줄 때가 됐다는 게 전부다. 차갑고 진지한 성격과 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이제는 베테랑 에이전트가 된 제임스 본드의 미션 이야기 쪽으로 옮겨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카지노 로얄' 다음에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두번 산다' 다음에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이 있듯이 '콴텀 오브 솔래스' 다음에는 슬픔과 분노를 극복한 '노련해진 제임스 본드'를 보여줄 차례다.
하지만 이것만을 제외하면 다니엘 크레이그는 현재로썬 '퍼펙트 제임스 본드'다. 나이도 적당하고 외모, 이미지, 기타등등 모두 완벽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모든 조건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속 제임스 본드를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다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크레이그는 '퍼펙트 본드'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영화만 잘 받쳐준다면 숀 코네리를 제치고 넘버1 제임스 본드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씨나리오다. 크레이그보다 많은 007 영화에 출연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이 넘보지 못했던 베스트 제임스 본드 넘버1의 자리를 벌써부터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보 에이전트로써의 '어설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과 '분노', '고뇌', '복수심'을 떨어낸 보다 노련해진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어떠한 모습일까?
'본드23'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JAMES BOND SPECIAL WILL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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