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라고 하면 멋진 여자와 자동차, 신출귀몰한 가젯들,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등을 먼저 떠올린다. 007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친숙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는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에서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수퍼 히어로 스파이'일까?
정답은 'NO'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 속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제임스 본드와는 상당히 다른 캐릭터다. 소설에선 본드가 자신을 "Bond, James Bond"라고 소개하지도 않으며 "Shaken not stirred"도 나오지 않는다. 가젯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현실적으로 사용가능한 '사실적인' 스파이 가젯들은 더러 나오지만 'Ejector Seat'이 장치된 본드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플레밍의 제임스 본스 시리즈가 매우 리얼한 첩보소설이란 것은 아니다. 007 영화처럼 SF영화 수준의 하이테크 가젯들과 터무니 없는 세계정복 플롯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정도가 전부지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소설처럼 실제 스파이들의 활동을 사실에 가깝게 그린 소설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은 007 영화보다는 '사실적'이지만 존 르 카레의 소설처럼 실제 스파이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소설 속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영화의 제임스 본드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달라졌을까?
1950년대 중후반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기초로 한 제임스 본드 영화제작을 계획했던 영화 프로듀서들은 멋쟁이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원한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지나치게 정치색을 띄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누구나 편히 즐길 수 있는 스파이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플레밍의 원작은 그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실제 첩보세계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냉전 등 당시 국제정세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았으며,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쿨한 액션영화 주인공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하고 어두운 데가 있었다. 쿨한 멋쟁이 액션 히어로 스파이 캐릭터가 필요했는데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
그러자 영화 프로듀서들은 이언 플레밍에게 영화용으로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련과 관계없는 '조직'이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이를 제임스 본드가 멋지게 해결한다는 식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게 '썬더볼(Thunderball)'이다. 소련을 대신할 스펙터(SPECTRE)라는 테러조직을 비롯해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영화의 성격, 스타일 "Bond, James Bond" 등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영화팬들에게 친숙한 영화 속 제임스 본드 캐릭터는 이렇게 탄생했다.
'썬더볼'은 플레밍의 소설이 먼저가 아니라 영화 스크립트가 먼저다. 플레밍이 영화 스크립트를 기초로 나중에 소설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 때문에 법정분쟁에 휘말렸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플레밍의 사망이 앞당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일들만 생기지 않았더라도 첫 번째 빅스크린용 제임스 본드 영화는 '닥터노(Dr. No)'가 아닌 '썬더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빈 맥클로리(Kevin McClory)와 이언 플레밍의 '썬더볼 법정분쟁' 이야기는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하자.
현재까지 나온 22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 중 거의 모두가 50년대에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 스타일을 그대로 따랐다. 007 시리즈 프로듀서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와 해리 살츠맨(Harry Saltzman)은 60년대부터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더욱 큰 스케일로 화려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플레밍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소홀했다. 플레밍의 원작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밝고 쿨한 분위기의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기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 결과 007 영화 시리즈에선 원작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의 슬픔, 분노, 고뇌, 복수, 고문, 위기 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척 해결되는 천하무적의 만능 수퍼 에이전트로 변한 덕분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과장되기 시작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결국 패배를 모르는 멋쟁이 스파이의 SF 판타지 어드벤쳐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007 제작진은 이언 플레밍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007 시리즈가 플레밍의 원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제임스 본드를 맡은 배우가 교체될 때가 되면 플레밍의 원작에 보다 가까워진 영화를 선보이곤 했다.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가 그 예다.(참고: '유어 아이스 온리'는 영화배우가 실제로 교체되진 않았지만 로저 무어가 4번 째 영화 '문레이커(Moonraker)를 끝으로 떠난다는 것을 전제로 준비했던 영화다)
배우가 교체될 때마다 원작 스타일로 돌아가던 전통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2006년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까지 이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처럼 그저 분위기만 살짝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이언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카지노 로얄'에선 원작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의 슬픔과 분노, 복수, 고문과 위기 등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척 해결되는 천하무적의 만능 수퍼 에이전트가 아닌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로 돌아간 덕분이다. 패배를 모르는 지나치게 과장된 멋쟁이 스파이의 SF 판타지 어드벤쳐에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로 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영화팬 중 일부가 거부감을 나타냈다. 일부 '이언 플레밍 PURIST' 중에서도 블론드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는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받아들이기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 친숙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카지노 로얄'에서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보면서 맷 데이먼(Matt Damon) 주연의 액션영화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를 떠올렸다. 본드팬들이 듣기엔 뚱딴지 같은 소리였다. 플레밍의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카지노 로얄'을 보면서 이언 플레밍을 떠올렸지 제이슨 본은 생각 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액션이 사실적이다', '가젯이 나오지 않는다', '젊은 본드가 주먹질하고 뛰어다닌다', '본드가 고통을 느끼는 등 평범해 졌다'는 것들을 근거로 들며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했다'고 했다. 제임스 본드가 '카지노 로얄'에서 플레밍의 원작으로 제대로 돌아가니까 '제이슨 본'이라고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제이슨 본 시리즈를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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