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의 바닷가에서 우주까지 제임스 본드가 가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만큼 세계여행을 많이 한 영화도 없을 것이다.
미스터 본드가 전세계의 경치좋은 곳들을 모두 방문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되도록이면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007 시리즈가 '그곳'을 로케이션으로 하면 영화가 항상 이상하게 나오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시아다.
아시아와 제임스 본드와의 악연은 1967년작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로 거슬러 올라간다. 2명의 일본인 본드걸과 멋진 경치, 존 배리의 사운드트랙, 그리고 숀 코네리 등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007 시리즈 중에서 허점이 가장 많은 허술한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로저 무어의 1974년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이다. 홍콩과 태국을 배경으로 한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는 제임스 본드 영화라기 보다는 로저 무어 주연의 액션 코메디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싱거운 영화다. 태국의 여러 관광명소를 비춰주는 등 관광홍보 역할은 톡톡히 했지만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는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졸작으로 꼽힌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로저 무어의 1983년 영화 '옥토퍼시(Octopussy)'는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007 시리즈 중 그나마 제일 나은 영화다. 진지한 원작의 제임스 본드 이미지는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1981)' 하나가 전부였을 뿐 '옥터퍼시'에서는 또다시 로저 무어 스타일의 액션-코메디로 돌아가는 바람에 빛이 바랬지만 현재까지 나온 아시아 배경의 007 시리즈 중에서 제일 잘 만들어진 영화로 꼽힌다.
그러나 미스터 본드와 아시아 로케이션의 악연이 끝난 건 아니었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1997)'로 '아시아 문제'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엔 중국 무술영화로 유명한 양자경을 본드걸로 캐스팅해 제임스 본드 영화를 거진 성룡/이연걸 분위기의 홍콩 액션영화처럼 만들어 놨다. '스트릿 파이터(Street Fighter)'의 천 리(Chun Lee)가 본드걸로 나온 것처럼 보이더라.
아시안 여배우를 리딩 본드걸로 캐스팅한 것은 환영할 만 했지만 '발길질 본드걸'은...
미스터 본드와 아시아의 마지막 악연은 역시 피어스 브로스난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2002)'다. 한국 로케이션은 아니었지만 한국과 관련있는 영화였는데 한국인 본드걸은 없고 그 대신 '본드보이'들만 득시글.
"NO GOOD!"
이게 전부가 아니다. '두번 산다(1967)'가 울고 갈 정도로 엉성한 플롯에 투명 자동차까지... 여기서 그만합시다.
이 정도라면 아시아 지역은 제임스 본드의 'DANGER ZONE'이라고 부를 만 하다.
물론, 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면 무조건 죽을 쑨다는 법은 없다. 아시아 로케이션으로는 멋진 제임스 본드 영화는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젠 007 시리즈가 아시아 지역에서 촬영한다는 소식을 접하면 '아이고, 또 망가지는구나' 하는 절망감에 아찔해 진다. 때문에, 아시아 로케이션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NO THANK YOU'다.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잘 만든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오는 걸 보고싶긴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절.
그런데 아시아만 문제가 아니다. 미스터 본드가 미국에 가도 말썽이 생긴다.
스타트는 좋은 편이었다. 미국에서 직접 촬영하진 않았지만 숀 코네리의 1964년 영화 '골드핑거(Goldfinger)'는 아주 잘 만든 007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촬영한 숀 코네리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1971)'가 얼마나 맹탕인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뉴욕과 루이지애나를 배경으로 한 로저 무어의 첫 번째 영화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1973)'도 범작에 속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로저 무어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뷰투어킬(A View To A Kill/1985)'도 듀란듀란(Duran Duran)이 부른 주제곡을 빼곤 건질 게 없는 영화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헐리우드 액션영화가 1년에 여러 편씩 나오는데 제임스 본드까지 미국에 와서 뛰어다닐 필요가 있을까?
결국, 미스터 본드에게 가장 안전한 지역은 유럽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스키를 탈 산이 필요하다면 알프스로 가면 되고, 해변이 필요하다면 지중해 연안을 훑거나 카리브해 연안으로 살짝 이동하면 된다. 동유럽으로 넘어가면 구 냉전시대의 긴장감이 야릇하게 감돌기 때문에 007 시리즈를 촬영하기에 매력적이다.
전세계의 경치좋은 관광지를 누비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것이 007 시리즈의 전통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화의 분위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는 것이다. 아무 데다 마구잡이로 돌아다닐 게 아니라 영국인 젠틀맨 에이전트, 제임스 본드에 잘 어울릴만 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엔 007 시리즈 로케이션으로는 의심스러운 곳들을 주로 찾아다녔다. 본드팬들이 '최고의 브로스난 본드 영화'로 꼽는 '골든아이(GoldenEye/1995)'는 괜찮았지만 나머지 영화들은 '위트'와 '가젯'을 제외하곤 007 시리즈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원작으로 돌아간 것 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리는 로케이션을 선택하는 '센스'도 돌아왔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2008)'에서 눈을 사막으로 바꾼 것은 용서하기 힘들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 로케이션은 'SO FAR SO GOOD'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드23'에선 어느 곳을 찾아가는 게 좋을까?
일단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피하는 게 좋다. 카리브해는 괜찮지만 최근들어 007 시리즈에 아열대 지역이 자주 나온 만큼 이번엔 'WINTER SPORTS'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좋을 것 같다.
본드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액션 스턴트 중 하나가 스키씬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월드 이스 낫 이너프(The World Is Not Enough/1999)'에도 스키 스턴트가 나오지만 대부분의 본드팬들은 '뷰투어킬(A View To A Kill/1985)'의 프리 타이틀 씬을 마지막 스키 스턴트로 기억한다. '월드 이스 낫 이너프'의 스키씬이 그만큼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물론, 눈과 얼음은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2002)'에도 충분히 나온다. 하지만, 무의미한 눈과 얼음보다는 멋진 스키 리조트가 007 시리즈에 어울린다.
스키 리조트가 007 시리즈에 나온 것은 1981년 영화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가 마지막이다. 만약 2010년에 개봉하는 '본드23'에 스키 리조트가 나온다면 29년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오는 셈이 된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추운 날씨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멋진 스키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스키 체이스 씬이 007 시리즈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지 않수?
어찌되든 간에 '본드23'에서도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어울리는 멋진 로케이션을 잘 선택하길 기대해 본다.
우주는 결사반대!
007 시리즈 매니아로서 오공본드님의 밀도 높은 포스팅 항상 즐겨보고 있습니다. 시리즈 전반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 그 밖의 여러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포스팅하는 오공본드님의 글은 그동안 제가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나 놓쳤던 부분과 007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가끔 007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과 기대감이 일치할 때 007 팬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답글삭제에고, 저의 막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