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일 토요일

제임스 본드가 영국인이어야 하는 이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로 불리는 제임스 본드(James Bond)가 영국의 소설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은 다들 알고있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플레밍의 소설이 영국 정보부를 배경으로 하며, 주인공 제임스 본드도 영국인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떨까? 영국인이 아닌 영화배우가 제임스 본드역을 맡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NO'다. 이웃(아일랜드)과 연방(호주)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배우로 범위를 약간 넓힌 적은 있어도 '브리티시'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6명의 제임스 본드

미국 배우가 한번쯤 제임스 본드를 맡았거나 007 시리즈가 영국인이 아닌 배우로 시작했다면 사정이 다를지 모른다. 영어가 잘 안되는 유럽배우를 제임스 본드로 세우고 영어음성을 더빙할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던 만큼 '만약 그 때 그랬더라면...'이라는 'WHAT IF' 게임을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브리티시에서 크게 벗어난 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맡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거의 50년 동안 이어진 전통이 깨졌을 때 일어날 문제들이다. 지난 2005년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6대 제임스 본드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벌어진 해프닝만 보더라도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인물도 좋고 키도 클 뿐 아니라 블론드도 아닌 미국배우로 대신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하더라도 '브리티시'가 아니라면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배우가 한다'는 전통이 50여년간 이어진 바람에 미국배우가 영국인 흉내를 내는 제임스 본드를 영화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니엘 크레이그도 처음엔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는 있다. 미국배우로 교체하더라도 일단 적응기간이 지나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관객들이 '미국인 제임스 본드'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겠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50여년간 'BRITISHNESS'가 007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는데 지극히도 미국적인 미국배우가 어색한 영국식 액센트로 '브리티시 시크릿 에이전트' 연기를 하는 것에 적응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비디오게임 캐릭터 중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툼 레이더(Tomb Raider)' 시리즈로 유명한 여자 캐릭터 라라 크로프트(Lara Croft)다.

90년대 중반 영국 게임 메이커 코어 디자인(CORE DESIGN)이 개발한 액션/어드벤쳐 비디오게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라라 크로프트는 게임쇼에 빠지지 않고 항상 나타날 정도로 유명한 캐릭터 였다. 그러나, 첫 번째 플레이스테이션2(PlayStation 2) 버전 게임이 온갖 버그들로 실패한 뒤 개발사가 영국의 코어 디자인에서 미국의 크리스탈 다이나믹스(Crystal Dynamics)로 옮겨졌다. 'Legacy of Kain', 'Soul Reaver' 등의 액션게임을 기억하는 게이머들이라면 크리스탈 다이나믹스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국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가 영화에서 라라 크로프트역을 맡은 것 까지는 좋은데 게임개발까지 미국회사에게 넘어갔다는 것에 영국 게이머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툼 레이더' 시리즈 퍼블리셔 EIDOS의 CEO는 "걱정할 것 없다. 게임을 미국에서 만든다고 해서 라라 크로프트가 텍사스 사투리를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게임을 미국서 개발한다고 해서 라라 크로프트까지 미국화 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

비디오게임 캐릭터를 놓고서도 이러한 얘기가 오가는 판국인데 미국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맡으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제임스 본드도 수많은 미국산 캐릭터들 사이에 낀 몇 안되는 영국 캐릭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영국성(性)'을 잃으면 아주 곤란해 진다. 턱시도 차림의 핸섬한 에이전트와 본드카, 섹시한 본드걸, 그리고 가젯 등의 '제임스 본드 포뮬라'만 갖추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BRITISHNESS'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BRITISHNESS'가 사라지거나 약해지면 형식적으로만 브리티시 에이전트인 '껍데기 제임스 본드'가 탄생하는 게 전부일 뿐 진정한 제임스 본드가 될 수 없다. 영화도 'xXx'와 같은 영화들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임스 본드는 계속해서 영국인 배우가 해야만 한다. EON 프로덕션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시작하는 것이라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겠지만 EON 프로덕션의 007 시리즈가 계속되는 한 제임스 본드는 영국인이 계속 맡아야 한다. 아일랜드와 호주까지 범위를 살짝 넓히는 것은 문제될 게 없지만 지나쳐선 안된다.

그렇다고 새로운 제임스 본드 후보를 찾아야 할 때가 벌써 됐다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모두 4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출연키로 계약했으므로 앞으로 2편이 더 남아있는 상태다. 현재 계약대로라면 적어도 24탄 까지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이어지게 되어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숀 코네리 다음으로 '세컨드 베스트 제임스 본드'로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남은 2편의 영화가 죽을 쑤면 밀려날 수도 있지만 현재로썬 '세컨드 베스트'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므로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맘에 들지 않을 리 없다.

크레이그의 남은 2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가 모두 성공한다면 맥스로 2편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계약을 연장해서 '본드26'까지 밀고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IS 제임스 본드

하지만, 그렇다고 크레이그가 영원히 제임스 본드를 연기할 수는 없는 법. 언제가 되든간에 크레이그를 이을 7번째 제임스 본드를 준비할 때가 오게 되어있다.

그 때가 왔을 때가 중요하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 후보를 물색할 때 쓸 데 없는 생각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변화가 중요하더라도 바꿀 게 따로 있지 007 시리즈의 전통을 크게 훼손하는 정신 나간 아이디어들은 말하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앞으로 여러 해가 남았는데 너무 앞서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세월은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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