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월드컵 그룹매치는 썩 재미있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됐던 2002년에도 그랬듯이 2010년 월드컵에서도 축구변방이 그룹 라운드를 통과하고 있지만 "월드컵이 변방에서 열린 만큼 축구변방이 16강에 오른다"는 씨나리오도 이젠 그다지 드라마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익사이팅했던 팀이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 또한 축구변방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 진출 티켓을 거머쥔 축구변방 중 하나다.
대개의 경우 미국 등과 같은 축구변방들의 경기는 재미가 없다. 인연이 있으니 그냥 보는 것이지 미국의 축구경기를 보면서 아주 익사이팅한 경기를 기대한 적은 여지껏 없었다. 그런데 이게 2010년 월드컵에서 달라졌다. 가장 재미있게 본 2010년 월드컵 그룹매치 리스트에 미국의 경기 3개가 모두 들어가게 됐으니 말이다.
미국의 첫 번째 상대는 잉글랜드였다. 많은 사람들은 잉글랜드가 강호 중 하나로 꼽히는 팀이므로 미국이 버티기엔 버거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가 먼저 골을 넣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잉글랜드 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다들 잘 알고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면으로 굴러오는 클린트 뎀시의 슛을 잉글랜드 골키퍼가 잡았다 놓치는 '펌블사건'이다. 영국인들은 어이없는 에러로 미국에게 동점골을 내준 잉글랜드 골키퍼, 로버트 그린(Robert Green) 덕분에 미국과 비겼다면서 미국을 상징하는 컬러가 "Red, White and Blue"가 아니라 "Red, White and Green"이라고 비꼬았다. 이탈리아가 들으면 기분나쁠지 모르지만, 잉글랜드 골키퍼 덕분에 미국도 "Red, White and Green"의 나라가 됐다.
월드컵 레벨에선 보기 힘든 잉글랜드 골키퍼의 에러 덕분에 1대1로 첫 경기를 마친 미국은 두 번째 경기인 슬로베니아전에서도 드라마를 찍었다. 이번엔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주심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경기내내 이해가 안 가는 판정을 반복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슬로베니아는 2골을 먼저 넣으며 2대0으로 앞서갔다.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미국은 후반들어 2골을 내리 넣으며 2대2 동점으로 따라붙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경기 종료를 몇 분 앞두고 세 번째 역전골까지 성공시켰다. 0대2로 뒤지던 미국이 3대2로 경기를 뒤집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말리 주심은 미국이 넣은 마지막 골을 무효처리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골이었는데도 주심은 미국의 파울을 선언하면서 골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전골 강도사건'은 잉글랜드 골키퍼 사건 때보다 훨씬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까지 프론트 페이지에 큰 사진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해서 2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 미국은 알제리와의 3차전 결과에 따라서 16강에 진출여부를 결정짓게 됐다.
그만큼 중요한 경기이니 이번엔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
미국은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도 '또' 골을 강도당했다. 전반전에 터진 클린트 뎀시의 골은 아무 문제없는 골이었지만 심판이 오프사이드를 선언하면서 날아갔다.
오프사이드 판정이 애매할 때가 많은 데다 축구엔 리플레이 리뷰가 없으므로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지만, 월드컵 그룹 라운드에서 두 경기 연속으로 골을 도둑맞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미국-알제리전을 직접 관전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표정에서도 골을 또 강도당한 데 대한 분노가 읽힌다.
골을 강도당하는 바람에 0대0으로 전반을 마친 미국은 후반 들어서도 여러 차례 득점기회를 잡았다. 후반이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클린트 뎀시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오기도 했다.
뎀시의 슛이 골포스트에 맞자 잉글랜드-슬로베니아전에서도 웨인 루니의 슛이 골대에 맞았다. 뎀시의 슛이 골포스트에 맞자마자 바로 뒤돌아서서 루니까지 골대를 맞춘 것이다. 드디어 루니의 첫 골이 터지나 했지만 이번에도 아니었다.
양쪽 경기에서 거의 동시에 골대를 맞추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하지만 문제는 미국이었다. 잉글랜드가 1대0으로 앞서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알제리를 무조건 이겨야만 16강에 오를 수 있었는데 골이 터지지 않았다.
결국은 이렇게 0대0으로 끝나는 것인가 싶었다. 만약 0대0으로 경기가 끝나면서 미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전반전에 강도당한 골이 다시 한 번 큰 파장을 일으키겠구나 싶었다.
미국의 결승골은 후반 45분이 다 지나고 인저리 타임으로 접어들었을 때 터졌다. 해결사는 역시 랜든 도노반이었다. 알제리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습에 나선 미국이 드디어 골을 넣었다.
도노반이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골을 넣자 미국의 스패니쉬 방송, 유니비전의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고오오올~~~!'을 무려 세 번씩이나 외쳤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1승2무로 16강에 진출했다. 잉글랜드 역시 1승2무로 16강에 올랐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조 2위로 그룹 라운드를 통과했다.
그렇다. 미국이 조 1위다. 미국이 조 1위로 16강에 오른 것도 수 십년 만이라고 한다.
이쯤 됐다면 미국을 'One of the Most Entertaining Team'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 경기부터 마지막까지 드라마의 연속이었던 데다 수 십년만에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으니 말이다. 미국의 축구경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자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냐고?
미국은 오는 26일 한국-우루과이전에 이어 D조 2위로 16강에 오른 가나와 16강전을 갖는다. 유일하게 16강에 오른 아프리카팀인 가나가 미국을 귀국시킬 지, 아니면 미국이 지난 2006년 월드컵의 복수를 할지 지켜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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