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9일 일요일

NFL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시애틀은 20여년 전에 잠깐 살았던 곳이다. 그 때 당시 시애틀 시혹스(Seattle Seahawks)는 내셔널 풋볼 컨퍼런스(NFC)가 아닌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AFC) 팀이었고, 홈구장은 지금의 퀘스트 필드(Quest Field)가 아니라 시애틀 다운타운 바닷가에 위치한 킹 돔(King Dome)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애틀 시혹스는 그리 잘 하는 풋볼 팀이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서 마이크 홈그렌(Mike Holmgren)이 시혹스 헤드코치를 맡은 이후 제법 강팀이 되어 수퍼보울에 오르기도 했었지만, 90년대 초엔 과히 좋은 팀이 아니었다. 승보다 패가 더 많은 팀이었으니까.

20년전 시애틀 풋볼 팬들은 시혹스가 워싱턴 주립 대학(Washington State University) 쿼터백, 드류 블레소(Drew Bledsoe)를 드래프트하길 바랐다. 그러나 1993년 드래프트 첫 번째 순번이었던 뉴 잉글랜드 패트리어츠(New England Patriots)가 블레소를 선택했고, 두 번째였던 시혹스는 노틀댐(Notre Dame) 쿼터백 릭 마이여(Rick Mirer)를 선택했다.

드류 블레소는 1996년 시즌 뉴 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수퍼보울까지 이끌었다. 비록 브렛 파브(Brett Favre)의 그린 베이 패커스(Green Bay Packers)에 패하긴 했지만 블레소는 3년만에 팀을 AFC 챔피언으로 만들고, 수퍼보울에까지 올라갔다. 블레소는 2001년 시즌 혜성처럼 나타난 톰 브래디(Tom Brady)에 패트리어츠 주전 쿼터백 자리를 내준 뒤 버팔로 빌스(Buffalo Bills), 달라스 카우보이스(Dallas Cowboys)로 팀을 옮겨다니다가 혜성같이 나타난 토니 로모(Tony Romo)에 또다시 주전 쿼터백 자리를 내주곤 은퇴했다. 2000년대 들어 신예 쿼터백에게 연달아 주전의 자리를 내주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블레소를 '실패한 쿼터백'이라 부르지 않는다. 운이 약간, 아주 약간, 따라주지 않았다는 평을 받긴 해도 블레소는 NFL에서 성공한 쿼터백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마이여는 실패작이었다. 시혹스는 헤매는 마이여에 계속 기회를 줬으나 가망이 없자 그를 내보냈고, 결국 마이여는 이 팀 저 팀을 떠돌며 백업 쿼터백으로 전전하다 은퇴했다.

그 이후 시혹스는 쓸 만한 쿼터백을 찾지 못했다. 현재 달라스 카우보이스 백업 쿼터백 존 킷나(Jon Kitna)도 마이여 이후 시혹스 주전 쿼터백을 거쳐간 선수 중 하나다.

그러다가 마이크 홈그렌이 그린 베이에서 시애틀로 팀을 옮기면서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홈그렌은 패커스에서 브렛 파브의 백업이었던 보스턴 칼리지(Boston College) 출신 쿼터백, 맷 해슬백(Matt Hasselbeck)을 시혹스로 데려왔다. 해슬백이 보스턴 칼리지 출신이라는 걸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90년대 중반 이 친구가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 팀과 경기를 갖기 위해 하와이를 찾았을 때 그 경기를 직접 가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혹스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건 마이크 홈그렌과 맷 해슬백이 온 이후부터 였다. 이들이 온 이후로 시혹스는 플레이오프에도 종종 올라가고, 비록 패하긴 했어도, 수퍼보울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을 뿐, 시혹스는 2000년대 후반부터 다시 루징 팀으로 돌아섰다. 시혹스는 2008년 시즌엔 4승12패, 2009년엔 5승11패로 시즌을 마쳤다.

자, 그럼 2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시애틀 시혹스의 역사 타령은 이쯤에서 그만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2010년 시즌엔 어땠을까?

NFC 서부에 속한 네 팀은 모두 수퍼보울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팀들이었다. 다른 디비젼엔 수퍼보울 콘텐더로 불리는 팀들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었지만, NFC 서부엔 어찌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약한 디비젼이었다는 얘기다.

얼마나 약했냐고?

시혹스가 7승9패라는 한심한 전적으로 디비젼 챔피언을 차지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으리라 본다.

정규시즌에 7승9패를 기록한 팀이 디비젼 챔피언이 되어 플레이오프에 오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7승9패로 디비젼 챔피언을 차지했다는 게 상당히 코믹하게 들리긴 해도 디비젼 챔피언은 디비젼 챔피언이다. 덕분에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경기도 홈에서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 7승9패로 디비젼 챔프에 올라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웃기는데, 플레이오프 경기를 홈에서 갖는 이점까지 얻은 것이다. 7승9패 팀이 플레이오프에 올랐다는 것도 흔치 않은 얘기인데, 그것도 홈에서 경기를 치룬다니 여러모로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7승9패 시혹스가 플레이오프 경기를 홈에서 치룰 자격이 있느냐"라는 소리도 들렸다.

더욱 코믹했던 건, 시혹스의 상대가 작년 시즌 수퍼보울 우승 팀인 뉴 올리언스 세인츠(New Orleans Saints)였다는 사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세인츠의 승리를 점쳤다. 7승9패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오른 시혹스가 세인츠를 이길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라스베가스도 여기에 장단을 맞췄다. 라스베가스 라인은 시혹스가 11점 언더독이었다.

그런데 왠지 냄새가 났다. 그것은 '업셋'의 냄새였다. 매년 NFL 플레이오프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업셋 드라마'인데, 토요일의 두 경기 중 적어도 하나에선 언더독이 페이버릿을 누를 것 같았다. 시애틀 시혹스와 뉴욕 제츠(New York Jets)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이길 것 같다는 'FEEL'이 왔다. 둘 다는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는 이긴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플레이오프 경기니까 말이다.

이길 만한 팀이 매번 항상 이기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스포츠를 보나?

누가 이겼냐고?

시혹스가 이겼다. USC를 떠나 시애틀 시혹스 헤드코치를 맡은 피트 캐롤(Pete Carroll)이 첫 시즌에 시혹스를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더니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세인츠를 누르고 'W'까지 챙겼다.

파이널 스코어는 시혹스 41, 세인츠 36.

그렇다. 7승9패의 시혹스 오펜스가 작년 시즌 수퍼보울 챔피언 세인츠의 수비를 상대로 무려 41점이나 뽑았다. 세인츠도 줄기차게 시혹스를 추격했지만, 4쿼터 막판에 터진 시혹스 러닝백 마샨 린치(Marshawn Lynch)의 67야드 러싱 터치다운이 결정타였다.




이 기막힌 러싱 터치다운 순간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자. 이 플레이는 앞으로 오랫동안 NFL 플레이오프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듯 하다.


자 그렇다면 나머지 와일드카드 경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뉴 올리언스 세인츠와 시애틀 시혹스의 경기에 이어 벌어진 토요일 저녁 두 번째 경기였던 뉴욕 제츠와 인디아나폴리스 콜츠(Indianapolis Colts) 경기에선 뉴욕 제츠가 17대16으로 이겼다.

시혹스와 제츠 둘 다 이기긴 힘들어도 둘 중 하나는 이길 것 같았은데, 결과는 두 경기 모두 언더독의 승리였다.

제츠는 14대16, 2점차로 뒤지던 4쿼터 마지막 공격 기회에 와이드리씨버 브레일런 에드워즈(Braylon Edwards)가 중요한 패스를 받아내며 역전 필드골 기회를 만들었고, 이어 킥커 닉 펄크(Nick Folk)가 필드골을 성공시켜 17대16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뉴욕 제츠 헤드코치 렉스 라이언(Rex Ryan)은 콜츠 쿼터백 페이튼 매닝(Peyton Manning)을 상대로 처음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뒀다.

카우보이스 팬들은 닉 펄크라는 이름이 왠지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 2009년 시즌까지 카우보이스 킥커였던 그 친구 맞다.

아래 이미지는 브레일런 에드워즈의 캐치 순간(위)과 닉 펄크가 결승 필드골을 성공시키는 순간(아래).




오늘 일요일에도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2경기가 벌어졌다.

첫 경기는 발티모어 레이븐스(Baltimore Ravens)와 캔사스 시티 칩스(Kansas City Chiefs)의 경기였다.

파이널 스코어는 레이븐스 30, 칩스 7.

경기 초반 1쿼터에는 레이븐스 쿼터백 조 플래코(Joe Flacco)가 펌블을 하자 이 기회를 살려 칩스가 먼저 터치다운을 하며 7대3으로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 터치다운이 칩스의 유일한 터치다운이 됐다. 레이븐스는 꾸역꾸역 득점을 하는 동안 칩스는 턴오버만 반복했다.

아래 이미지는 25야드 러싱 터치다운을 한 레이븐스 러닝백 윌리스 맥개히(Willis McGahee)의 모습.



왠지 금년 와일드카드에선 '새'들이 뜨는 것 같다고? 시혹스에 이어 레이븐스까지 승리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필라델피아 이글스(Philadelphia Eagles)까지 와일드카드 라운드를 통과했을까?

정답은 "NO"다.

필라델피아 이글스는 홈에서 벌어진 그린 베이 패커스(Green Bay Packers)와의 경기에서 21대16으로 졌다.

21대10, 11점차로 뒤진 4쿼터에 이글스 킥커 데이빗 에이커스(David Akers)가 34야드 필드골을 성공시켰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글스 헤드코치 앤디 리드(Any Reid)는 4th-and-1 상황에 퍼스트 다운을 노리지 않고 필드골을 택했다. 11점차였으므로 이글스는 필드골(3점) + 터치다운(6점) + 2포인트 컨버젼(2점)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이글스는 3점을 먼저 챙기기로 결정했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터치다운이든 필드골이든 순서와 상관없이 패커스와의 점수차를 좁히는데 필요한 득점을 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글스의 킥커 데이빗 에이커스가 흔들렸다. 이미 한 차례 필드골을 실패했던 에이커스는 34야드 필드골을 또 골 포스트 오른쪽으로 빗나가게 찼다.

이후 이글스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아 터치다운을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포인트 컨버젼에 실패하면서 21대16, 5점차로 따라붙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경기 종료를 앞두고 이글스는 마지막 역전 기회를 잡았으나, 이글스 쿼터백 마이클 빅(Michael Vick)의 패스가 엔드존에서 인터셉트되며 경기가 끝났다.

아래 이미지는 데이빗 에이커스의 필드골이 빗나가는 순간(위)과 이글스의 마지막 공격 기회에서 마이클 빅의 패스가 엔드존에서 인터셉트되는 순간(아래).




이렇게 해서 2010년 NFL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매치 4경기가 모두 끝났다.

이제 다음은 디비져널 플레이오프다!

다음 주에 벌어지는 경기들은 다음 기회에 둘러보기로 하자.

댓글 4개 :

  1. 으악 프로볼러 에이커의 어깨가 축 쳐져서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잊을 수가 없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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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런 러시에 매료되어 풋볼을 보나 봅니다. ㅎㅎㅎ
    대단하네요.
    달라 붙는데 밀어서 자빠뜨리고 ㅋㅋㅋ
    Awes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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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마지막 마이클 빅의 패스도 무모했다고 생각합니다.
    뭘 노렸는지는 알겠는데, 빅에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게 아닌가 싶거든요.
    괜히 서둘면서 잔머리 굴리는 게 분위기가 안 좋다 했더니 인터셉션...
    차분히 해도 될 만큼 시간도 충분했는데 말이죠.
    뭐 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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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세인츠 수비가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나 봅니다.
    밀치니까 저만치 날아가서 뒹굴고...ㅋㅋ
    무슨 스턴트맨도 아니고 말이죠...ㅋㅋ
    세인츠 vs 시혹스는 정말 재미있는 경기였습니다.
    시혹스는 7승9패 플레이오프 팀이라는 오명도 씻어냈구요.
    막판에 터진 마샨 린치의 러싱 터치다운은 뭐 예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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