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새비지', 원작의 매력을 제대로 못 살린 실망스러운 범죄 스릴러

요샌 R 레이팅을 받은 여름철 액션 블록버스터를 찾아보기 힘들다. 8090년대엔 '다이 하드(Die Hard)', '리썰 웨폰(Lethal Weapon)', '스피드(Speed)' 등 R 레이팅 여름철 블록버스터들이 꽤 있었지만 요샌 패밀리-프렌들리 레이팅인 PG-13을 받은 영화들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2012년 여름 R 레이팅을 받은 액션영화가 7월 초에 개봉했다.

그렇다.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의 액션영화 '새비지(Savages)'가 바로 그것이다.

'어벤져스(Avengers)', '어메이징 스파이더맨(Amazing Spider-man)' 등 패밀리 프렌들리 수퍼히어로 영화들이 여름철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데 웬 R 레이팅 액션영화가 7월에 개봉한 걸까? 

그렇다면 무슨 영화인지 살짝 훑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새비지'의 주인공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라그나 비치에서 마리화나를 재배, 판매하는 2명의 20대 청년들이다. 하나는 버클리 출신의 벤(애런 테일러-존슨)이고 다른 하나는 네이비 실즈 출신의 천(테일러 키치)이다. 벤은 마리화나 판매로 번 돈으로 전세계를 돌며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이며, 네이비 실즈 출신의 동업자 천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터프가이다. 벤이 머리로 사업을 한다면 천은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벤과 천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이지만 딱 한가지 만큼은 똑같다: 여자친구다.

부잣집 딸 오필리아(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벤과 천이 모두 남자친구다. 비밀스러운 삼각관계도 아니다. 까놓고 셋이서 같이 박고 싸는 사이다.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진다. 멕시코의 마약 범죄조직 바하 카르텔이 벤과 천에게 자신들의 조직에 가입할 것을 요구한 것. 그러나 벤과 천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에 열이 받은 바하 카르텔 여두목 엘레나(살마 아옉)은 킬러 라도(베니치오 델 토로)를 시켜 오필리아(줄여서 '오'라고만 부른다)를 납치한다. 벤과 천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이들의 공통된 '약점'인 오를 납치한 것이다.

멍멍이 같은 상황에 놓인 벤과 천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목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바하 카르텔에 납치된 오를 무사히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는데...

▲왼쪽부터: 천(테일러 키치), 오(블레이크 라이블리), 벤(애런 테일러-존슨)
'새비지'는 미국의 소설가 돈 윈슬로(Don Winslow)의 동명 원작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다.

윈슬로의 소설을 먼저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 '새비지스'가 얼마나 실없고, 비현질적이며, 폭력수위가 높은 영화가 될 지 충분히 짐작이 갔을 것이다.

소설 '새비지스'는 벤, 천, 오 등 메인 캐릭터들과 친구 사이인 녀석이 욕설과 실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마구 쓴 것처럼 보였다. 섹스, 마약, 폭력 등 청소년에 부적합한 것으로 가득한 소설이었지만 실제로는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그쪽 독자들의 입맛에 맞춘 소설이었다. 일부 대화 파트에선 영화 스크립트 형식으로 (그것도 폰트까지!) 느닷없이 바뀌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읽는 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실없는 스타일이 말이 되지 않는 스토리를 슬쩍 가려줬기 때문이다. 소설 '새비지'는 본 줄거리보다 이러한 실없는 넌센스 코메디와 같은 맛에 지루한 줄 모르고 금세 끝장 볼 수 있었던 소설이다.

첫 페이지가 "FUCK YOU"로 시작하는 소설이니 더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이런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면 왠지 막가는 녀석들과 막가는 마약 카르텔이 벌이는 막가는 액션영화가 됐을 것 같다고?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것만은 사실이다. 왠지 오랜만에 폭력수위가 상당히 높은 화끈한 액션영화가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영화 제작진은 소설의 최대 매력 포인트였던 '실없음', '엉뚱함', '넌센스', '유머', '스타일리쉬'를 걸러냈다. 원작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폭력 수위가 제법 높은 넌센스-액션-코메디로 만들었어야 옳았는데, 제작진은 말이 안 되는 원작의 막가는 스토리를 말이 되도록 만들려 했다. '청년 2명 vs 마약 카르텔'이라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불가능한 싸움을 스타일리쉬하게 부풀리고 과장한 영화를 기대했으나 올리버 스톤의 '새비지'는 그쪽이 아니었다.

소설 '새비지'의 스토리는 여자친구를 마약 카르텔에 납치 당한 2명의 청년이 카르텔의 요구에 응하는 척 하면서 마약 조직을 공격해서 빼앗은 돈으로 인질금을 마련하려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화 버전에선 벤과 천이 유명인 가면을 쓰고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멕시코 마약 조직들로부터 돈과 마약을 빼앗는 씬이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벤과 천이 마돈나와 레이디 가가, 브래드 핏과 조지 클루니 가면을 쓰고 마약 조직들을 공격하는 파트를 영화로 재미있게 옮겼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놀랍게도 제작진은 이러한 액션과 엉뚱한 유머를 많이 걸러낸 것이다. 소설에서 벤과 천이 계속해서 마약 조직을 공격하며 사건이 확대되는 과정이 유치하고 억지가 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새비지' 자체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쓰며 읽으면 안 되는 소설이었으므로 영화도 그러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 제작진은 가장 재미있게 영화로 옮겨야 했던 부분에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진은 소설에 나오지 않은 천의 옛 네이비 실즈 동료들까지 마약 조직 공격 씬에 등장시켰다. '청년 2명 vs 마약 카르텔'이라는 비현실적인 싸움을 스타일리쉬하게 묘사하지 않고 네이비 실즈 동료들을 추가해 현실감을 살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2명의 청년이 마약 카르텔과 전쟁을 벌인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새비지'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엉뚱한 유머와 비현실적인 설정을 걷어내더라도 사실적인 범죄영화가 절대 될 수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이 바람에 영화 '새비지'는 엉뚱하지도 사실적이지도 않고, 코믹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한마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캘리포니아 사막처럼 건조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지금 여기서 고리타분한 '원작 vs 영화' 타령을 하는 게 아니다. 원작은 훌륭한데 영화는 꽝이라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별 것 아닌 건 마찬가지다. 다만 포인트는 '새비지' 제작진이 각색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설 '새비지'의 가장 핵심적인 매력 포인트인 '유머', '엉뚱함', '스타일리쉬' 등을 거의 모두 영화에서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세 명의 남녀와 멕시코 마약 카르텔간의 전쟁을 나름 스타일리쉬하게 묘사하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마약, 섹스와 폭력도 모두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그저 형식적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었을 뿐 어느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다. 좀 더 엉뚱하고 코믹하고 자극적이길 기대했으나 1020대가 즐겨 보는 'O.C', '가십 걸(Gossip Girl)' 등의 TV 시리즈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세운 액션 테마의 뮤직 비디오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료는 다 들어갔는데 맛이 하나 같이 제대로 나지 않는 맹탕 요리를 먹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다 들어가긴 했지만 각각 제 맛을 낼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다. 재료만 요란했을 뿐 맛은 하나도 스타일리쉬하지 않았다.

캐스팅에도 물음표가 붙는다. 네이비 실즈 출신 천 역의 테일러 키치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벤 역의 애런 테일러-존슨은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나이가 너무 어려 보였으며 연기도 서툴렀다. 오 역의 블레이크 라이블리 역시 문제였다. 오는 부잣집 망나니 딸의 표상과 같은 캐릭터여야 했으나 라이블리는 전형적인 칙플릭 호러영화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했을 뿐 때로는 짜증나게도 하는 코믹한 부잣집 망나니 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연기가 서투르고 어색해 보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 영화의 주인공인 세 명의 캐릭터 중에서 두 명이 이상했다.

주연들이 대부분 한심했던 반면 조연들은 아주 훌륭했다. 여두목 엘레나 역의 살마 아옉(Salma Hayek), DEA 에이전트 데니스 역의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 엘레나의 오른팔과도 같은 킬러 라도 역의 베니치오 델 토로(Benicio del Toro) 등이 없었다면 '새비지'는 끝까지 봐주기 어려운 영화가 됐을 것이다.

특히 1989년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에서 남아메리카 마약 카르텔의 킬러 다리오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던 베니치오 델 토로가 다시 마약 카르텔 킬러로 돌아왔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제법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 멋진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했다.

▲'라이센스 투 킬(1989)'에서의 베니치오 델 토로
▲'새비지(2012)'에서의 베니치오 델 토로
하지만 아쉽게도 '새비지'에서 볼거리는 델 토로의 눈빛 하나가 전부였다. 잔인하고 화끈하고 자극적이면서 유머가 풍부한 막가파식 성인용 액션영화를 오랜만에 기대했었는데 크게 실망했다. 올리버 스톤의 '새비지'는 성인용 스릴러로 위장한 틴에이저 뮤직 비디오 수준이었으며, 원작소설의 매력 포인트를 영화에서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원작소설은 스토리가 웃긴 대신 스타일이 있었지만 영화버전은 스토리와 스타일 모두 한심했다.

아, 그러고 보니 델 토로 눈빛 말고 맘에 드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사운드트랙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새비지' 사운드트랙은 훌륭하다고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운드트랙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이유는 배경음악 선곡을 아주 잘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마약과 관련이 깊은 영화였기 때문인지 몽롱하고 환각적 느낌이 드는 싸이키델릭(Psychedelic) 스타일의 배경음악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엔드 타이틀 곡으로 사용된 'Here Comes the Sun'도 숨막히게 한다. 비틀즈의 클래식 히트곡을 유나(Yuna)라는 말레이지아 가수가 다시 불렀는데 아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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