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4일 화요일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 끝나고 자막 올라갈 때가 가장 재밌다

역시 이변은 없었다.

작품, 각색, 여우 조연은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12 Years A Slave)', 남우주연과 남우조연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여우주연은 '블루 재스민(Blue Jasmine), 각본상은 '허(Her)', 연출, 촬영, 편집, 음향, 시각효과 등을 비롯한 기술 부문은 '그래비티(Gravity)'가 쓸었다.

2013년엔 괜찮은 영화들이 제법 많았어도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영화가 없었으므로 19세기 미국의 노예 문제를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가 의미있는 주제의 영화라는 점에서 작품상을 가져 가고 연기상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블루 재스민', 나머지 부문은 촬영과 시각효과 등 기술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 흥행에도 성공한 '그래비티'가 쓸어담을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2014년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는 여기서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물론 일부 영화 관련 미디어들은 수상자가 누군지 뻔히 보이는 오스카 레이스를 흥미진진하게 꾸며보기 위해 "예측 불허의 와이드 오픈 레이스"라는 둥 글짓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것만으로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흥미롭게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아홉 편의 영화 중 '네브라스카(Nebraska)'와 '필로미나(Philomena)'를 제외한 일곱 편을 봤는데,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작품상을 받을 만해 보이는 작품이 '트웰브 이어즈 오브 슬레이브'라는 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미국 노예 문제, 아메리칸 원주민 문제, 유대인 홀로코스트, 인종갈등 문제 등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이젠 식상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무비 어워즈 시즌엔 그런 류의 영화들이 주목을 받고 상을 많이 받곤 하므로 '이번에도 그쪽이겠구나' 했더니 역시나 그쪽이었다.

또한, '그래비티'는 기술적인 부분과 흥행에 성공했다는 두 가지를 제외하곤 작품상 후보감으로 보이지 않는 영화였고, '아메리칸 허슬(American Hustle)'은 약간 부족했으며,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는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영화였다는 식으로 아홉 개의 후보작들을 하나씩 그어나가다 보면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가 정답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아홉 편의 후보작 중에서 작품상을 받을 만한 영화는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였고, 당연하게도 그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는 연기 부문에서도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남우 주연과 남우 조연은 지난 80년대 텍사스 에이즈 환자들의 실화를 그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매튜 매커너히(Matthew McConaughey)와 제리드 레토(Jared Leto)의 몫이라는 건 이미 확정적이었고 여우 주연 역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랜칫(Cate Blanchet)이 유력했다. 하지만 여우 조연 부문에선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의 루피타 뇽고(Lupita Nyong'o)가 신인상을 겸해서 여우 조연상을 받을 게 확실해 보였다. 만약 아카데미에 신인 연기상이 따로 있다면 약간 더 흥미로웠겠지만, 뇽고의 여우 조연상 수상 또한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감독 부문은 혹시나 하면서도 '역시나겠지' 했는데, 역시 '역시나'였다. '그래비티'를 연출한 멕시칸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이 사실상 확정적이었지만 '트웰브 이어즈 슬레이브'를 연출한 영국 영화감독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첫 번째 흑인 영화감독이 되는가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번엔 멕시칸의 차례였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첫 번째 라틴 아메리카 출신 영화감독이 됐다.

이변이나 업셋은 주제곡 부문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프로즌(Frozen)'의 'Let It Go'가 받을 게 확실시 되었지만 '또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수상하느냐'는 식상함이 있었던 만큼 '허(Her)'의 러브 테마 격인 'The Moon Song'이 이변을 일으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주제곡상 역시 예상되었던 'Let It Go'에게 돌아갔다.

헐리우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를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게 금년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유력 후보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 여러 다양한 영화 시상식을 거치면서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잡아주기까지 하다 보니 아카데미 시상식은 결과를 확인하는 의미가 전부인 이벤트가 돼버렸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쇼 이벤트 정도로 즐기려 해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을 맡은 앨런 디제너러스(Ellen DeGeneres)는 몇 해 전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을 비교적 잘 맡은 바 있었지만 이번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 때엔 진공청소기를 들고 나왔던 디제너러스는 이번엔 스마트폰으로 찍은 셀피(Selfie)를 트윗하기, 피자 주문 등으로 참석자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베테랑 엔터테이너인 만큼 크게 긴장한 것 같진 않았으나 디제너러스의 농담과 유머는 대부분 재미가 없고 지루했다. 오히려 코메디언 짐 캐리(Jim Carey)의 LSD 조크와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을 "레미제라블레"라고 발음해 웃음거리가 됐던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가 이번엔 'Let It Go'를 부른 여가수 이디나 맨젤(Idina Manzel)의 이름을 '아델 다짐'이라고 엉뚱하게 읽는 해프닝이 기억에 더 남았다. 트라볼타가 이번엔 작년의 "레미제라블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집중하다 작년의 주제곡상 수상자 아델(Adele)과 이름이 헷갈렸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존 트러블터블레'가 아니었다면 기억에 남는 순간이 없었을 정도로 밋밋하고 지루했다.

이렇다 보니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방송에서 가장 재미있는 파트는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가 돼버렸다. 왜냐,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땐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음악 메들리를 듣는 재미가 있어서다. 시상식 결과는 이미 다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흥미가 끌리지 않는 데다 시상식 진행도 별로 재미가 없다 보니 다 끝나고 마지막에 자막 올라가면서 귀에 익은 흘러간 영화음악 멜로디를 듣는 게 하이라이트가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아카데미 시상식을 좀 더 재밌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누가 상을 받을지 이미 다 눈치챈 상태에서 시상식 중계방송을 본다는 문제를 고치는 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시상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답시고 작년처럼 타이를 만드는 쇼를 연출하는 것보다는 그냥 하던대로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다.

그 대신 2위와 3위에게도 상을 주는 쪽으로 바꾼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다제너러스가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상을 받지 못한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에게 상대신 스크래치오프 로토 카드를 선물로 줬다. 디제너러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금년에도 한 부문 당 수상자 하나씩인 방식을 유지했는데 이는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브래들리 쿠퍼에게 스크래치 오프 로토 카드를 줬다.

"Once again, this year, they're continuing with the theme of only one winner per category. And I don't think that's fair so I brought consolation prizes for runner-up." - Ellen DeGeneres


물론 디제너러스가 장난삼아 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내친 김에 2등과 3등에게도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 또는 트로피를 주는 식으로 바꾼다면 재밌을 것 같는 생각도 든다. 작품상을 예로 들자면, 아홉 편의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다 해도 상을 받는 영화는 그 중에서 단 하나일 뿐이므로 현실적으로 어느 영화가 상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지 예측하기가 쉬운 반면 1위부터 3위까지 상을 준다면 순위 맞추기를 하는 새로운 재미가 보태질 수도 있다.

아직 동계올림픽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일 지도...ㅋ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인들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순으로 시상대에 올라서고 국기까지 올라가고 하면 좀 이상하겠지?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잘 자빠지기로 유명한 제니퍼 로렌스(Jennifer Lawrence)의 경우엔 상 받으러 무대에 올라가다 자빠지고 시상대에 올라가다 또 자빠질 테니 굉장히 불리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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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

  1. 결과 나와서 다 예상이었다 하는게 무슨 소용이있나요? 그리고 여우조연상 제니퍼 로렌스를 예상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는데 루피타 뇽고가 받을게 확실했었다니 이건 그냥 결과 보고 나서 나도 그렇게 예상했다 하면서 자기 영화 보는 눈이 있다고 자랑하는거 같은데 제가 보기엔 결괴보고 거기에 맞춰 글쓰는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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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년까지만 해도 시상식 이전에 누가 상을 받을까 예상해보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금년엔 올림픽 등등으로 건너뛰었는데 누가 상을 받을지 예측하는 거 생각보다 쉽습니다.
      제니퍼 로렌스? 작년에 여우 주연 받은 배우가 금년엔 여우 조연을?
      뇽고가 오스카 이전에 열린 SAG에서도 여우조연을 받으며 이미 쐐기를 박았는데도?
      이런 데도 결과를 봐야만 답을 안다면 좀 둔한거라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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