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개봉하는 유니버설의 자동차 액션영화 '패스트 앤 퓨리어스 7(Fast and Furious 7)' 홍보차 중국에 간 빈 디젤은 AP와의 인터뷰에서 '패스트 앤 퓨리어스 7'이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하지만 액션영화인 데다 속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빈 디젤이 '패스트 앤 퓨리어스 7'의 수상 가능성을 '진지하게' 주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카데미가 액션 쟝르의 영화와 속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아카데미가 액션영화와 속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카데미의 책임으로 돌리는 덴 문제가 있다. 왜냐면, 아카데미가 액션영화와 속편을 외면하도록 만든 가장 큰 책임이 바로 헐리우드에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액션영화와 속편을 외면하는 이유는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인기 블록버스터 프랜챠이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현재 헐리우드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영화 쟝르는 '팬보이' 용 빅버젯 액션-SF-수퍼히어로다.
또한, 현재 헐리우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화들은 계속해서 속편으로 이어지는 '팬보이' 용 시리즈물이다.
이러한 '팬보이' 용 액션-SF-수퍼히어로 영화와 그 속편들은 가면 갈수록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비슷비슷해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많은 영화 리뷰어들과 헐리우드 전문 미디어들은 전부 똑같아 보이는 청소년용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데 넌더리가 난 상태다. 언제부터인가 새로 제작 발표된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가 속편이 아니라고 하면 "신선하다"면서 대뜸 장점으로 꼽을 정도다.
이런 피로현상을 아카데미 멤버들이 모를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상업영화와 예술/독립영화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노골적인 상업영화가 아니면 상을 받기 위해 만든 예술/독립영화만 개봉할 뿐 그 중간에 해당되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영화가 사라졌다.
이렇게 되자 아카데미 멤버들은 유행을 따라 전부 비슷비슷해지고 신선도마저 떨어지는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상업영화를 외면하고 저예산 독립영화 쪽에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영화들 중 십중팔구는 제한 상영으로 인지도가 낮은 저예산 예술/독립영화들이며, 와이드 개봉으로 인지도가 높은 상업영화들은 대개 후보에 오르지 못하게 됐다. 상업영화는 흥행수익으로 만족하라는 것이고, 영화상은 저예산 예술/독립영화에게만 주는 패턴이 정착한 것이다.
상업영화와 예술/독립영화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액션-SF-수퍼히어로 쟝르의 상업영화는 12세 관객들을 겨냥한 예술성이 떨어지는 아이들 영화"라는 선입견이 만들어졌다. 화려한 비쥬얼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텅빈 '팬보이' 용 영화들이라는 것이다.
이 선입견의 벽은 상당히 높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이 이 선입견의 벽을 넘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트릴로지를 아무리 잘 만들었더라도 "그래봤자 아이들이나 보는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일 뿐"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쟝르의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었더라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진지한 톤의 액션-SF-수퍼히어로 영화는 대개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의 입맛에 맞춘 영화로 간주되지 성인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업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영화에 나름 도전했다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평가할 수 있지만,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빅버젯 블록버스터는 전적으로 상업 목적의 청소년용 '팬보이' 영화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있어서 의미있는 주목을 받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카데미로부터 의미있는 주목을 받기 위해선 '팬보이' 쟝르 영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007 제작진이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바이오픽 제작을 발표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하고 있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아무리 진지하고 심각한 톤으로 제작한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007 시리즈를 진지한 스파이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에드워드 스노든 바이오픽이라고 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카데미 측이 액션영화와 속편을 외면한다는 점만 비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얄팍한 '팬보이' 용 상업영화와 분명하게 차별화된 액션영화 또는 속편인데도 아카데미 측이 편견을 보였다면 일리있는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요새 헐리우드의 인기 액션영화와 속편 중엔 그런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므로 아카데미만 탓할 수 없다. 그러므로 헐리우드가 '팬보이' 용도 아니고 B무비도 아닌 아카데미가 주목할 만한 액션영화를 먼저 내놓는 게 순서다. 요새 나오는 액션영화는 십중팔구가 '팬보이' 용 아니면 B무비다. 이것부터 바꾸고 나서 아카데미의 편견을 따지는 게 순서라고 본다.
하지만 일각에선 아카데미가 청소년용 '팬보이' 상업영화이더라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는 점도 노미네이션에 참고해야 한다고 한다. 아카데미가 예술성과 작품성을 매우 중요시 한다고 쳐도 대중적인 영화를 외면하고 예술/독립영화만 후보에 올리면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Film Independent Spirit Awards)와 다를 게 없지 않냐는 지적도 있다.
나름 일리가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주연상 등 메이저 부문 후보에 '팬보이' 영화들이 잔뜩 올라오면 시상식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기 높은 영화들이 여러 편 후보에 오르면 시상식 중계방송 시청률은 올라가겠지만, 시청률 때문에 시상식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쪽을 택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인기상을 주는 '팝컬쳐 어워즈'처럼 인식되는 것을 아카데미 측이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상식 자체보다 시상식에 참석하는 연예인 리스트에 더 목을 맨다는 조롱을 여러 차례 받은 골든 글로브 어워즈(Golden Globe Awards)도 그마나 남아있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중계방송 시청률은 아카데미 멤버들이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동네 멀티플렉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닌 생소한 독립/예술영화만 잔뜩 나오는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방송에 시청자들이 흥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측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작품상 후보작 수를 최대 10편까지 늘리고 일반 관객들에게 친숙한 대중적인 영화 몇 편을 '들러리'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2월 열렸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8편의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나 일반 시청자와 청소년들에게 친숙한 영화는 단 한 편도 포함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은 누가 상을 받을지 예측하기 너무 쉽다는 비판을 받고있는데,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수상작을 아주 쉽게 예측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한 영화들이 후보에 오르지 못한 바람에 시청률이 더욱 떨어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각에선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작품상 후보작 수를 늘린 것인데, 일반 시청자에게 친숙한 영화를 후보에 넣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아카데미 측의 후보 선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인기영화를 포함한 보다 다양한 영화를 작품상 후보에 넣으라고 후보작 수를 최대 10편까지 늘린 것인데, 후보작 전체를 저예산 독립/예술영화만으로 채우면 뭘 하자는 것이냐는 지적이다.
현재 들리는 바에 따르면, 아카데미 측은 작품상 후보작 수를 다시 5편으로 축소하는 걸 검토 중이라고 한다. 아직 확정되진 않은 듯 하지만, 아카데미 측이 작품상 후보작 수를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상 후보작 수를 늘렸으나 기대했던 효과는 얻지 못한 대신 되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의 위신만 떨어졌다는 아카데미 멤버들의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작품상 후보작 수를 최대 10편으로 늘렸다는 자체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게 사실이며, 후보작 수를 늘렸어도 아카데미 멤버들이 인기영화를 후보로 선정하지 않고 독립/예술영화들로 채우고 있으므로 제 기능을 못한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러므로 아카데미는 작품상 후보작 10편 선정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보고 중계방송 시청률을 끌어올릴 새로운 방안을 모색 중인 듯 하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