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2일 수요일

'차일드 44', 연쇄살인 미스터리 영화 기대하면 실망할 것

스탈린 시대의 195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연쇄살인 미스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차일드 44(Child 44)'다.

CIA나 MI6 오피서를 주인공으로 한 냉전시대 영화는 많아도 KGB의 전신인 MGB 오피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흔치 않은 편이다. 195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차일드 44'는 다르다. 등장 캐릭터가 모두 소련인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 레오는 MGB 오피서다.

영국 작가 톰 롭 스미스(Tom Rob Smith)의 동명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 '차일드 44'의 출연진은 화려한 편이다. 영국 영화배우 톰 하디(Tom Hardy)가 주인공 레오 역을 맡았고, 스웨덴 여배우 누미 라파스(Noomi Rapace)는 레오의 아내 라이자, 스웨덴 영화배우 조엘 키너맨(Joel Kinnaman)은 MGB 오피서 바실리, 프랑스 영화배우 빈센트 카셀(Vincent Cassel)은 MGB 쿠즈민 소령, 영국 영화배우 개리 올드맨(Gary Oldman)은 네스테로브 밀리치야 장군 역으로 각각 출연했다.

연출은 댄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 라이언 레이놀즈(Ryan Raynolds) 주연의 스파이 스릴러 '세이프 하우스(Safe House)'를 연출했던 스웨덴 영화감독 대니얼 에스피노사(Daniel Espinosa)가 맡았다.

직장 동료부터 시작해서 아내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선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살인사건 발생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배경으로 삼은 '차일드 44'는 MGB에서 억울하게 파면당한 레오가 밀리치야로 직업을 옮긴 뒤 어린이만을 계속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한다는 줄거리다.


영화 '차일드 44'는 원작 소설에 비교적 충실하게 옮겨진 편이었다. 대개의 경우 이건 단점으로 꼽히지 않는다.

그러나 '차일드 44'의 경우는 단점으로 꼽힌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 버전 역시 전개가 매우 느렸기 때문이다.

'차일드 44'는 얼핏 보기에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데 포커스를 맞춘 범죄-미스터리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의 삶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해야 정확하다. 원작소설부터 여기에 해당된다. 소설 '차일드 44'는 1950년대 초 소련에서 MGB 오피서로 근무하던 주인공 레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소설에 가깝지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범죄 스릴러물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린이가 살해당하는 살인사건으로 소설이 시작했지만 주인공 레오가 등장하면서 부터 레오의 이야기로 옮겨갔으며, 살인사건 이야기는 뒤로 밀려났다. 연쇄 살인사건 수사는 소설의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지금 무엇에 대한 책을 읽는 건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스트레스로 가득 찬 레오의 MGB 오피서 생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지만 기대했던 연쇄살인 관련 미스터리물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주인공 레오의 캐릭터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보였으나 서두가 너무 길어 보였다. 중반에 이르러서야 연쇄 살인사건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보니 줄거리 전개가 굉장히 더디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읽을 만은 했지만 메인 플롯으로 여겼던 살인사건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이 이랬기 때문에 영화 버전은 속도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에 대한 영화처럼 홍보했는데 주인공 레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처럼 너무 길어지면 영화가 지루해질 수도 있었으므로 원작소설과 큰 차이가 나더라도 줄거리 진행 속도를 빠르게 만들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영화 버전도 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했다고 할까?

영화의 예고편은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인텐스한 스릴러처럼 보이도록 제작했으나 실제 영화는 암울했던 스탈린 시대에 MGB 오피서로 근무했던 레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렇다 보니 영화 버전도 마찬가지로 줄거리 진행 속도가 더뎌 보였고, 연쇄살인에 대한 영화인지 아니면 스탈린 시대에 대한 영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범죄 스릴러를 기대했는데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차일드 44'는 '스탈린 시대 소련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그럭저럭 이해하고 봐줄 만할 것이다. 하지만 연쇄살인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를 기대하면 큰 실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지루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분함이 어느 정도 밀려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먼저 소설을 읽은 덕분에 어느 정도 각오를 했기 때문인지 크게 지루하진 않았다. 영화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연쇄 살인사건 파트를 완전히 걷어내고 스탈린 시대 MGB 오피서들의 삶을 그린 영화로 만들었더라면 차라리 더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작소설부터 역사소설과 범죄소설을 깔끔하게 조합시키지 못한 소설이었으므로 영화 탓만 할 순 없었다.

'차일드 44'는 만족스러운 영화는 절대 아니었지만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만 카운트다운하며 기다릴 정도로 버티기 괴로운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가지 괴로웠던 게 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안 발음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소련인이었기 때문에 모두 러시안 액센트로 대화를 나눴다. 물론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굉장히 불필요해 보였다.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만큼 등장 캐릭터들이 모두 러시안 액센트로 대화를 나누는 게 현실감을 살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인이 러시안 액센트의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이라서 되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소련인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굳이 러시안 액센트까지 흉내낼 필요가 없어 보였다.

톰 크루즈(Tom Cruise) 주연의 2008년 영화 '발키리(Valkyrie)'는 이와 반대로 등장 캐릭터 모두가 독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진이 독일 액센트를 흉내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독일인들이 미국 또는 영국식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출연진이 독일 액센트를 흉내내지 않은 바람에 현실감이 떨어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독일군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출연진이 독일 액센트를 흉내낸다고 현실감이 크게 높아지는지 궁금했다. 보다 더 그럴싸하게 보일진 몰라도 그래봤자 여전히 영어로 만든 영화라는 사실엔 변함없는데, 그럴 바엔 그저 자연스럽게 미국 또는 영국식 영어로 대화하도록 놔두는 게 더 낫지 않나 생각했던 것이다.

'차일드 44'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톰 하디가 러시안 액센트로 대화할 때마다 자꾸 웃음이 솟구칠 정도로 러시안 액센트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영화에 집중하는 데 은근히 방해가 될 정도였다. 어색한 러시안 발음 때문에 연기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또한, 러시안 액센트의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 미국 또는 영국에 거주하는 러시안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련에 사는 소련인들이 굳이 러시안 액센트의 영어로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차일드 44'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속편을 암시하면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현재로썬 속편 제작 가능성에 대해 논할 단계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만약 속편이 제작된다면 러시안 액센트 문제를 재검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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