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1일 목요일

'007 스펙터': 007 제작진은 왜 스파이 영화를 못 만드나

많은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스파이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물이라는 데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무늬만 스파이물일 뿐인 액션 어드벤쳐 시리즈라고 한다. 일각에선 007 영화 시리즈의 쟝르를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분류하기도 한다. 007 시리즈의 포뮬라를 액션 어드벤쳐물의 서브 쟝르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 포뮬라를 모방한 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었으므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쟝르로 분류하는 것에도 일리가 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물이 아니라는 논란은 단지 영화 시리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 시리즈부터 마찬가지 지적을 받아왔다. 사실적인 스파이 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e)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물이 절대 아니라면서, 007 시리즈가 스파이물로 인식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존 르 카레는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와 가진 인터뷰에서 "제임스 본드를 싫어한다"면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스파이 소설로 포함시키는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I dislike Bond. I'm not sure that Bond is a spy. I think that it's a great mistake if one's talking about espionage literature to include Bond in this category at all." - John Le Carre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영국 정보부 MI6 오피서로 설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007 시리즈의 세계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는 양복 입은 1인 특공대원에 가깝고,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는 패배를 모르는 코믹북 수퍼히어로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실제 정보부 생활을 경험한 존 르 카레의 눈엔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물로 보일 리 없다. 일각에선 2차대전 당시 해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특수작전을 지켜봤던 이언 플레밍이 당시 경험을 토대로 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냉전시대에 정보부 생활을 한 존 르 카레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스파이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존 르 카레의 주장에 일리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007 제작진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진지한 톤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 하고있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다 진지하게 만들기 위해선 크게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첫 째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의 스타일을 살리는 것이고, 둘 째는 보다 사실적인 스파이 스릴러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당시에 007 제작진이 꺼내들었던 카드는 '원작소설'이었다.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의 첫 번째 제임스 본드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였고,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바로 이어지는 속편 '콴텀 오브 솔래스' 역시 플레밍의 숏스토리에서 제목을 따왔다. 007 영화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원작소설의 캐릭터와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만큼 007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에서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뒀다. 007 제작진과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당시에 얼마나 자주 원작 타령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007 제작진의 목표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알고있을 것이다.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에 존 르 카레 +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스타일을 접목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카이폴(Skyfall)'에서 007 제작진이 워너 브러더스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트릴로지를 수치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게 모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플레밍의 원작소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 "어두운 톤의 60년대 스파이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 스타일의 인텐스한 액션"을 중얼거리던 007 제작진이 '스카이폴'에선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 '다크 나이트'까지 갖다 붙인 것이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진지한 톤으로 만들겠다면서 '다크 나이트' 스타일을 모방하기로 한 것은 큰 실수다. 007 시리즈를 진지한 톤으로 만드는 방향 자체부터 틀렸다. '다크 나이트' 스타일을 모방해서 007 시리즈를 진지한 톤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진지한 톤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보다 그럴듯한(PLAUSIBLE) 스파이 플롯을 준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우주선과 잠수함을 하이재킹하거나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지나치게 과장된 판타지 성격이 짙은 코믹북 수준의 플롯으로 악명이 높은 영화 시리즈가 007 시리즈인 만큼, 진지한 톤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라면 그 부분을 고칠 생각을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겉으로만 묵직하고 무언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별 것 없는 틴에이저용 겉멋 부리기 스타일과 줄거리로는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007 제작진은 '스펙터(SPECTRE)'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문제로 오피셜 007 시리즈에 등장시키지 못했던 범죄조직 스펙터를 다시 영화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 스토리를 만들 수 있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스펙터'의 줄거리는 지난 '스카이폴'보다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007 제작진은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과거사 이야기', '형제간의 갈등' 등 진부한 테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007 스펙터'의 스크립트를 훑어본 결과 전체적인 스토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지난 '스카이폴'과 마찬가지로 007 시리즈와 잘 어울리지 않는 스토리였다. 본드와 블로펠드의 관계를 어릴 적 함께 생활했던 사이로 바꿔놓은 것을 보면서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007 제작진이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에 열광하는 1020대 관객들을 의식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도,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토르(Thor)와 로키(Loki)가 연상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007 제작진이 헐리우드를 먹여살리는 코묻은 돈과 클래식 본드팬들을 모두 만족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으나, 이들이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나 의심스러웠다.

스크린라이터 존 로갠(John Logan)은 지난 '스카이폴' 때부터 계속해서 "제임스 본드의 내면 묘사"를 중얼대고 있다. 그러나 본드의 과거사를 계속 더듬는다고 해서 특별한 게 나오지 않는다. 별다른 게 없기 때문이다. 로갠이 계속해서 과거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본드가 내면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라서 그것밖에 붙들고 늘어질 게 없기 때문인 듯 한데, 이런 식으로 억지로 갖다붙이기 식으로 본드의 내면을 묘사해서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스파이 쟝르에 대한 무지를 억지로 갖다 붙인 쓸데 없는 본드의 내면 묘사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니까 "드라마 쟝르의 영화에 어울리는 샘 맨데스(Sam Mendes)와 존 로갠에게 007 시리즈를 맡겨놓은 바람에 이상하게 됐다"는 말이 자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샌 스파이 쟝르가 한물 갔고 코믹북 수퍼히어로 쟝르가 유행하지 않냐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확하지도 않다. 청소년층을 겨냥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만 놓고 보면 SF-수퍼히어로 쟝르가 장악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소설과 TV 시리즈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스파이 쟝르가 제 2의 전성시대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From Spooks to The Game, why the bleak world of spy thrillers is back"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케이블 TV의 '홈랜드(Homeland)', '아메리칸(The Americans)', 영국 TV의 '오너러블 우먼(The Honorable Woman)', '더 게임(The Game)', 빅 스크린 데뷔를 한 영국 TV 시리즈 '스푹스(Spooks: The Greater Good)', 그리고 여러 스파이 소설의 인기 등을 꼽으며 암울한 톤의 스파이 픽션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이런 유행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물론 '007 스펙터'에 영국 정보기관 MI5와 MI6 합병, 스펙터가 정보부를 장악하려는 음모 등 스파이 픽션 비스무리하게 보이는 서브플롯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에 메인 무대를 내주고 뒷전으로 밀려나 보였다. 지난 '스카이폴'에서 실바(하비에르 바뎀)가 저지른 테러와 범죄엔 별 관심이 끌리지 않고 M(주디 덴치)과 실바의 과거사가 전부처럼 느껴졌듯이 이번 '스펙터'에서도 정보부 관련 플롯은 들러리일 뿐이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미스터리가 사실상 전부인 스토리로 보였다. 등장 캐릭터의 과거사에 포커스를 맞춘 드라마 플롯처럼 보였지 스파이의 세계에 포커스를 맞춘 스파이 픽션 플롯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지난 소니 픽쳐스 해킹 사태로 유출된 영화사 경영진들의 이메일 내용 중에 스펙터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스펙터가 꾸미는 음모가 메인 무대에 오르지 않고 본드와 블로펠드의 과거사 미스터리가 대부분이라서 내용이 약간 싱겁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그렇다면 왜 007 제작진은 스파이 플롯에 포커스를 맞춘 스토리를 만들지 않는 걸까?

한마디로 그쪽 분야엔 소질이 없는 걸까?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걸까?

오래 전부터 강조해 왔지만, 제대로 된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오려면 007 시리즈와 스파이 픽션 쟝르를 훤히 꿰뚫고 있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이언 플레밍이 남긴 제임스 본드 원작소설이 남아있던 과거 시절엔 스파이 픽션의 흔적이 적잖이 남아있던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을 기초로 삼을 수 있었으므로 전문가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007 영화 제작진은 연출, 각색, 편집, 촬영, 음악 등 주요 스탭들이 크게 바뀌지 않고 알던 사람들끼리 작업을 했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007 시리즈를 함께 만들면서 모두가 007 시리즈 전문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플레밍의 소설이 모두 바닥나고 과거의 전문가급 007 제작진들이 모두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난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의 007 시리즈의 여러 불안한 문제점들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떠난 플레밍을 이제 와서 다시 두들겨 깨울 수 있는 게 아니므로 007 제작진은 모던 스파이 픽션에 정통한 작가를 찾아 현시대에 맞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 스토리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이것을 하지 않고 있다. 이언 플레밍이 남긴 소스 자료가 다 떨어지고 007 시리즈 베테랑 스크린라이터 리처드 메이밤(Richard Maibaum)이 세상을 떠난 뒤 007 시리즈의 스토리가 클래식 007 시리즈 이미테이션이 아니면 헐리우드 액션 영화 이미테이션에 그치는 이유 중 하나도 현대판 제임스 본드 스토리를 쓰는 재주가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은 스파이 스릴러 쟝르 전문 작가를 고용해서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는 스토리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일반 스크린라이터들도 그럭저럭 흉내낼 수는 있겠지만, 90년대 이후 공개된 007 시리즈를 보면 스파이 스릴러 전문 작가의 도움 없인 이미테이션 수준에 계속 머물 것으로 보인다. 007 제작진은 90년대의 한심스러운 스크립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대에 들어선 폴 해기스(Paul Haggis), 피터 모갠(Peter Morgan), 샘 멘데스, 존 로갠 등 '굵직한' 이름의 영화인들에게 제작을 맡기고 있으나, 이전에도 말했듯이 이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저들의 '이름값' 뒤에 숨으려는 얄팍한 속임수로 보일 뿐 007 시리즈의 퀄리티를 개선할 올바른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샘 멘데스와 존 로갠이 007 시리즈에 가져온 '변화'라는 것은 '미션'을 뒤로 밀고 '과거사'를 앞으로 꺼내놓은 정도가 전부다. 007 시리즈와 일반적인 스파이 스릴러 쟝르에선 어떤 것이 '메인'이고 무엇이 중요한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변화를 준 것"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이들은 지난 '스카이폴'에서도 그랬고 곧 개봉할 '스펙터'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는 점보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색깔을 더 낼 수 있는가만 생각하는 듯 하다. 이런 게 전부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스파이 어드벤쳐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007 시리즈를 제대로 잘 만들 수 있는 '적임자'를 찾는 게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007 제작진은 '007 시리즈'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를 앞세우고 유명 영화배우와 영화감독이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밀고 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실력과 퀄리티를 앞세운 게 아니라 유명 브랜드로 겉치장만 요란하게 해서 코묻은 돈이나 쓸어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싸구려 식으로는 쉽게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높은 스탠다드를 요구하며 발견된 문제점을 바로바로 고쳐나가면서 보다 높은 퀄리티의 영화가 나오기를 열망하는 하드코어 본드팬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댓글 2개 :

  1. 애초에 요새 스크린에는 더 이상 스파이장르를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근래에 모스트원티드맨이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워낙 좋은 작품인지라...

    아예 새롭게 그럴듯하게 첩보장르를 그려내는 스크린라이터가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현상태라..

    답글삭제
    답글
    1. 원작소설이 훌륭하거나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기초로 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 별로죠.
      007 경우엔 스파이 쟝르 전문 소설가에게 스펙터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를 맡기는 게 최선책일 듯.
      이렇게 하면 최소한 스파이 쟝르 공식을 비스무리하게나마 따른 스토리는 나올 수 있겠죠.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