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 24탄 '007 스펙터(SPECTRE)'가 개봉했다. '007 스펙터'는 2006년 007 시리즈 21탄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을 통해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데뷔한 영국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네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다.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에서 젊고 거칠고 진지한 이미지를 앞세워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 제임스 본드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여기까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는 클래식 007 시리즈에서 지나치게 멀어지려 했다는 점이다.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정도만 느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를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화를 주려고 했다.
'제임스 본드 비긴스' 격이던 '카지노 로얄'까지는 문제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바로 이어지는 속편인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는 200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유니버설의 제이슨 본(Jason Bourne) 트릴로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티가 났고,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Skyfall)'은 줄거리는 전편과 이어지지 않았으나 엉뚱하게도 워너 브러더스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트릴로지를 노골적으로 모방한 '수퍼히어로 워너비' 영화였다. 이 바람에 '콴텀 오브 솔래스'의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 워너비'처럼 보였고, '스카이폴'에선 '배트맨 워너비'처럼 보였다.
'제임스 본드 비긴스' 성격의 영화는 '카지노 로얄' 하나로 끝내고 그 이후부턴 정상적인 007 시리즈로 되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바닥난 007 제작진은 프리퀄 세계에서 벗어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을 우려해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 007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에서 선보인 새로운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 이미지가 퇴색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든 클래식 007 시리즈의 본드와 반대로 가는 게 살 길"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파격적인 변화를 통한 충격요법으로 시선을 끄는 쪽을 택한 듯 했다.
문제는, 클래식 제임스 본드와 거리 두기가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를 '제임스 본드 비긴스' 프리퀄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완성 버전 제임스 본드에 묶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이런 까닭에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는 우리가 알고 있던 클래식 제임스 본드가 되기까지의 과정만 보여주다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를 보여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제임스 본드 비긴스'에서 맴돌다 끝날 것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 영화를 기대하던 본드팬들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냐", "언제까지 본드의 과거 이야기에 머물 것이냐"는 불만이 쏟아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스펙터'에서도 이런 한심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또 봐야 하는 것일까?
이번에 개봉한 '007 스펙터'에선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
◆캐릭터
'007 스펙터'의 프리-타이틀 씬에서 본드가 멕시코 시티의 건물 지붕을 뛰어다니는 씬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가 또 돌아왔구나" 하는 게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본드가 뛰어다니는 운동량 하나 만큼은 변함없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007 스펙터'의 제임스 본드는 지난 '스카이폴' 버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영화의 분위기부터 약간 차이가 났고, 지난 번 영화보다 좀 더 클래식 007 시리즈 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지난 '스카이폴'에선 거의 항상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폼을 잡았으나 이번 '007 스펙터'에선 전편보다 부드럽고 여유감이 느껴지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다. 어색할 정도로 항상 딱딱하게 폼잡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달은 듯 했다. 유머 파트는 조금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난 번처럼 항상 굳고 긴장된 모습만 보여주던 데서 벗어나 종종 미소도 보일 줄 아는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이는 제임스 본드로 변화를 준 것은 나쁘지 않았다. 터프가이 캐릭터를 억지로 연기하는 듯한 어색함이 덜했다.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터프가이 캐릭터를 부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보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제임스 본드 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보는 사람도 편하다.
또한, 항상 다른 영화 시리즈의 캐릭터를 흉내내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보려던 '실험용 제임스 본드'에서 벗어나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이는 제임스 본드' 쪽으로 약간 이동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이름만 제임스 본드일 뿐 실제 제임스 본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도 클래식 007 시리즈와 과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치게 색다른 시도를 한 결과였는데, 이번 '007 스펙터'에선 이런 문제도 어느 정도 바로잡아 보려 한 것 같았다.
크레이그는 '007 스펙터'에서 클래식 제임스 본드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카지노 로얄'은 초보 007,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제이슨 본 짝퉁, '스카이폴'은 배트맨 짝퉁이었다면, '007 스펙터'에선 처음으로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연기했다. '007 스펙터' 영화 자체는 전작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프리퀄 시리즈의 일부였지만, 제임스 본드 캐릭터 만큼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들어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제임스 본드에 가까운 캐릭터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다만, '007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를 "어쌔신"으로 묘사한 건 문제가 있다. 제임스 본드가 살인면허(Licence to Kill)를 소지한 것은 맞지만, 본드의 직업이 살인인 건 아니다. 살인은 본드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 부분일 뿐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살인면허를 소지한 제임스 본드는 법의 영역 밖에서 활동하는 가공의 비밀요원 정도가 보다 정확하지 "어쌔신"은 아니다. "어쌔신"이라고 하면 좀 더 쿨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제임스 본드가 "어쌔신"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본드가 핸드건을 휴대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누군가를 사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방어용으로 핸드건을 소지하는 것이지 공격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핸드건으로 유명한 월터PPK도 호신용 컴팩트 사이즈 핸드건 쪽에 가깝다.
◆헤어스타일
지난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머리가 너무 짧았다. 지난 2005년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발탁되자 마자 불거졌던 "블론드 본드 논란"을 의식한 나머지 최대한 블론드란 사실을 가려보기 위해 머리를 짧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젊고 거칠어 보이기 위해 머리를 짧게 했을 수도 있지만, 제임스 본드는 원작소설에서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007 스펙터'에선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엔 지난 '스카이폴' 때보다 머리가 길어졌다. 크레이그의 '007 스펙터' 헤어스타일은 과거의 제임스 본드에 비하면 여전히 짧은 편이었지만 지난 '스카이폴'에서처럼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짧진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지난 '스카이폴'의 까까머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약간이나마 길어진 것은 맘에 들었다.
지나치게 짧은 머리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아니다.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면 '힛맨(Hitman)' 시리즈로 옮겨가야 한다.
◆근육
'카지노 로얄', '콴텀 오브 솔래스', '스카이폴' 등 지금까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제임스 본드 영화 모두 크레이그가 근육을 키운 상반신을 드러내는 씬이 있었다. 거칠고 우람한 터프가이 캐릭터처럼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크레이그는 근육질 마초가이에 어울리는 타잎이 아니다",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도 근육질 마초가이 타잎이 아니다"는 지적을 받았다. 크레이그에게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고 원작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근육질이 아닌데 굳이 눈에 띄게 근육을 키운 몸을 만들 이유가 있냐는 것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근육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 이유 역시 지난 2005년 불거졌던 "다니엘 크레이그 키 논란"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크레이그의 키가 5피트 10인치라서 역대 제임스 본드 중 키가 6피트가 채 되지 않는 최단신 제임스 본드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체격이 좋고 피지컬한 제임스 본드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남자 배우들이 근육을 키우고 나와서 여성, 게이 관객들을 상대로 '스트립쇼'를 하는 게 헐리우드 유행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도 이를 따라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성용 판타지 영화인 007 시리즈까지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007 제작진이 유행을 따라하는 데 환장한 듯 했으므로 이 또한 그 일환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007 스펙터'에도 다니엘 크레이그가 웃통을 벗고 등장하는 씬이 나올까?
나오긴 나온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왜냐면, 다름아닌 주제곡이 흐르는 메인 타이틀 씬에만 나오기 때문이다.
주제곡이 흐르는 007 시리즈 메인 타이틀 씬은 전통적으로 여성 누드 댄서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양보할 준비가 돼있다.
크레이그의 '노출씬'은 메인 타이틀 하나가 전부였다. 메인 타이틀 씬을 제외한 다른 파트에선 웃통을 벗은 크레이그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러브씬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 서로 키스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였으며, 007 시리즈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던 베드씬도 없었다. 지난 '스카이폴'에선 크레이그가 웃통을 벗은 모습이 몇 차례 나왔으나 이번 '007 스펙터'에선 주제곡이 흐르는 메인 타이틀 씬을 제외하곤 일체 나오지 않았다.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진부한 러브씬/베드씬을 걷어내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쓸데 없는 '스트립쇼' 씬도 없애버린 제작진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다음 번 영화부턴 제임스 본드의 누드씬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그 대신 과거의 엑스트라 본드걸들을 되돌려놓기 바란다. 호텔 풀장에서 알록달록한 비키니 차림으로 떼지어 몰려다니는 본드걸들을 되돌려달란 말이다. 007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남성용 판타지 영화이므로 스트레이트 남성들의 입맛에 맞는 눈요깃 거리를 곳곳에 배치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물론 일부 리버럴 성향 언론으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에 소심하게 신경쓰는 건 제임스 본드답지 않다. 007 시리즈가 원작소설부터 영화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남성용 판타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큼 크게 눈치볼 필요가 없다. 여성 취향에 맞춘 여성용 영화들도 제작되는데 007 시리즈를 남성 취향에 맞춘 영화로 만드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지난 90년대부터 'POLITICAL CORRECTNESS'의 여파로 엑스트라 본드걸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007 시리즈가 남성용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만큼 지나치게 몸을 사리며 눈치볼 필요가 있나 싶다.
◆액션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는 몸으로 때우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해졌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몸으로 때우는 이미지가 강한 본드로 굳은 이유는 007 제작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과거 제임스 본드에 대한 비교와 비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본드팬들은 숀 코네리(Sean Connery)의 본드와 로저 무어(Roger Moore)의 본드를 비교하면서 "숀 코네리는 거칠고 격렬한 액션에 능했으나 로저 무어는 싱글거리며 농담만 하다 끝났다"고 했다. 여기까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걸 빠뜨렸다. 코네리는 거친 액션 씬이 "필요할 때" 효과적이었다는 점이다. 코네리의 본드는 시도 때도 없이 주먹질을 하며 몸으로 밀어붙이는 타잎의 본드가 아니었다. 코네리가 체격이 좋고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코네리의 본드는 필요한 순간에만 상대를 구둣발로 짓이기는 거칠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지 항상 그런 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007 제작진은 코네리의 거칠고 무자비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 이미지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본드팬들이 로저 무어의 본드에 실망했던 건 바퀴벌레를 밟아죽이듯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줄도 아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지 격투기 선수처럼 주먹질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고 불평한 게 아니다.
007 시리즈에서의 맨손격투 씬은 본드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했을 때 필사적이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밟고 위기를 빠져나오는 짧은 격투 씬이 한 두 차례 정도 나오면 충분하다. 프로레슬링처럼 과장되었거나 무용하듯 허우적대는 격투 씬은 제임스 본드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시도 때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팬시한 격투 동작을 연출한 티가 줄줄 흐르는 격투 씬으로 가득찼다. 격투 씬 뿐만 아니라 모든 액션 씬이 충돌과 폭발로 요란스럽기만 할 뿐 긴박감과 스타일이 부족했다. 여기저기서 충돌하고 부서지고 폭발하는 씬의 연속이었으므로 얼핏보기엔 화끈하고 격렬한 액션 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도록 포장한 게 전부였다. 소란스럽기만 했지 박력이 넘치고 긴장감이 흐르지 않았다. 눈과 귀를 바쁘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지만 느껴지는 게 없었다. 요샌 비슷비슷한 액션 씬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가 많아서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제임스 본드 영화의 거의 모든 액션 씬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007 스펙터'의 액션 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경비행기가 눈에 처박히고, 비밀기지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홀랑 날아가는 등 여전히 요란스럽긴 했지만 감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 '007 스펙터'에선 본드가 가젯을 사용하는 장면이 더러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할 만하다. 물론 007 시리즈를 한심하게 만들어온 주범 중 하나가 터무니 없는 가젯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지나칠 정도로 'GADGET FREE'를 의식한 흔적이 나타났다. 이 또한 그다지 보기에 좋지 않았다. 가젯을 빼고 보다 리얼한 액션으로 채우겠다는 것까지는 환영이었지만, 바보같은 가젯들이 너무 자주 나오는 것만 피하면 됐지 가젯을 모두 걷어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현재의 007 제작진이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센스가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해온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007 스펙터'에선 본드가 가젯을 사용해 위기를 빠져나오는 씬이 등장한다. 지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스카이폴'에도 가젯이 등장했지만, 이번 '007 스펙터'에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물론 이런 걸 놓고 "과거로의 회귀"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식당에 들어가서 김치가 싫다고 외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저런 액션 씬도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특징 중 하나이므로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과거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의 문제는 가젯이 차지한 비중이 지나치게 높았으며 터무니 없는 가젯들이 너무 많이 등장했다는 것이지 본드가 가젯을 사용했다는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007 제작진이 균형을 잡아주지 않아서 한 시대엔 가젯이 무더기로 등장하고 이어진 그 다음 시대엔 가젯이 거의 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 혼란이 심해졌을 뿐이지 가젯을 적당하게 등장시키는 건 문제될 게 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의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를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진지한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와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형적인 '본드카'가 만나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달튼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도 마찬가지다. '라이센스 투 킬'은 현재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가 표본으로 삼은 영화로 꼽을 수 있다. 본드가 M의 명령을 거부하고 살인면허가 취소된 상태로 개인적인 복수극을 벌인다는 색다른 플롯부터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와 겹친다. 그러나 '라이센스 투 킬'에도 Q가 여러 가젯을 들고 본드를 찾아가는 전통적인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씬을 집어넣는 걸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Q가 명언(?)도 남겼다:
"REMEMBER, IF IT HADN'T BEEN FOR Q BRANCH, YOU'D HAVE BEEN DEAD LONG AGO!" - Q
이런 씬이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덮어놓고 비판할 수 없다. 왜냐면, 007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아무리 색다른 걸 시도해보려 해도 007 시리즈는 007 시리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스타일 자체가 싫다면 다른 액션 영화를 찾아보는 게 정답이다.
가젯이 007 시리즈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미 40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40대 후반인 크레이그에게 10년 전 '카지노 로얄'에서 보여줬던 피지컬한 액션을 계속 요구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크레이그의 나이에 맞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만들려면 로저 무어가 했던 것처럼 격렬한 액션을 줄여나가고 가젯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이 '007 스펙터'에서 가젯의 비중을 약간 늘린 건 현명했다고 본다.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올 것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듯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중년 제임스 본드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레이그는 '카지노 로얄'에서 젊고 거칠고 진지한 이미지를 앞세워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 시대 제임스 본드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여기까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의 가장 큰 문제는 클래식 007 시리즈에서 지나치게 멀어지려 했다는 점이다.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정도만 느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007 제작진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를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화를 주려고 했다.
'제임스 본드 비긴스' 격이던 '카지노 로얄'까지는 문제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카지노 로얄'과 줄거리가 바로 이어지는 속편인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는 200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유니버설의 제이슨 본(Jason Bourne) 트릴로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티가 났고, 크레이그의 세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스카이폴(Skyfall)'은 줄거리는 전편과 이어지지 않았으나 엉뚱하게도 워너 브러더스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트릴로지를 노골적으로 모방한 '수퍼히어로 워너비' 영화였다. 이 바람에 '콴텀 오브 솔래스'의 제임스 본드는 '제이슨 본 워너비'처럼 보였고, '스카이폴'에선 '배트맨 워너비'처럼 보였다.
'제임스 본드 비긴스' 성격의 영화는 '카지노 로얄' 하나로 끝내고 그 이후부턴 정상적인 007 시리즈로 되돌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바닥난 007 제작진은 프리퀄 세계에서 벗어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을 우려해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 007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에서 선보인 새로운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 이미지가 퇴색되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든 클래식 007 시리즈의 본드와 반대로 가는 게 살 길"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파격적인 변화를 통한 충격요법으로 시선을 끄는 쪽을 택한 듯 했다.
문제는, 클래식 제임스 본드와 거리 두기가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를 '제임스 본드 비긴스' 프리퀄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완성 버전 제임스 본드에 묶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이런 까닭에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는 우리가 알고 있던 클래식 제임스 본드가 되기까지의 과정만 보여주다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를 보여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제임스 본드 비긴스'에서 맴돌다 끝날 것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 영화를 기대하던 본드팬들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냐", "언제까지 본드의 과거 이야기에 머물 것이냐"는 불만이 쏟아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스펙터'에서도 이런 한심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또 봐야 하는 것일까?
이번에 개봉한 '007 스펙터'에선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
◆캐릭터
'007 스펙터'의 프리-타이틀 씬에서 본드가 멕시코 시티의 건물 지붕을 뛰어다니는 씬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가 또 돌아왔구나" 하는 게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본드가 뛰어다니는 운동량 하나 만큼은 변함없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007 스펙터'의 제임스 본드는 지난 '스카이폴' 버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영화의 분위기부터 약간 차이가 났고, 지난 번 영화보다 좀 더 클래식 007 시리즈 쪽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지난 '스카이폴'에선 거의 항상 굳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폼을 잡았으나 이번 '007 스펙터'에선 전편보다 부드럽고 여유감이 느껴지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다. 어색할 정도로 항상 딱딱하게 폼잡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달은 듯 했다. 유머 파트는 조금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난 번처럼 항상 굳고 긴장된 모습만 보여주던 데서 벗어나 종종 미소도 보일 줄 아는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이는 제임스 본드로 변화를 준 것은 나쁘지 않았다. 터프가이 캐릭터를 억지로 연기하는 듯한 어색함이 덜했다.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터프가이 캐릭터를 부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보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제임스 본드 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보는 사람도 편하다.
또한, 항상 다른 영화 시리즈의 캐릭터를 흉내내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보려던 '실험용 제임스 본드'에서 벗어나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이는 제임스 본드' 쪽으로 약간 이동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이름만 제임스 본드일 뿐 실제 제임스 본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도 클래식 007 시리즈와 과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치게 색다른 시도를 한 결과였는데, 이번 '007 스펙터'에선 이런 문제도 어느 정도 바로잡아 보려 한 것 같았다.
크레이그는 '007 스펙터'에서 클래식 제임스 본드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카지노 로얄'은 초보 007,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제이슨 본 짝퉁, '스카이폴'은 배트맨 짝퉁이었다면, '007 스펙터'에선 처음으로 제임스 본드다운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연기했다. '007 스펙터' 영화 자체는 전작과 줄거리가 이어지는 프리퀄 시리즈의 일부였지만, 제임스 본드 캐릭터 만큼은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들어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제임스 본드에 가까운 캐릭터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다만, '007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를 "어쌔신"으로 묘사한 건 문제가 있다. 제임스 본드가 살인면허(Licence to Kill)를 소지한 것은 맞지만, 본드의 직업이 살인인 건 아니다. 살인은 본드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 부분일 뿐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살인면허를 소지한 제임스 본드는 법의 영역 밖에서 활동하는 가공의 비밀요원 정도가 보다 정확하지 "어쌔신"은 아니다. "어쌔신"이라고 하면 좀 더 쿨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제임스 본드가 "어쌔신"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본드가 핸드건을 휴대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누군가를 사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방어용으로 핸드건을 소지하는 것이지 공격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의 핸드건으로 유명한 월터PPK도 호신용 컴팩트 사이즈 핸드건 쪽에 가깝다.
◆헤어스타일
지난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머리가 너무 짧았다. 지난 2005년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발탁되자 마자 불거졌던 "블론드 본드 논란"을 의식한 나머지 최대한 블론드란 사실을 가려보기 위해 머리를 짧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젊고 거칠어 보이기 위해 머리를 짧게 했을 수도 있지만, 제임스 본드는 원작소설에서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올바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007 스펙터'에선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엔 지난 '스카이폴' 때보다 머리가 길어졌다. 크레이그의 '007 스펙터' 헤어스타일은 과거의 제임스 본드에 비하면 여전히 짧은 편이었지만 지난 '스카이폴'에서처럼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짧진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지난 '스카이폴'의 까까머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약간이나마 길어진 것은 맘에 들었다.
지나치게 짧은 머리는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아니다.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면 '힛맨(Hitman)' 시리즈로 옮겨가야 한다.
◆근육
'카지노 로얄', '콴텀 오브 솔래스', '스카이폴' 등 지금까지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제임스 본드 영화 모두 크레이그가 근육을 키운 상반신을 드러내는 씬이 있었다. 거칠고 우람한 터프가이 캐릭터처럼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크레이그는 근육질 마초가이에 어울리는 타잎이 아니다",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도 근육질 마초가이 타잎이 아니다"는 지적을 받았다. 크레이그에게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고 원작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도 근육질이 아닌데 굳이 눈에 띄게 근육을 키운 몸을 만들 이유가 있냐는 것이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근육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 이유 역시 지난 2005년 불거졌던 "다니엘 크레이그 키 논란"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크레이그의 키가 5피트 10인치라서 역대 제임스 본드 중 키가 6피트가 채 되지 않는 최단신 제임스 본드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체격이 좋고 피지컬한 제임스 본드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남자 배우들이 근육을 키우고 나와서 여성, 게이 관객들을 상대로 '스트립쇼'를 하는 게 헐리우드 유행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제임스 본드도 이를 따라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성용 판타지 영화인 007 시리즈까지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007 제작진이 유행을 따라하는 데 환장한 듯 했으므로 이 또한 그 일환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007 스펙터'에도 다니엘 크레이그가 웃통을 벗고 등장하는 씬이 나올까?
나오긴 나온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왜냐면, 다름아닌 주제곡이 흐르는 메인 타이틀 씬에만 나오기 때문이다.
주제곡이 흐르는 007 시리즈 메인 타이틀 씬은 전통적으로 여성 누드 댄서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양보할 준비가 돼있다.
크레이그의 '노출씬'은 메인 타이틀 하나가 전부였다. 메인 타이틀 씬을 제외한 다른 파트에선 웃통을 벗은 크레이그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러브씬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 서로 키스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였으며, 007 시리즈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왔던 베드씬도 없었다. 지난 '스카이폴'에선 크레이그가 웃통을 벗은 모습이 몇 차례 나왔으나 이번 '007 스펙터'에선 주제곡이 흐르는 메인 타이틀 씬을 제외하곤 일체 나오지 않았다.
거의 모든 007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진부한 러브씬/베드씬을 걷어내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쓸데 없는 '스트립쇼' 씬도 없애버린 제작진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다음 번 영화부턴 제임스 본드의 누드씬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그 대신 과거의 엑스트라 본드걸들을 되돌려놓기 바란다. 호텔 풀장에서 알록달록한 비키니 차림으로 떼지어 몰려다니는 본드걸들을 되돌려달란 말이다. 007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남성용 판타지 영화이므로 스트레이트 남성들의 입맛에 맞는 눈요깃 거리를 곳곳에 배치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물론 일부 리버럴 성향 언론으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에 소심하게 신경쓰는 건 제임스 본드답지 않다. 007 시리즈가 원작소설부터 영화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남성용 판타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큼 크게 눈치볼 필요가 없다. 여성 취향에 맞춘 여성용 영화들도 제작되는데 007 시리즈를 남성 취향에 맞춘 영화로 만드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지난 90년대부터 'POLITICAL CORRECTNESS'의 여파로 엑스트라 본드걸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007 시리즈가 남성용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만큼 지나치게 몸을 사리며 눈치볼 필요가 있나 싶다.
◆액션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 제임스 본드는 몸으로 때우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해졌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몸으로 때우는 이미지가 강한 본드로 굳은 이유는 007 제작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과거 제임스 본드에 대한 비교와 비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본드팬들은 숀 코네리(Sean Connery)의 본드와 로저 무어(Roger Moore)의 본드를 비교하면서 "숀 코네리는 거칠고 격렬한 액션에 능했으나 로저 무어는 싱글거리며 농담만 하다 끝났다"고 했다. 여기까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걸 빠뜨렸다. 코네리는 거친 액션 씬이 "필요할 때" 효과적이었다는 점이다. 코네리의 본드는 시도 때도 없이 주먹질을 하며 몸으로 밀어붙이는 타잎의 본드가 아니었다. 코네리가 체격이 좋고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코네리의 본드는 필요한 순간에만 상대를 구둣발로 짓이기는 거칠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지 항상 그런 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007 제작진은 코네리의 거칠고 무자비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원작소설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 이미지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본드팬들이 로저 무어의 본드에 실망했던 건 바퀴벌레를 밟아죽이듯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줄도 아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지 격투기 선수처럼 주먹질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고 불평한 게 아니다.
007 시리즈에서의 맨손격투 씬은 본드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했을 때 필사적이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밟고 위기를 빠져나오는 짧은 격투 씬이 한 두 차례 정도 나오면 충분하다. 프로레슬링처럼 과장되었거나 무용하듯 허우적대는 격투 씬은 제임스 본드와 어울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007 스펙터'의 액션 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경비행기가 눈에 처박히고, 비밀기지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홀랑 날아가는 등 여전히 요란스럽긴 했지만 감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 '007 스펙터'에선 본드가 가젯을 사용하는 장면이 더러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할 만하다. 물론 007 시리즈를 한심하게 만들어온 주범 중 하나가 터무니 없는 가젯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지나칠 정도로 'GADGET FREE'를 의식한 흔적이 나타났다. 이 또한 그다지 보기에 좋지 않았다. 가젯을 빼고 보다 리얼한 액션으로 채우겠다는 것까지는 환영이었지만, 바보같은 가젯들이 너무 자주 나오는 것만 피하면 됐지 가젯을 모두 걷어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현재의 007 제작진이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센스가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해온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007 스펙터'에선 본드가 가젯을 사용해 위기를 빠져나오는 씬이 등장한다. 지난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들어선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스카이폴'에도 가젯이 등장했지만, 이번 '007 스펙터'에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물론 이런 걸 놓고 "과거로의 회귀"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식당에 들어가서 김치가 싫다고 외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저런 액션 씬도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특징 중 하나이므로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과거 로저 무어와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의 문제는 가젯이 차지한 비중이 지나치게 높았으며 터무니 없는 가젯들이 너무 많이 등장했다는 것이지 본드가 가젯을 사용했다는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007 제작진이 균형을 잡아주지 않아서 한 시대엔 가젯이 무더기로 등장하고 이어진 그 다음 시대엔 가젯이 거의 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 혼란이 심해졌을 뿐이지 가젯을 적당하게 등장시키는 건 문제될 게 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의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를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진지한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와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형적인 '본드카'가 만나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달튼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도 마찬가지다. '라이센스 투 킬'은 현재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 007 시리즈가 표본으로 삼은 영화로 꼽을 수 있다. 본드가 M의 명령을 거부하고 살인면허가 취소된 상태로 개인적인 복수극을 벌인다는 색다른 플롯부터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와 겹친다. 그러나 '라이센스 투 킬'에도 Q가 여러 가젯을 들고 본드를 찾아가는 전통적인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씬을 집어넣는 걸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Q가 명언(?)도 남겼다:
"REMEMBER, IF IT HADN'T BEEN FOR Q BRANCH, YOU'D HAVE BEEN DEAD LONG AGO!" - Q
이런 씬이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덮어놓고 비판할 수 없다. 왜냐면, 007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아무리 색다른 걸 시도해보려 해도 007 시리즈는 007 시리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007 시리즈의 전통적인 스타일 자체가 싫다면 다른 액션 영화를 찾아보는 게 정답이다.
가젯이 007 시리즈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미 40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40대 후반인 크레이그에게 10년 전 '카지노 로얄'에서 보여줬던 피지컬한 액션을 계속 요구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크레이그의 나이에 맞는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만들려면 로저 무어가 했던 것처럼 격렬한 액션을 줄여나가고 가젯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이 '007 스펙터'에서 가젯의 비중을 약간 늘린 건 현명했다고 본다. 크레이그가 '본드25'로 돌아올 것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듯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의 중년 제임스 본드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 번 영화부턴 제임스 본드의 누드씬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그 대신 과거의 엑스트라 본드걸들을 되돌려놓기 바란다. 호텔 풀장에서 알록달록한 비키니 차림으로 떼지어 몰려다니는 본드걸들을 되돌려달란 말이다.
답글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한국 구식 아저씨들은 답이 없다는걸 다시한번 느끼고 갑니다. ^^
신식만 좋아하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을 안 하는군요...^^
삭제위엣분 께서는 빅토리아시크릿 쇼나 기타 노출많은 장면들 보면서 환호성 지르고 19금 문장들을 발사하며 발광하는 미국+유럽대륙 남자들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삭제그런 서양 스트레이트-남성은 타도 대상이죠...^^
삭제요샌 평등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여성 판타지는 괜찮아도 남성 판타지는 없어져야 합니다...ㅋ
한국에서는 007 스펙터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네요 한물간 클래식 007 재현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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