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8일 화요일

'007 스펙터' - TV 광고된 자동차 추격 씬 다시 재밌게 만들 방법은?

007 시리즈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멋진 액션 스턴트 씬으로 유명하다. 007 시리즈는 격렬하고 요란스러운 액션 씬으로 소문난 영화 시리즈는 아니지만,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와 스타일이 가득한 액션 스턴트 씬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007 시리즈가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들과 비슷해지면서 007 시리즈만의 특징을 많이 상실함과 동시에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들도 007 시리즈를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결과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에 와선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 자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면서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 등 007 시리즈가 아닌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가 연상된 적은 있어도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액션과 스턴트가 전부였지 특별하게 눈에 띄는 씬이 없었다.

최근에 개봉한 '007 스펙터(SPECTRE)'에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액션 씬이었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프리-타이틀 씬부터 때려부수고 무너지는 등 요란스러웠지만,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들이었지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란 생각이 드는 씬은 거의 없었다. 요란스러운 장관을 연출하려 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지 않았으며, 스릴과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실망스러웠던 액션 씬 중 하나는 로마 카 체이스 씬이다.


아스톤 마틴 DB10과 재규어 C-X75 등 2대의 컨셉카가 등장하는 추격 씬을 구상했다는 데서부터 잘못되었다. 007 시리즈엔 스포츠카끼리 경주를 벌이는 '니드 포 스피드(Need for Speed)', '패스트 앤 퓨리어스(Fast and Furious)' 스타일 체이스 씬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007 시리즈는 요란한 컨셉카들이 스트릿 레이싱을 벌이는 컬쳐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007 시리즈에 아스톤 마틴이 등장하는 이유는 본드의 럭져리한 라이프스타일을 묘사하기 위함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컨셉카 vs 컨셉카' 스트릿 레이싱으로 눈길을 끌려 했다면 상당히 잘못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007 시리즈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카 체이스 씬이 스릴넘쳤던 것도 아니다. 2대의 컨셉카가 로마 밤거리를 누비는 '007 스펙터'의 카 체이스 씬은 자동차 TV 광고 수준이었다. 분위기를 망치는 토마스 뉴맨(Thomas Newman)의 배경음악도 한몫 했지만, '007 스펙터'의 카 체이스 씬은 볼거리 없는 맹탕이었다. 그저 2대의 좋은 자동차가 로마의 밤거리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체이스 씬에 사용된 2대의 자동차가 최대 볼거리였지 체이스 씬 자체는 볼 게 없었다. 멋진 자동차나 구경하라는 소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체이스 씬 도중 클래식 007 시리즈 스타일의 가젯을 선보인 것은 눈에 띄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단조로운 체이스 씬을 익사이팅하게 바꿔놓을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동차 체이스 씬이 007 시리즈에 어울릴까?

007 시리즈 카 체이스 씬은 1)'특수 본드카'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스타일과 2)평범하거나 초라해보이는 자동차가 등장하는 위태로운 스타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수 본드카'란 Q 브랜치가 여러 다양한 무기와 기능을 탑재시킨 '본드카'를 의미한다. '골드핑거(Goldfinger)'의 아스톤 마틴 DB5,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의 로터스 에스프리(Lotus Esprit)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Q 브랜치에서 제공한 '특수 본드카'는 아스톤 마틴, 로터스, BMW 등 럭져리 브랜드 자동차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위태로운 스타일의 카 체이스 씬에 등장한 자동차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하지 않은 자동차가 사용되었다. 이런 자동차들은 본드가 급하게 아무 자동차나 집어타고 도주하는 카 체이스 씬에 주로 등장했다. 이런 카 체이스 씬은 로저 무어(Roger Moore) 주연의 80년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와선 카 체이스 씬이 이상해졌다.

가장 큰 문제점은 카 체이스 씬이 격렬해지기만 했을 뿐 아기자기한 재미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007 시리즈는 격렬한 액션영화가 아니다. 익사이팅한 액션 씬도 멋과 스타일이 우선이지 격렬함은 나중이다. 격렬한 카 체이스 씬은 서로 들이받고 뒤집히면서 법석을 떠는 게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요란함을 제외하고 나면 볼 게 없다. 스턴트와 체이스가 재밌고 아기자기하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들이받고 뒤집어지다가 끝나는 게 전부다. 처음 한 두 번은 격렬한 카 체이스 씬이 멋지게 보이지만, 이젠 자동차들이 굉음과 함께 충돌하고 카메라가 흔들리는 체이스 씬은 흔한 클리셰가 됐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의 카 체이스 씬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카 체이스 씬에 등장하는 자동차가 고급 모델이라는 점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엔 아스톤 마틴 DBS가 등장했고, '007 스펙터'엔 아스톤 마틴 DB10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아스톤 마틴이 체이스 씬에 등장하면 스릴이 반감한다는 점이다. 럭져리 수퍼카를 운전하는 본드가 위태롭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가 럭져리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모습에 익숙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카 체이스 씬에 럭져리 스포츠카가 등장하면 색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007 시리즈에 거의 항상 등장하는 '럭져리 스포츠카'와 '카 체이스 씬'이 한 자리에 모인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카 체이스 씬에 본드가 작고 초라하고 허르스름한 자동차를 몰고 등장하면 느낌이 달라진다. 항상 고급 자동차를 몰던 본드가 평범한 자동차를 몰고 나타났다는 점부터 눈에 띌 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작고 초라하고 허르스름하다는 데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80년대 로저 무어 시절 영화에서 007 제작진이 이런 점을 잘 활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엔 카 체이스 씬에 아스톤 마틴을 계속 사용하면서 색다를 것도 없고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 밋밋한 체이스 씬을 선보이는 데 그쳤다.

결론적으로,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등장한 카 체이스 씬은 1)도 아니고 2)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007 스펙터'의 카 체이스 씬을 맡았다면?

아마도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과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의 카 체이스 씬을 참고했을 것이다.

1969년작 '여왕폐하의 007'엔 본드(조지 레이전비)와 트레이시(다이애나 리그)가 평범한 머큐리 쿠거(Mercury Cougar)를 타고 추격해오는 스펙터 일당을 피해 도주하는 카 체이스 씬이 나온다.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엔 본드(로저 무어)와 멜리나(캐롤 부케)가 씨트로엥 2CV(Citroen 2CV)를 타고 추격해오는 로크 일당을 피해 도주하는 카 체이스 씬이 있다.

두 카 체이스 씬의 대표적인 공통점은 특수 장치로 무장한 '본드카'도 아니고 럭져리 스포츠카도 아닌 평범한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저런 카 체이스 씬이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에 잘 어울리는 이유는 리얼하고 위태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과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의 'VULNERABILITY'를 자주 언급했지만, 지금까지 본드가 처한 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주지 못했다. 본드가 처한 상황은 대부분 거칠고 격렬했을 뿐 위험이 제대로 느껴진 적이 없다.

따라서 만약 내게 '007 스펙터' 카 체이스 씬을 맡겼다면 본드가 성능이 과히 좋아 보이지 않는 작고 평범한 자동차를 타고 위태롭게 도주하는 카 체이스 씬을 넣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드가 운전할 자동차로는 무엇이 좋을까?

'007 스펙터'의 로마 카 체이스 씬에 피아트(Fiat) 500가 등장했다. 피아트 500는 본드와 미스터 힝스(데이브 바티스타)의 자동차 추격전 사이에 끼어 수난을 당하는 역할로 잠깐 나왔다.

바로 이 차를 본드가 몰도록 하는 것이다.


본드가 피아트 500를 운전하면 스타일이 구겨지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위태롭게 보이는 추격전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저런 차를 골랐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제임스 본드라고 언제나 럭져리 스포츠카만 몰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Q 브랜치로부터 제공받은 자동차일 순 없다. 파괴된 본부 건물을 수리하지도 못하는 팔자면서도 00 에이전트에겐 아스톤 마틴을 제공하는 게 007 시리즈 세계의 MI6이므로, Q 브랜치가 피아트 500를 00 에이전트에게 제공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본드가 남의 피아트를 빌려(?) 타는 걸로 설정하면 된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떨까?

1) 스펙터 회의 장소에서 탈출한 본드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달린다. 

2) 본드의 뒤를 스펙터 요원들이 총을 쏘며 추격한다. 

3) 골목에서 본드가 길가에 주차한 피아트 500와 4명의 늘씬한 미녀들을 발견한다. 

4) 본드가 4명의 이탈리안 미녀들에게 "차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5) 그러자 미녀 중 하나가 차 열쇠를 본드의 코앞에 주저없이 들이민다. 

6) 열쇠를 넘겨받은 본드는 "고맙다"고 인사한 뒤 피아트 500를 몰고 도망간다. 

7) 4명의 이탈리안 미녀들은 사라지는 본드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 

8) 본드가 피아트를 몰고 도주하는 걸 본 스펙터 요원들이 알파 로메오를 타고 추격에 나선다. 

9) 4명의 미녀들이 스펙터 요원들이 탄 알파 로메오를 향해 일제히 하이힐을 벗어 집어던진다. 

그 다음부터는 추격전이다. 작은 피아트가 뒤뚱거리고 뒹구르기도 하면서 추격해오는 스펙터 일당을 따돌리는 코믹하면서도 위태롭게 보이는 카 체이스 씬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면 유머, 엑스트라 본드걸, 자동차 추격 씬 등을 한 번에 해결 가능하다.

007 시리즈 액션 담당은 이런 씬을 아기자기하게 잘 연출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격렬하고 시끄러운 것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시시한 액션 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파라마운트의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Mission Impossible: Rogue Nation)'의 자동차 추격 씬 + 모터싸이클 추격 씬이 '007 스펙터'의 추격 씬보다 훨씬 코믹하고 익사이팅하고 재밌었던 만큼 007 제작진이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감독과 유명한 영화배우를 불러들이고 지나칠 정도로 높은 제작비용을 뿌린다고 재밌는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007 제작진이 모자라진 않다고 본다. 

댓글 2개 :

  1. 007영화 액션이 다른영화와 차별성이 없어진 거에 동의합니다.
    80년대 까지만해도 007영화 액션씬은 넘사벽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당시엔 왜 다른영화는 007의 발끝도 못따라갔을까 의문을 가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007영화 액션이 퇴보했다기 보단 다른 영화의 액션씬이 발달했다고 봅니다.
    액션의 평준화가 됀거죠. 태권도가 예전엔 한국의 메달밭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듯이..
    80년대 까지만 해도 한해 흥행영화 상위권엔 꼭 07영화가 있었습니다. 1등 한 해도 많았죠.
    하지만 요즘은 뭐..
    킹스맨이 600만, 스카이폴, 스펙터가 200만!
    킹스맨이 007영화를 보고 따라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수 차이가 크죠.
    킹스맨 영화 대사에도 나옵니다. 본드를 좋아하느냐? 요즘 영화는 쓸대없이 넘 신중하다!
    맞아요. 영화 대사처럼 요즘 본드영화는 지나치게 신중한 척합니다.
    제작진들도 흥행부진 이유를 파악하고 다음 영화는 색깔을 달리 해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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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생각엔 007 시리즈와 쟝르, 스타일 상 중복되는 영화가 늘어난 게 원인 같습니다.
      수퍼히어로와 스파이 액션 쟝르, 패스트 앤 퓨리어스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죠.
      이런 상황에 007 시리즈는 독창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비슷한 경쟁작들과 섞여버렸죠. 저는 차별성이 없어진 큰 이유가 이것이라고 봅니다.
      같은 액션 씬도 007 시리즈에선 약간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요샌 이게 없습니다.
      클래식 007 시리즈완 차이가 나지만 요새 개봉하는 비슷한 경쟁작과는 차이가 없죠.
      제작진이 과거 007 시리즈와의 차별화만 생각할 뿐 경쟁작은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이를 단지 유행을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순 없는 것 같습니다.
      유행도 좋지만 007 시리즈만의 특징이 사라지면 아무 소용이 없죠.
      과거엔 한가닥했으나 지금은 비슷비슷한 영화 중 하나로 인식되는 건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특징이 없고 정체성까지 불확실한 정도가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제작진이 좀 더 머리를 굴리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신중함'에 대해 크레이그는 어스틴 파워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한 바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낭만과 유머를 모두 걷어낼 필요는 없었죠.
      낭만과 유머를 보태라는 게 어스틴 파워처럼 만들라는 소리도 아니고 말입니다.
      최근 들어 본드 영화가 쓸데없이 신중한 척 하는 것도 유행 때문인 듯 합니다.
      샘 멘데스가 얼마 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배우가 교체되면 색깔이 또 바뀌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클래식 007 시리즈와의 차별화를 내걸고 시작한 크레이그 시대엔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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