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007 스펙터' - 눈 구경이 전부였던 설원 씬 다시 재밌게 만들 방법은?

007 시리즈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멋진 액션 스턴트 씬으로 유명하다. 007 시리즈는 격렬하고 요란스러운 액션 씬으로 소문난 영화 시리즈는 아니지만,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와 스타일이 가득한 액션 스턴트 씬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007 시리즈가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들과 비슷해지면서 007 시리즈만의 특징을 많이 상실함과 동시에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들도 007 시리즈를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결과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시대에 와선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 자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면서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시리즈 등 007 시리즈가 아닌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가 연상된 적은 있어도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액션과 스턴트가 전부였지 특별하게 눈에 띄는 씬이 없었다.

최근에 개봉한 '007 스펙터(SPECTRE)'에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액션 씬이었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프리-타이틀 씬부터 때려부수고 무너지는 등 요란스러웠지만, 다른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들이었지 '007 시리즈에서만 볼 수 있는 액션 씬'이란 생각이 드는 씬은 거의 없었다. 요란스러운 장관을 연출하려 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지 않았으며, 스릴과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007 스펙터'에서 실망스러웠던 액션 씬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 설원 씬이다.


그렇다. 미스터 본드가 아주 오랜만에 스키장으로 향했다. 007 시리즈가 멋진 스키 체이스 씬으로 유명한 만큼 스키 스턴트 씬이 오랜만에 007 시리즈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본드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007 스펙터'엔 스키 씬이 나오지 않았다. 눈덮힌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멋진 경치까진 나왔으나 가장 중요한 스키 스턴트가 빠졌다. 스키 스턴트를 뺀 대신 007 제작진은 경비행기와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동원된 추격 씬을 넣었다. 스펙터 일당이 매들린(레아 세두)을 납치해 자동차 편으로 도주하자 본드가 경비행기를 몰고 그들을 뒤쫓는 씬이다.

그러나 눈에 띈 것이라곤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뿐 액션 자체는 볼거리가 없었다.

눈덮힌 산 정상의 건물은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좁은 길과 경비행기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 납치된 본드걸이 뒤따라오는 본드를 뒤돌아보는 씬은 '골든아이(GoldenEye)', 경비행기 날개 절단은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벽을 뚫고 돌진하는 건 '골든아이(GoldenEye)'의 탱크 씬, 양 날개가 절단된 경비행기가 눈에 처박히는 씬은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에서 아스톤 마틴 볼란테가 눈에 처박히는 씬, 날개가 절단되어 눈 위를 썰매처럼 미끄러지는 경비행기를 본드가 콘트롤하기 위해 애쓰는 씬은 '여왕폐하의 007(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밥슬레이 씬 등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 투성이였다. 멋진 설원 씬을 찍기 위해 오스트리아 알프스로 향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 007 시리즈 오마쥬를 풍부하게 넣는 것이 본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날개가 절단된 경비행기가 도주하는 자동차들과 추격전을 벌인다"고 하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007 스펙터'의 설원 씬은 '아드레날린'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릴이나 박진감, 익사이팅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클래식 007 시리즈의 오마쥬만 계속 눈에 들어왔을 뿐 액션과 스턴트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케일은 컸으나 거창하기만 했을 뿐 볼 게 없었다.

경비행기를 동원한 아이디어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느닷없이 경비행기가 등장한 것까진 좋았으나 쓸모가 없었다. 속도감을 느낄 수 없었고 스릴과 서스펜스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요란스럽게 경비행기를 동원한 게 전부로 보였다. 경비행기가 동원된 '007 스펙터'의 설원 추격 씬은 느닷없이 경비행기가 등장하며 시작하더니 자동차와 경비행기가 서로 뒤엉켜서 충돌하면서 허무하게 얼렁뚱땅 끝나버렸다.

날개가 절단된 경비행기가 건물을 뚫고 날아가는 씬도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골든아이'에서 러시아 군에게 쫓기던 본드가 군부대 내에 있는 탱크를 발견하더니 탱크를 볼고 벽을 뚫고 길거리로 튀어나오는 씬은 유머와 스릴을 모두 갖춘 훌륭한 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007 스펙터'의 경비행기 건물 관통 씬은 유머와 스릴이 모두 느껴지지 않은 짜임새가 엉성한 액션 시퀀스였다. '골든아이'의 탱크 씬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꼽히지만, '007 스펙터'의 경비행기 씬은 하이라이트 레벨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슷하기만 했을 뿐 맹탕이었다.

이렇다 보니 '007 스펙터'의 설원 씬을 보면서 '오랜만에 눈덮힌 산에 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007 스펙터'의 설원 씬을 어떻게 바꿨더라면 더 재밌었을까?

스펙터 일당이 본드걸을 납치해 차에 태우고 도주하는 걸 본드가 추적한다는 설정까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오스트리아 설원 씬에 아스톤 마틴 DB10이 등장했다면 더욱 익사이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1987년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와 많이 비슷해졌겠지만, 설원에서 펼쳐지는 익사이팅한 카 체이스 씬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본드가 스키를 타고 자동차를 추격하고, 본드의 뒤를 스키를 탄 또다른 스펙터 일당이 추격하도록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007 시리즈 액션 씬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씬 중 하나가 스키 체이스 씬일 정도로 스키 씬과 007 시리즈가 밀접한 관계이므로 오랜만에 눈덮힌 오스트리아 알프스까지 갔다면 어떻게든 스키 씬이 들어갔어야 옳다고 본다.

만약 '007 스펙터' 설원 씬에 아래의 동영상에 나오는 스키 체이스 씬이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너무 팬시해 보이는 공중 곡예는 곤란해도 나머지는 007 시리즈와 딱 어울려 보인다. 실제로, 1981년 제임스 본드 영화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의 스키 체이스 씬과 비슷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왜 정작 007 시리즈에선 이처럼 눈썹 날리는 익사이팅한 프리스타일 스키 스턴트 씬을 볼 수 없는 걸까?


미국 CBS의 뉴스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에 출연한 또다른 스키 선수, JT 홈즈(Holmes)는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Anderson Cooper: You're standing there on the top of the mountain, what goes through your mind?

JT Holmes: There's two mindsets, you know? There's the Evel Knievel, which is kinda kamikaze, and, "Who knows how it's gonna work out?" and, "Will you hit the landing ramp or not?" And then there's the James Bond. And Bond is composed and dialed. And he uses clever pieces of gear which he developed with Q to, you know, outwit his opponents and pull off tremendous things. And--

Anderson Cooper: Which one are you?

JT Holmes: I'm Bond.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홈즈가 1977년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의 프리-타이틀 씬에 나왔던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씬을 연상케 하는 스턴트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스키 점프 씬은 007 시리즈 베테랑 스턴트맨, 릭 실베스터(Rick Sylvester)가 캐나다의 아스가드산(Mount Asgard)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다. 물론 이 씬은 가장 유명한 007 시리즈 스턴트 씬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스키는 007 시리즈 스턴트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엔 눈썹이 날리는 익사이팅한 스키 스턴트를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007 스펙터'는 오스트리아 알프스까지 갔으면서도 스키 씬을 뺐다. 오랜만에 알프스까지 갔는데도 스키 체이스 씬을 영화에 넣지 않은 건 실수였다고 본다. 스키 체이스 씬 없이도 설원 액션 씬이 익사이팅했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오스트리아 체이스 씬이 실망스러웠던 액션 씬 중 하나이다 보니 '차라리 경비행기를 빼고 스키 씬을 넣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동계 올림픽에서 가장 익사이팅한 종목 중에 스키/스노우보드 크로스와 슬롭스타일(Slopestyle)이 있다. 이런 종목 선수들에게 007 시리즈 스턴트를 맡기면 아주 익사이팅한 씬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요즘엔 선수들이 헬멧 등에 부착 가능한 소형 액션 캠이 많으므로 아찔한 스턴트와 눈썹 날리는 스피드를 박진감 넘치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007 시리즈 액션 씬이 익스트림 스포츠에 올인한 듯한 느낌을 줄 정도가 되면 곤란하겠지만, 프리스타일 스키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진부한 폭발과 충돌 씬 없이 익사이팅한 액션 씬을 연출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007 제작진에겐 프리스타일 스키가 좋은 해결 방법이 될 것이다.

배경음악도 중요하다. 프리스타일 스키 스턴트 씬에 피겨 스케이팅 배경음악을 틀어놓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이빗 아놀드(David Arnold)가 007 시리즈 스코어를 맡았던 지난 90년대와 2000년대 초엔 빅 비트/브레이크 비트 스타일 곡이 설원 체이스 씬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나, 박력이 없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씬 자체도 재미가 별로 없었지만 배경음악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드럼 앤 베이스 스타일은 어떨까?


물론 체이스 씬 배경음악으로 드럼 앤 베이스를 사용하는 것도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단 겨울철 용품 TV 광고처럼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테마(James Bond Theme)' 또는 '007'을 드럼 앤 베이스 스타일로 리믹스해서 스키 체이스 씬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댓글 4개 :

  1. 설원을 배경으로 해서 스키신이 들어갔으면 합니다만, 전 스키신도 좋았지만..

    말씀하신대로 리빙데이라이트에서의 장면도 괜찮았었습니다.

    전 리빙데이라이트에서 설원에서의 자동차 씬보다 자동차를 폭파시킨 후
    마지막에 국경선을 지나면서 첼로(였던가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통을 타고 질주하는거도 괜찮았고, 타이밍 맞춰서 첼로들 위로 던졌다가 다시 잡으면서 첼로외 짐은 없다고 조금은 위트 있게 국경선을 지나가는 장면도 괜찮았던거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007의 액션장면은 치열하게 싸움이 일어나면서도 마지막에 본드가 우위를 점하거나 상대방을 죽이거나, 위기에서 탈출할 때 조금은 능굴맞으면서도 위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이번 스펙터에서는 그냥 다른 블록버스터 처럼 거대한 폭파라든지 그런것만 있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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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첼로 케이스 타고 도망가는 씬 저도 좋아하는 씬 중 하나입니다.
      근데 동계스포츠 썰매종목 선수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더군요...^^
      하지만 007 시리즈에 항상 가능한 것만 나온 건 아니므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스릴과 유머, 볼거리 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요샌 다른 액션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거칠고 격렬한 씬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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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기 이건 저 혼자만 이렇게 느낀거 같아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스펙터에서 히로인이 잡힌 상태에서 007이 예전 m16건물에 들어갔을때..
    전 그 장면에서 황금총을가진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더라구요..^^

    건물안에서 마지막보스와 결판이 날줄알았는데...

    헬기를 타고 도망가고 보트로 추격하는 장면에서 너무 식상해서 실망스럽더군요..

    스펙터라는 조직을 이용하는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반드시 본드가 스펙터의 보스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처구니 없게 체포라니요?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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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파트도 오마쥬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만 좀 억지스럽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새 타겟 그림까지 갈아끼워놓고...^^
      마지막 헬기+보트 추격 씬도 오마쥬 중 하나죠. 이런 게 본 목적이 아니었나 합니다.

      사실 스크립트 초안에선 본드가 보스의 머리에 총을 쏴서 죽입니다.
      그런데 영화사 경연진들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수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펙터 조직을 이용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스펙터가 크레이그의 마지막 영화일 수는 있어도 스펙터 조직의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영화배우가 교체된 이후에도 스펙터 조직은 007 시리즈에 계속 등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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