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12일 토요일

'어톤먼트' 또다른 진부한 러브스토리

2차대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1935년 영국.

두 자매가 있다.

언니 쎄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는 성인이고 동생 브라이오니는 13세 소녀다.

그런데, 두 자매가 한 남자를 좋아한다. 가정부의 아들 로비(제임스 매커보이)다.

하지만, 로비는 서로 나이가 맞는 쎄실리아와 어울릴 뿐이다.

당연히 브라이오니는 열받을 수밖에!

쎄실리아와 로비의 사이에 질투를 느낀 철없는 13세 소녀 브라이오니는 엄청난 거짓말로 로비를 궁지에 빠뜨린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3~40년대 배경의 '어톤먼트(Atonement)'는 13세 소녀의 철없는 거짓말로 풍비박산이 난 로비와 쎄실리아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영화다.

러브스토리? 참 좋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내용이 전혀 신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가 성인 남자와 짝사랑에 푹 빠진 나머지 어처구니 없는 짓도 불사한다는 내용은 드라마/스릴러 쟝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90년대초에 나온 알리시아 실버스톤 주연의 'The Crush'도 그중 하나다.

물론, '어톤먼트'는 'The Crush'처럼 질투심에 불타는 어린 소녀의 복수극에 촛점을 맞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만은 사실이다. 로비와 쎄실리아의 이뤄질 수 없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지만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비극으로 몰고간 건 질투심 어린 어린아이의 철없는 거짓말이다. '속죄'라는 의미의 'Atonement'가 제목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유쾌한 러브스토리는 물론 아니다. 누가 뭐래도 슬프고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맞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애절함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

쎄실리아는 런던에서 간호사가 됐고 로비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 군에 입대해 프랑스에 배치됐다.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로비를 전쟁터로 보낸 장본인은 브라이오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13세때 한 거짓말 덕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전쟁'과 '이별'이 나온다는 것.

그렇다. 철없는 어린아이의 '크러쉬(Crush)'사건에서 은근 슬쩍 '전쟁'과 '이별' 이야기로 이동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이별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한다'는 내용은 이런 류의 멜로 러브스토리 영화에서 무지하게 자주 보던 것이다. 여기에 '이게 다 13세 소녀의 철없는 짓 때문'이라는 것을 보태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크러쉬(Crush)'와 '전쟁과 이별'이란 흔해빠진 테마를 한데 묶어놓은 게 전부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어톤먼트'엔 거진 교과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별장면'까지 나온다.

쎄실리아는 버스를 타고 떠나고...



로비는 쎄실리아가 탄 버스를 뒤쫓고...



왜?

기네스 맥주 생각이 나서...?

C'mon man, this is TWENTY FIRST CENTURY!

저런 장면 보면서 훌쩍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좋게 표현하면 '클래식 영화의 한장면처럼 연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40년대라고 40년대에 만든 영화처럼 보이도록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옛날 영화의 향수에 젖어 다른 것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해야할지도...



또 한가지 신경쓰이는 것은 아무리봐도 어설픈 성인영화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언 매키완((Ian McEwan)의 원작소설을 읽지 않은 덕분에 원작이 얼마나 성인용인지 모르겠지만 영화 줄거리만 보면 R(17세 이상)등급에 어울릴만한 성인영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로비가 쎄실리아에게 쓴 선정적인 내용의 편지를 비롯해 성인테마 분위기가 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손에 꼽히는 몇가지만 빼면 패밀리 영화 수준의 러브스토리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편지에 씌인 단어 한 두개를 바꾸고, 섹스씬 수위를 약간 낮추고, 병원에서 치료받는 부상 병사들의 상처부위 노출을 줄인다면 PG-13, 심지어 PG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누드씬과 섹스씬이 자주 나오는 영화라면 또다른 얘기겠지만 '어톤먼트'는 이쪽과도 거리가 상당히 멀다. '에로티시즘'이란 단어와는 무관한 영화다. 반드시 섹스씬이 나와야 성인영화인 건 물론 아니지만 '어톤먼트'는 조금만 수정하면 PG, PG-13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패밀리 러브스토리'지 다른 성인 러브스토리처럼 '끈끈한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패밀리 영화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서든 막고 억지로라도 R등급을 받고자 한 게 아니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 그랬을까?

이 모두가 키이라 나이틀리를 성인 연기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세팅인 것일까?



'어톤먼트'에서 보여준 나이틀리의 연기는 큰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이틀리가 사극 멜로영화 여주인공에 어울리는지는 생각해보게 된다.

어찌보면 '캐리비언의 해적들' 시리즈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리비언의 해적들'에서의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지우더라도 나이틀리가 시대극에 어울리는 배우로 보이지 않는다. 나이틀리는 '어톤먼트', '실크' 등에서 '지난시대의 여인'으로 자주 나왔지만 아무리 봐도 그쪽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멜로영화와 나이틀리를 결합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나이틀리와 같은 'Happy Face'가 멜로영화 여주인공에 어울리는지 헷갈린다. 이 또한 '캐리비언의 해적들'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캐리비언의 해적들' 탓만 할 순 없겠지?

나이틀리가 이미지 변신을 시도중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성인 연기자로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영화들을 통해 성인 연기자가 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Closer'에서 스트립 댄서역으로 성인 연기를 시도했다가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으로 아이들 품으로 직행한 나탈리 포트맨처럼 될 수 있다. 성인 연기에 도전하더라도 잘 어울리는 영화와 역할을 잘 골라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지 무조건 성인 연기에만 집착하면 죽쑬 수도 있는 것.



반면, 로비역의 제임스 매커보이는 잘 어울렸다. 요란스러운 액션영화보단 '어톤먼트'처럼 차분하고 잔잔한 드라마에 잘 어울리는 배우다. 그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도 코메디, 드라마 쟝르다.

그렇다고 매커보이가 액션영화를 안찍는 건 절대 아니다.

안젤리나 졸리, 모건 프리맨과 함께 출연한 액션영화 '원티드(Wanted)'가 올여름 개봉예정이다. 이 영화에서도 매커보이는 삘리리한 청년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프로페셔널 킬러로 성장한다니 '어톤먼트'에서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줄 듯.



하지만,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브라이오니를 연기한 3명의 여배우들이다.

철없는 거짓말로 사고를 쳤던 13세 소녀, 잘못을 깨달은 18세 소녀, 그리고 노인의 모습까지 시대순으로 '3명의 브라이오니'가 영화에 나온다.

그렇다. 할머니까지 나온다. 덕분에 영화 '타이타닉' 냄새도 난다. 할머니가 된 브라이오니가 마지막으로 쓴 쎄실리아와 로비에 대한 논픽션 소설의 내용이 영화에 나온 셈이기 때문이다. '타이타닉'처럼 인터뷰식 회상은 아니고, 할머니의 회상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은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들이 직접 자기소개를 하지 않더라도 브라이오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3명 모두 오른쪽 눈 밑의 점을 갖고있는 덕분이다.



이중에서 베스트를 꼽는다면?

길게 생각할 것 없다.

13세의 브라이오니를 연기한 Saoirse Ronan이다.

13세 브라이오니가 '다다다다' 뛰어다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이토록 천진난만해 보이던 여자아이가 성인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끼어들어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는다.

Saoirse Ronan은 '어톤먼트'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에도 노미네이트 됐다. 골든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된 7개부문 중에서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드는 게 바로 Ronan의 여우조연상이다.



7개부문이라고?

'어톤먼트'는 심하게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골든글로브 7개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의 영화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대로 매력이 있는 영화라는 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어도 상복 터질 정도로 잘만든 영화로는 보이지 않는다. 노스탈직 멜로 러브스토리에 빠져버리면 줄거리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무조건 멋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톤먼트'는 또하나의 진부한 러브스토리 이상이 아니다.

아무래도 '어톤먼트'를 딱 2개의 단어로 표현하라면 '지루'와 '허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건에 휘말리면서 줄거리와 등장 캐릭터 모두가 요동치기 전까지는 스토리 진행 스피드가 더디고 지루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메인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면 금새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도 다른 영화에서 재탕, 삼탕한 내용이다보니 최루성 성인 멜로영화처럼 그럴싸하게 폼잡아 놓은 게 전부처럼 보였다. 처음엔 거창하게 보였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니 '결국 이런 얘기였냐'는 생각만 들 뿐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영화는 같은 장면을 2개의 다른 시점에서 보여주고 플래시백씬도 나오는 등 꽤 아기자기한 편이다. 철없던 13세 소녀에서 18세가 되어 잘못을 깨닫고, 노인이 되어 마지막 '참회의 소설'을 발표하기까지의 악녀(?) 브라이오니의 이야기도 그런대로 흥미롭다. 하지만, '결국은 흔해빠진 얘기였다'는 결론을 바꿀 정도는 못된다.

댓글 4개 :

  1. 님의 리뷰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원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속죄를 한번 읽어보시면, 이 영화의 줄거리가 진부한 것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소설에서 영화로 매체를 옮기면서 원작의 팬으로서 어느정도 원작이 훼손될거라는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전 이 작품의 영화화된 결과를 보고나서는 굉장히 만족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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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책을 감명깊게 읽은 분들은 만족하셨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저는 책을 읽은 이후에도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본 뒤 서점으로 달려가서 책을 집었다가 내려놨었거든요.
    책도 기본 줄거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였죠.
    하지만, 기회가 오는대로 책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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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답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글쓴 분께서도 지적해주셨듯이 이 영화의 줄거리는 멜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진부함이 엿보이긴 합니다만, 그렇지만 영화도 소설도 줄거리가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거든요. 제 생각을 강요드리는 거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줄거리외에 예를 들면 브로니와 로비,세실리아의 시점 이동을 얼마나 능숙하게 처리했는지, 필터를 사용한 카메라 렌즈의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전쟁터의 참혹함을 담은 롱테이크 등등의 기법은 영화적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 영국아카데미에서는 이 어톤먼트에게 작품상을 수여했었고, 세계 유수의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만점을 준 (로저 에버트 등등) 것은 이런 점들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원작도 워낙 뛰어난 작품이지만,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저의 사견일뿐입니다. 제 긴 덧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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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줄거리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샌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데 이들과 차별되려면 결국 스토리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거죠.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줄거리를 가장 중요시 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연출, 연기, 촬영, 특수효과 등이 뛰어나더라도 줄거리가 부족해 보이면 전체적으로 만족하기 힘들더군요.
    오락영화는 몰라도 드라마 쟝르는 더욱 그렇구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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