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일까?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이 바닥났다는 것이다. 숏 스토리까지 포함한 플레밍의 소설을 거의 모두 영화로 옮긴 바람에 이제는 더이상 남아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플레밍의 원작이 바닥난 것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레밍이 1964년 사망하기 전까지 12편의 제임스 소설과 여러 편의 숏 스토리를 남겼지만 1987년 제임스 본드 시리즈 제 15탄 '리빙 데이라이트'를 마지막으로 플레밍의 원작소설에서 제목을 따올 수 없게 됐다. 기초로 할 원작이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제목마저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물론, 요즘 영화팬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원작소설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게 뭐가 대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영화와 원작이 크게 달랐는데 문제될 게 있냐'고 할 지도 모른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목부터 시작해서 영화제작의 상당 부분을 원작소설에 의존해 왔던 시리즈가 오리지날 제목과 스토리로 전환하는 게 말처럼 쉬울 것 같냐는 게 문제다. 소설에서 제목과 플롯의 일부만을 '참고'한 게 전부였다 하더라도 이언 플레밍의 원작과 무관한 제목과 스토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은 새로운 제목과 스토리를 사용하되 플레밍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했다. 플레밍의 소설과 무관한 첫 번째 오리지날 타이틀 '라이센스 투 킬(1989)'을 보면 스크린라이터가 플레밍의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목과 메인 플롯은 오리지날이지만 '죽느냐 사느냐', '두번 산다', 숏 스토리 'The Hildebrand Rarity' 등 플레밍의 원작을 많이 참고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90년대 피어스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시작하면서 부터는 이언 플레밍 원작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007 시리즈 베테랑 스크린라이터, 리처드 메이밤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90년대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제목도 낯설고 이언 플레밍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이름만 제임스 본드고, 코드네임만 007인 영화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피어스 브로스난 제임스 본드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본드걸, 가젯, 본드카 등 007 영화 시리즈 포뮬라를 착실하게 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제임스 본드 영화들이 철저하게 '팬보이 스타일'이었다는 평를 듣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007 제작진은 유일하게 오피셜 007 영화로 제작되지 않은채 남아있었던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 '카지노 로얄'을 영화화 하기로 결정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를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발탁하면서 이언 플레밍의 클래식 원작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리빙 데이라이트(1987)' 이후 거의 20년만에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서 제목을 따온 영화가 나오게 됐다.
하지만, 원작고갈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피셜 007 시리즈로 제작되지 않은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소설이 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제목으로 아직 사용되지 않은 플레밍의 숏 스토리는 몇 개 남아있지만 어디까지나 제목만 사용되지 않은 게 전부일 뿐 줄거리는 여러 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사용되었으므로 스토리까지 참고할 수 없는 상태다.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는 그 중 예외였다. 제목과 스토리 모두 'AVAILABLE'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콴텀 오브 솔래스'의 줄거리가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어드벤쳐와 거리가 멀다는 것.
007 제작진은 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의 줄거리를 새로 만드는 대신 제목만은 플레밍의 원작에서 따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얼핏 보기엔 플레밍의 원작을 기초로 만든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영화가 탄생했다.
'콴텀 오브 솔래스'는 현재 전세계에서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본드팬들은 '카지노 로얄'보다 못하다고 한다. 액션과 스턴트 등 오락적인 부분은 이전보다 높아진 것 같지만 본드팬들과 영화 평론가들은 여전히 '카지노 로얄'이 한 수 위라고 한다.
왜 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의 원작소설에 비교적 충실한 편인 반면 '콴텀 오브 솔래스'는 제목만 따왔을 뿐 스토리는 100% 오리지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될 게 있냐고?
있다. 원작이 아닌 오리지날 스크립트로 만든 007 영화에선 이전 007 시리즈에 나왔던 부분들을 자주 재활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 '뷰투어킬(A View To A Kill/1985)'이 좋은 예다. '콴텀 오브 솔래스'와 마찬가지로 제목만 플레밍의 숏 스토리에서 따온 게 전부인 '뷰투어킬'이 '골드핑거 언오피셜 리메이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콴텀 오브 솔래스'에도 007 시리즈 오마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냐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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