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노인의 몸을 가진 아기가 태어난다. 갓 태어났는데도 모든 신체조건이 80대 노인인 이상한 아기가 태어난 것.
갓 태어난 아기가 80대 노인의 모습이란 것을 안 아버지는 갓 난 아들을 남의 집 계단에 버리고 사라진다.
계단에서 울고있는 아기를 발견한 것은 '노인의 집'에서 노인들을 보살피는 퀴니(타라지 헨슨)라는 흑인 여성. 퀴니는 노인의 몸을 한 버려진 아이에게 '벤자민'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친자식처럼 키우게 된다.
이렇게 해서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에 이어 '피부색이 다른 모자(母子)'가 또 하나 탄생했다. 요즘 들어 유행인 듯.
잠깐! 그런데 내용이 원작과 많이 다르지 않냐고?
영화버전 '벤자민 버튼(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은 프랜시스 스캇 피츠제럴드(Frances Scott Fitzgerald)의 숏 스토리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갈수록 젊어진다'는 설정 하나를 제외하곤 원작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 대신 다른 영화가 보였다. 한 남자의 일생을 그렸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회상과 나레이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등은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와 비슷해 보였다. '벤자민 버튼'에선 벤자민이 아닌 데이지가 지난 일을 회상한다는 게 차이점이지만 이것도 다른 영화와 비슷해 보였다. 할머니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영화 '타이타닉(Titanic)'과 비슷해 보였기 떄문이다.
그러나, '어느 영화와 더 비슷한가'를 따지는 건 그리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건 '포레스트 검프'와 '타이타닉' 모두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데이지가 누구냐고?
데이지는 영화에선 여주인공이지만 소설엔 나오지 않는 캐릭터다. 원작에 변변한 여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데이지로 대신한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건 어릴 적 데이지와 성인이 된 데이지를 연기한 엘 패닝과 케이트 블랜칫 모두 브래드 핏과 함께 '바벨(Babel)'에 출연했었다는 것.
그런데 이름이 데이지라...
혹시 '위대한 갯츠비'의 그 데이지는 아니겠지?
하긴 돌고 도는게 이름이니까 그런가부다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피식 웃지 않고는 넘길 수 없었던 부분이 하나 있다; 데이지가 발레리나로 나온다는 것이다.
C'MON MAN! 아무리 클래식한 멜로드라마라지만 발레리나까지 나올 필요가 있었단 말이냐!
그러나, 데이지의 문제는 발레가 아니라 '멜로드라마 먼저, 벤자민 버튼 나중'으로 보일 정도로 벤자민과 데이지의 러브스토리로 중심을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갈수록 젊어지는 벤자민과 세월이 지나면서 늙어가는 데이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메인으로 만든 것.
30페이지에 불과한 F. 스캇 피츠제럴드의 숏 스토리로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려다 보니 러브스토리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러브스토리가 시원찮았다는 것도 아니다. 크게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었지만 '벤자민 버튼'과 멋지게 매치되는 러브스토리 였다.
그러나, 어렸을 땐 너무 늙어보여서 오해를 받고, 나이 들어선 너무 어려보이는 바람에 오해를 받는 벤자민의 이야기가 충분치 않았다. 노인에서 아이로 거꾸로 늙는(?) 베자민의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했어야 했지만 영화 스토리가 멜로드라마쪽으로 지나치게 쏠린 것. 이 덕분에 노인으로 태어나 갈수록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경우'는 기초적으로만 설명하고 넘어가고, 벤자민과 데이지의 '슬픈 러브스토리'부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됐다.
그래서 일까? 벤자민과 데이지의 러브스토리가 무르익기 전까지는 그다지 흥미로울 게 없었고 약간 지루했다. 초반에는 반짝했지만 러브스토리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특별하다고 할 게 없었고, '벤자민이 갈수록 젊어진다는 것은 알았으니 젊어진 브래드 핏이나 빨리 보자'는 생각만 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Emotional Punch'는 노인 분장을 벗어버린 브래드 핏의 핸썸한 모습과 함께 이어지는 슬픈 러브스토리라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브래드 핏?
그렇다. 브래드 핏이다. 벤자민 버튼도, 러브스토리도 아닌 브래드 핏이다. 브래드 핏이 얼마나 핸썸한 배우인지 확인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씬이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브래드 핏이 늙으면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된다는 것도 보여줬으니까.
노인으로 태어나 세월이 갈수록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 만큼 노인분장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래드 핏과 케이트 블랜칫 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배우들까지 분장을 해야만 했을 정도로 노인분장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영화가 너무 진지하거나 따분해지지 않도록 곳곳에 심어놓은 유머도 오케이 였다. '벼락맞는 사나이' 유머는 약간 쓸데없어 보였지만 웃을 때까지 반복하겠다는 그 끈기는 인정해 주마!
하지만, 역시 아쉬운 부분은 '벤자민 버튼'이 다른 올드스쿨 멜로드라마와 다른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으로 돌아간다. '갈수록 젊어지는 남자와 정상적인 여자의 사랑'이라는 게 독특하게 들리긴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면 그다지 특별할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청년일 때는 너무 늙어보인다는 이유로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전쟁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는 노년이 되었을 때는 겉으로 10대 소년이라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벤자민 버튼의 개인사에 대한 에피소드가 보다 풍부했더라면 사정이 달랐을 지도 모른다. 밋밋하게 배를 타고 여행하며 여러가지를 경험하는 것보다 벤자민 버튼에게만 가능한 에피소드들이 자주 나왔더라면 그만큼 독특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영화 '벤자민 버튼'은 최루성 멜로드라마에 모든 게 묻혀버리면서 또 하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멜로영화처럼 보이게 됐다.
그렇다고 영화가 시시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벤자민 버튼'이 전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데엔 이의 없다. 다만, 벤자민과 데이지의 러브스토리 이외의 부분에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더욱 멋진 영화가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벤자민 버튼 스토리의 가능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잘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A'가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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