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제임스 본드 vs 안티-제임스 본드

1962년 1탄 '닥터노(Dr. No)'를 시작으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영화 또는 캐릭터들이 많이 생겨났다. '제임스 본드 포뮬라'가 '흥행성공 포뮬라'로 확인되자 다들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일부는 제임스 본드를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 제임스 코번(James Coburn) 주연의 제임스 본드 패로디 데릭 플린트(Derek Flint) 시리즈가 그 중 하나다.


▲제임스 코번 주연의 데릭 플린트 시리즈

그렇다고 패로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임스 본드와 정 반대 성격의 스파이 캐릭터를 내세운 스파이 시리즈들도 있었다.

미국 ABC의 80년대 TV 시리즈 '맥가이버(MacGyver)'가 대표적이다.

제임스 본드가 요란스러운 가젯에 의존하는 수퍼 수파이였다면 맥가이버(리처드 딘 앤더슨)는 가젯은 고사하고 총도 일체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스위스 아미 나이프 하나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하는 수퍼 에이전트였다.

제임스 본드를 대표하는 무기가 월터PPK였다면 맥가이버의 것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였으니 더이상 길게 비교할 필요가 없을 듯. 살상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비폭력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에이전트는 아마도 맥가이버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비록 제임스 본드와 같은 '멋쟁이'는 아니었지만 맥가이버는 또 다른 차원의 '멋쟁이'였다.


▲리처드 딘 앤더슨의 '맥가이버'

에드워드 우드워드(Edward Woodward) 주연의 60년대 영국 TV 시리즈 '캘런(Callan)'도 그 중 하나다. 우드워드는 영국 정보부 소속의 냉혈킬러, 데이빗 캘런을 연기했다. 80년대에는 미국 CBS의 TV 시리즈 '이퀄라이저(The Equalizer)'에 전직 에이전트 출신 '해결사' 로버트 맥컬(Robert McCall)로 출연했다.

우드워드가 연기한 캐릭터 모두 제임스 본드와 차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에드워드 우드워드의 '캘런'와 '이퀄라이저'

빅스크린으로 넘어 가 보면, 마이클 케인 주연의 60년대 스파이 영화, 해리 팔머 시리즈가 있다. 해리 팔머 시리즈는 영국의 소설가, 렌 데이튼(Len Deighton)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스파이 영화로, 영국 배우 마이클 케인이 제임스 본드와 180도 다른 스파이, 해리 팔머를 연기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007 시리즈 공동 프로듀서였던 해리 살츠맨(Harry Saltzman)이 해리 팔머 시리즈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한 손엔 마티니, 다른 쪽엔 미녀를 안은 수퍼스파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정 반대 성격의 또다른 스파이 프랜챠이스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해리 팔머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캐릭터인 만큼 서로 경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와 해리 팔머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제임스 본드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 해군장교를 거쳐 멋쟁이 에이전트가 되었다면 해리 팔머는 군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얼떨결에 스파이가 되었다. 제임스 본드가 신출귀몰한 가젯으로 무장한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다니는 에이전트였다면 해리 팔머는 가젯은 고사하고 타고 다닐 자동차도 없었다.


▲마이클 케인의 해리 팔머 시리즈

해리 팔머 캐릭터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해리 팔머 시리즈에서도 여전히 제임스 본드의 흔적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제임스 본드와 존 르 카레의 소설의 중간쯤 되어보였고, 해리 팔머는 제임스 본드의 정 반대처럼 보이도록 억지로 노력하는 듯 했다. '제임스 본드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티가 났다.

제임스 본드가 해리 팔머처럼 될 수 없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다.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마티니를 마시며 살인을 하는 수퍼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뜻하지 않게 스파이가 된 초라한(?) 해리 팔머처럼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본드와 다르다는 것은 알겠는데 해리 팔머만의 특징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이클 케인의 해리 팔머 시리즈가 별 볼 일 없다는 건 아니다. 1965년 'The IPCRESS File'로 시직한 해리 팔머 시리즈는 비록 오래 이어지진 못했지만 60년대 스파이 영화 클래식 중 하나로 꼽힌다.


▲해리 팔머 2탄 'Funeral In Berlin(1966)'의 한 장면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확실하게 구별되는 스파이 영화는 나올 수 없는 걸까?

충분히 가능하다. 캐릭터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영화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들처럼 '진정한' 스파이 영화를 만들거나 '맥가이버'처럼 제임스 본드와 겹치는 부분이 없다는 게 한눈에 보이는 캐릭터를 만들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 프로듀서들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모델로 한 '캐릭터 중심의 액션영화 프랜챠이스'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중엔 제임스 본드와 차별화를 시도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메인 캐릭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스파이 테마의 액션 어드벤쳐'라는 '기초적인 포뮬라'에서 벗어나지 않은 영화는 결국엔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겹치게 되어있다. 서로간에 차이가 있더라도 그 차이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으면 데릭 플린트 시리즈, 어스틴 파워(Austin Powers) 시리즈, 'If Looks Could Kill' 등과 같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 패로디 영화와 크게 다를 게 없어진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1953년 소설 '카지노 로얄'로 시작한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이후에 나온 수많은 스파이 어드벤쳐물 중에서 제임스 본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이 모두가 짝퉁 패로디라는 건 아니다. 커스튬 수퍼히어로가 배트맨 하나가 전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본드와 비슷해 보이는 스파이 캐릭터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사실, 새로운 멋진 스파이 캐릭터의 탄생은 환영할 만 한 일이다. 주제파악을 못하고 지나치게 시건방을 떨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도 전혀 없다.

문제는 주제파악을 못하고 지나치게 시건방을 떠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이다.

YOU KNOW WHO...:)

댓글 없음 :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