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가 이상해지고 있다.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가 한동안 붐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전형적인 포뮬라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다. 배트맨 영화인 만큼 분위기가 어느 정도 어두운 것은 문제될 게 없었지만 너무 오버를 하는 바람에 조숙하게 보이려고 무진 노력하는 어린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 같았다. 어둡고, 진지하고,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좋아도 검은 망토를 두른 커스튬 수퍼히어로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되는데,'다크 나이트' 제작진은 이를 잊은 듯 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수퍼히어로 영화는 죄다 어린이용 만화영화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냐'고 따져 묻는다.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정도'가 있다.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시리즈인 만큼 배트맨 캐릭터만 점잖고, 진지하고, 스타일리쉬하면 될 일이지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죄다 어둡고 무거워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와는 다르게 만들겠다', '수퍼히어로 영화=유치한 청소년 영화라는 인식을 바꾸겠다'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아무리 스토리가 심오하고, 영화 분위기가 진지하다고 해봤자 코믹북, 공상과학물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애들영화'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변화를 주려고 하면 자칫하다간 '유치한 청소년 영화'보다 더욱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최근에 개봉한 '왓치맨(Watchmen)'이 바로 이런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왓치맨'은 높은 폭력수위와 노출씬, 그리고 나름 의미심장해 보이는 그럴싸 한 스토리로 '성인용 수퍼히어로 영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스토리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어 보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핵전쟁 위기에 수퍼히어로들이 개입한다는 설정은 1951년작 흑백영화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에서 핵무기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가지고 지구를 찾은 외계인을 수퍼히어로로 바꿔놓은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만약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2008년 리메이크작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이 1951년작 오리지날과 마찬가지로 핵전쟁의 위협을 다뤘더라면 '왓치맨'과 아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제와서 웬 냉전과 핵전쟁 얘기가 나오냐고?
'왓치맨'은 냉전이 한창이던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은 레이건이 아니라 닉슨이다. 영화상의 미국은 월남전에서 이겼고 닉슨이 5선에 성공했지만 매우 암울한 나라로 나온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레이건을 대선후보로 거론하면서 '그 누구도 카우보이가 백악관에 입성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한방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 '왓치맨'은 순수한 수퍼히어로 영화가 아니라 정치 풍자영화라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수퍼히어로 영화지만 실제로는 닉슨, 레이건, 냉전, 핵전쟁 같은 테마를 제외하고 나면 건질 게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수퍼히어로 SF영화에서 굳이 고리타분한 정치 타령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다. 유치해지기 쉬운 넌센스 코믹북 수퍼히어로 스토리를 제법 그럴싸 하게 보이도록 포장하는 데는 왠지 어른스럽고 무거워 보이는 정치 얘기가 왔다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수퍼 히어로 스토리에 꼭 나와야 했는지, 또다른 차원의 코믹북 수퍼히어로 스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는지, 아니면 '코믹북 수퍼히어로 영화도 작품성(?) 높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유치한 '쇼'에 불과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의 'Unforgettable'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격투를 벌이는 씬이 나온다고 스타일리쉬한 '아트무비'라도 되는 건가?
코믹북 커스튬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Political Killing' 타령을 하는 걸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액션이라도 풍부했더라면 덜 따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왓치맨'은 아예 액션영화로 보이지도 않았다. 치고받는 격투씬이 더러 나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스릴과 서스펜스와는 담을 쌓은 영화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코믹북 원작에 충실했기 때문 아니겠냐고?
원작이 중요하다는 건 물론 알고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퍼히어로들이 나오는 어색한 드라마를 만들어도 괜찮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원작을 잘 살리는 것은 좋아도 쟝르까지 바뀐 것처럼 보여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작년의 '다크 나이트'도 이런 식으로 '매니아 위주' 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일반 관객들이 '색다르다'와 '재미있다'를 맞바꾸고자 할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원작을 읽지 않았거나 코믹북을 많이 읽지 않은 일반 영화관객들 중에 '수퍼히어로 드라마'를 기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영화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진지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액션도 볼 게 없는 수퍼히어로 영화에 만족할 수 있을까?
영화라도 짧았다면 견디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었다. 런타임이 2시간40분이 넘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따분하고, 액션과 특수효과는 볼 게 없는데 영화는 끝날 줄 몰랐다. 이렇다 보니 극장 곳곳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극장은 제법 꽉 찬 편이었지만 1시간쯤 지나니까 여기저기서 드르렁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처음엔 음향효과인가 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라이브 공연이더라.
그렇다. '왓치맨'은 재미있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스타일리쉬한 수퍼히어로들의 시원한 액션과 멋진 특수효과를 기대했다면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년의 '다크 나이트'가 너무 암울하고 딱딱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한 술 더 뜨는 '왓치맨'을 건너뛰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다: 닥터 맨해튼의 파란색 CGI 자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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