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James Bond)라는 캐릭터는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에 의해 탄생했다. 하지만, 영화 시리즈는 다르다. 미국인 영화 프로듀서 알버트 R.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와 캐나다인 영화 프로듀서 해리 살츠만(Harry Saltzman)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공동 프로듀서였던 해리 살츠만이 70년대초 007 시리즈를 떠났으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007 시리즈는 미국인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007 시리즈를 제작하는 마이클 G. 윌슨(Michael G. Wilson)과 바바라 브로콜리(Barbara Broccoli) 모두 미국인이며, 지난 1996년 작고한 알버트 브로콜리의 자녀들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미국인, 특히 영화인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배우부터 보자. 인물이 좀 괜찮다 싶은 미국 남자배우들 중엔 제임스 본드를 한 번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배우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제임스 본드 역할이 돌아올 확률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도 알고있다.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나 겉으로는 거기서 거기지만 007 제작진은 지금까지 미국인 남자배우를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한 적이 없다. 미국배우가 후보에 오른 적은 있지만(예: 로버트 와그너) 실제로 캐스팅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요새는 미국배우들은 제임스 본드 후보로도 거론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여도 미국배우라면 제임스 본드가 될 확률이 제로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기 때문이다. 이 덕분인지, 제임스 본드의 'ㅈ'도 모르는 사람들도 제임스 본드 후보로는 영국배우만을 꼽는 센스가 있더라.
영화배우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도 철저하게 영국인 일색이었다. 1탄부터 16탄까지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연출을 맡았던 영화감독은 모두 영국인이다. 테렌스 영(Terence Young), 가이 해밀튼(Guy Hamilton), 루이스 길버트(Lewis Gilbert), 피터 헌트(Peter Hunt), 존 글렌(John Glen) 모두 영국인이다. '브리튼 출생'이 아닌 영화감독이 007 시리즈 연출을 맡기 시작한 건 90년대 들어서 부터지만 마틴 캠벨(Martin Campbell - 뉴질랜드), 로저 스파티스우드(Roger Spottiswoode - 캐나다),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 - 영국), 리 타마호리(Lee Tamahori - 뉴질랜드) 등 영국연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스위스인 영화감독, 마크 포스터(Marc Forster)가 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연출을 맡으면서 '영국인 영화감독' 전통은 완전히 깨졌다. 미국 영화감독도 007 시리즈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인 영화감독이 007 시리즈 연출을 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처럼 007 시리즈가 나름 철저하게 정해진 룰에 맞춰 제작되자 일부에선 '007 시리즈는 선택받은 자들끼리 만드는 시리즈'라며 비꼬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 어렸을 적부터 제임스 본드 시리즈 팬이었던 그는 영화감독이 된 이후 007 프로듀서인 알버트 브로콜리를 찾아가 007 시리즈 연출을 맡고싶다고 했으나 '부적격'으로 거절당한 바 있다. 스필버그에 의하면, 브로콜리가 007 시리즈 연출자는 영국인 영화감독 중에서만 고른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 바람에 탄생한 게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다. '인디아나 존스 3'에서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우처럼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부적격 판정'을 받아 목표를 이루지 못한 미국 영화인들이 한 둘이 아닐 수도 있다. 개중에는 '왜 나는 제임스 본드가 되지 못하는 건가', '왜 나는 007 시리즈를 연출할 기회가 오지 않는 건가' 등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제임스 본드가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계속 궁시렁대는 사람들은 일단 의심해 볼 만 하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부터는 흑인들까지 제임스 본드를 하고싶다고 나서고 있다. 영화배우 뿐만 아니라 힙합뮤지션들까지 '흑인 제임스 본드'를 외치고 있다. 물론 이들도 '흑인 제임스 본드'는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잘 알고있겠지만 '흑인 제임스 본드는 곤란하다'고 하면 인종편견을 갖고있다고 무조건 몰아세우려 들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다음 번 제임스 본드가 또 백인으로 결정되면 '007 제작진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얘기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이 많은 배우라면 현역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도 빠지지 않는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블론드에 단신이라서 제임스 본드로 부적격이라는 평을 받았던 배우다. 지금은 많이 잠잠해졌지만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가 된 이후에 수많은 '안티'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크레이그는 자신 또한 편견에 시달린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듯 하며, '흑인 제임스 본드' 주장에도 힘을 실어준 바 있다. 크레이그가 블론드인 데다 단신이라서 제임스 본드로 부적격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의 인종이 바뀌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라는 것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도 한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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