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4일 월요일

난장판 전쟁영화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

2차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또 나왔다. 영화 뿐만 아니라 비디오게임에서도 '전쟁물' 하면 '2차대전'이라서 이젠 물릴대로 물렸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아이디어도 가지각색이다. 평범한 전투영화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뿐만 아니라 유대인 레지스탕스('디파이언스(Defiance)'), 히틀러 암살을 공모했던 독일군들의 이야기('발키리(Valkyrie)') 등 소잿거리도 끊임없는 듯 하다.

그렇다면 2009년에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의 2차대전 영화도 어딘가 독특한 데가 있을 게 분명해 보인다고?

이에 대한 대답은 'YES'와 'NO' 모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가 독특하지 않은 이유부터 살펴보자.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Inglourious Basterds)'는 한마디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주연의 '디파이언스'와 톰 크루즈(Tom Cruise) 주연의 '발키리'를 한데 합쳐놓은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가 유대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미군 특공대 '배스터즈'와 나치에게 온가족을 잃은 유대인 아가씨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가 방문할 극장을 날려버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무기력하게 개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삶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는 영화 '디파이언스'의 테마와 '만약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었다'는 '발키리'의 테마를 빌려와 하나로 조립한 셈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디파이언스'의 비엘스키 형제는 생존을 위해 나치와 싸운 것이지만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의 유대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미군 특공대와 나치에 쫓기는 유대인 아가씨, 쇼사나(멜라니 로랑) 모두 나치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총을 들고 나치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담은 건 '디파이언스'와 다를 게 없지만 이들의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 복수라는 게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히틀러 암살플롯도 '발키리'와 약간 다른 부분이 있다. '발키리'에선 히틀러 암살계획을 공모한 게 독일군 장교들이었으나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에선 알도(브래드 핏)가 지휘하는 유대계 미국인 특공대 '배스터즈', 유대인 아가씨, 그리고 영국군이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차이처럼 보이지만, 2차대전이 나치 내부의 쿠데타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발키리'의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유대인과 연합군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나치를 쓸어버리고 승전했어야지 나치 내부 쿠데타로 끝났다면 서운(?)하지 않았겠냐는 얘기다. 일부에선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던 독일군 내부 쿠데타 세력에도 유대인에 적대적인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해 전쟁이 일찍 끝났더라도 유대인의 사정이 개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대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미군 특공대와 나치에 쫓기는 유대인 아가씨가 히틀러 암살을 계획한다는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의 설정이 우연일 리 없어 보인다.

그래도 독특한 부분 또한 있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렇다. 있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가 '디파이언스', '발키리'와 가장 크게 다른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렇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영화가 아니라 역사를 새로 쓴 영화다. 다시 말하자면, 판타지 영화라는 것이다. 판타지 영화라고 하면 '수리수리마수리' 하는 영화가 떠오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처럼 모두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알고있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을 마음대로 바꿔놓은 경우에도 판타지 영화에 해당하게 된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영화를 넌센스처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글쎄올시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화끈한 복수를 할 기회를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다. 유대인들이 나치들을 무자비하게 짓이기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통쾌함을 만끽하라고 만든 것이라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메인 테마가 '복수'인 만큼 역사적 사실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화풀이나 실컷 하라는 의도로 볼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영화가 약간 엉뚱하게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치 병사들을 야구배트로 때려죽이고, 머리가죽을 벗기고, 그들의 이마에 칼로 스와스티카(Swastika)를 새기는 '배스터즈', 나치만 보면 살인충동을 느끼는 독일군 병사, 핸썸한 독일군 병사의 구애를 차갑게 외면하면서 자신의 극장에 불을 질러 나치를 몰살시킬 계획에 전념하는 유대인 아가씨 등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토리 역시 역사고 뭐고 따지지 않고 난장판으로 돌아가는 게 오히려 영화에 더욱 잘 어울리지 않겠냐는 생각도 든다. 2차대전 영화 배경음악으로 스파게티 웨스턴 음악과 데이빗 보위의 'Cat People (Putting Out Fire)'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계속해서 엉뚱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 아닐까?



상당히 엉뚱한 것 또 하나는 영화에 외국어가 너무 많이,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는 분명히 미국영화이지만 유럽영화처럼 보이는 영화다. 영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씬이 워낙 많은 바람에 자막을 읽다가 볼 일 다 보도록 만들었다.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어로 대화하고, 독일인들이 독일어로 대화하는 게 당연한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게 더욱 리얼하게 보이지 않냐고?

ARE YOU FUCKING KIDDIN' ME??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제멋대로인데 대화씬에서는 리얼리즘 때문에 외국어를 사용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발키리'가 개봉했을 때 일부 리뷰어들은 '독일군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 만큼 리얼리즘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발키리'의 등장 캐릭터 전원이 독일인이니 대사를 100% 독일어로 했어야 옳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하면 이것이 독일영화지 톰 크루즈 주연의 미국영화인가? 하지만 이들은 '하다못해 독일 액센트의 영어를 구사했으면 보다 자연스럽지 않았겠냐'고 반박했다. 다시 말하자면, 조금 더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쓸 수 있지 않았냐는 지적이다. 물론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우스운 이야기다. 독일인들이 독일 액센트의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건 자연스럽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독일인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데 일부러 독일어 액센트를 흉내낸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도 '발키리'는 실화를 기초로 한 영화인 만큼 이런 논쟁이 생길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2차대전사를 제멋대로 바꿔놓을 정도로 리얼리즘은 일단 제쳐놓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에서 굳이 외국어 대화씬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건 아니다. 입맛에 맞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볼 만 했다.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유머 하나 만큼은 훌륭했다. 코메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상당히 코믹한 장면들이 많았던 덕분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스토리였음에도 도중에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브래드 핏의 흰색 턱시도 패션이다. 흰색 턱시도에 빨간색 카네이션을 꼽은 게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ayle)'을 만들고 싶어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아직도 약간의 미련이 남아있는 듯 하다.



좋다. '인글로리어스 배스터즈'가 약간 어이없고 난장판인 전쟁영화였지만 유머도 풍부했고 그런대로 못 봐줄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한가지 이상한 게 있다.

영화를 보면서 왜 자꾸 '배스터즈'나 유대인 아가씨가 아닌 나치 독일군들을 동정하게 되었을까?

나치가 문제있는 집단이고, 특히 유대인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총격사건이 벌어졌던 워싱턴 D.C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박물관도 둘러본 적이 있다. 또, 세계적으로 나치 추종자들이 지금도 많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네오-나치들이 골칫거리라는 뉴스를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나치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배스터즈'가 독일군 병사들을 무조건 때려잡기만 하고, 이들의 이마에 칼로 스와스티카를 새기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나치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나치가 '죽일 놈들'이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하면 나치가 유대인들을 혐오했던 것과 다를 게 무엇이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통쾌하고 후련하다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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